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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님의 서재입니다.

S.N.L (Save and Load)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최근연재일 :
2019.07.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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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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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SNL - 40

DUMMY

하데스 사건을 마무리한 달의 보름날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면 저장지점이 강제적으로 갱신되고 불러오기가 5회 충전된다. 잔여횟수가 이월되는 것도 아니기에 재영은 남은 불러오기 1회를 자정이 되기 전에 써버릴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저장한 지점은 오늘 아침이었다. 그렇기에 불러오기를 사용하면 오늘 아침부터 자정까지의 모든 일이 확정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지게 된다.

말인즉슨, 그 시간 동안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의욕이 뚝 떨어졌다.


‘어차피 없던 일이 되는 거면 뭔 짓을 해도 상관없잖아?’


그동안 모아둔 종자돈을 탕진해도 되고, 평소에 하지 않는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짓을 해도 괜찮았다. 아직 이별의 아쉬움이 남아있는 김윤아나 근황이 궁금한 공석을 만나러 갈 수도 있었다.


위상충돌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근 한 달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 재영이었다. 모처럼 기회가 생겼을 때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불러오기를 하면 없던 일이 되기는 하지만 기억은 유지되는 관계로 정신적 만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참에 한 번 푹 쉰다는 선택지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좋아, 오늘 하루는 휴가다.’


마침 일요일이었고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자정까지는 12시간 넘게 남았으니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다. 재영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외출 준비를 했다. 동행인조차 없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외출이었다.




위상충돌 후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게 된 까닭에 번화가는 주말에도 상당히 한산했다. 위상충돌 전에 비하면 유동인구가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열었지만 손님 없이 텅텅 비어있는 곳이 많았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바뀌고 있었다. 밖이 위험해지다보니 외식, 외유 문화는 위축되고 배달음식과 실내놀이 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

머지않아 사업체들이 너도나도 배달서비스를 시작하고, 가장 흔한 아르바이트는 배달원이 된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전생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재영은 쉽게 단언할 수 있었다.


재영은 인근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만두가게에 들어갔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건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올 정도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위상충돌 전에는 수십 분이나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도 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대기열 없이 바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서는 목욕탕에 가서 느긋하게 때를 밀었고, 평생 가본 적 없는 고급 마사지샵에 가서 전신 마사지도 받았다. 그 다음엔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 가장 비싼 음료와 디저트를 시켜 시간을 보냈다.


“하아아······ 극락이네. 이러다가 버릇될 것 같다.”


축 늘어져서 고소한 곡물케이크를 우물거리던 재영은 기지개를 켰다. 처음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할지 몰랐지만 막상 빈둥거리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오후 6시가 되자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이 되었다. 한우를 먹을까, 참치회를 먹을까. 그것도 아니면 전생에 즐겼던 고급 한정식을 먹어볼까.

재영은 행복한 고민을 하며 택시를 잡으러 큰길가로 향했다. 내공을 활용해 뛰어가는 게 더 빠르지만 목욕하고 마사지까지 받은 지금 땀을 흘리고 싶진 않았다.


그때 갑자기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는 사람인가 재영이 고민하는 사이, 훅 다가온 젊은 남자는 담배 찌든 냄새를 풍기며 마치 친한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해왔다. 그리곤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야, 웃으면서 따라와라. 쓸데없는 짓 하면 알지? 뒤지게 맞는 거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설마’였다.

TV에서나 이따금 볼 수 있던 전형적인 금품갈취 수법에 걸린 것이다. 시대가 어느 땐데 이런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한단 말인가. 황당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으슥한 뒷골목도 아니고 탁 트인 대로변에서 이런 짓이라니. 배짱이 제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재영은 허허 웃었다. 녀석이 시켜서가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나온 것이었다.


얌전히 녀석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가니 그곳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청소년 4명과, 재영처럼 길을 가다가 끌려온 것처럼 보이는 안경 쓴 남학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경 녀석은 불량한 분위기에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왔냐? 어땠어?”

“껌이던데? 어수룩해 보이는 녀석 하나 낚아채니까 얌전히 따라오더라고.”


처음엔 대로변에서 이런 짓을 하는 배짱이 신기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막나가는 녀석이라도 타인의 시선 아래 사고를 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위상충돌 이후 거리에 행인이 줄어들면서 이 녀석들의 행동을 통제해줄 사람들의 시선이 적어졌다. 그 때문에 이런 대담한 행동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야, 있는 돈 다 꺼내라. 뭐 우리도 양심은 있으니 절반은 돌려줄게. 하지만 숨겼다가 걸리면, 알지?”


안경이 후다닥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넘겼다. 성인도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니는 시대인지라 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은 만 오천 원이 전부였다.


“야, 넌 뭐하냐?”


재영은 돈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딱히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어떻게 대처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해 가만히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재영을 데리고 온 녀석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구겼다. 그리곤 위협할 의도로 재영이 쓰고 있던 캡 모자의 챙을 쳐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재영이 모자를 주우려 허리를 숙이자 뒤로 쓸어 넘긴 다음 모자로 눌러뒀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뭐야, 여자였어?”


영락없이 남자인 줄 알았기에 다들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특히나 재영을 여기로 끌고 온 녀석은 더욱 그랬다. 겉으로 봤을 때 키에 비해 골격이 가늘어서 비실비실한 남자인줄 알고 데려왔기 때문이다.

녀석은 무시당한 게 아니라 재영이 겁먹어서 꼼짝도 못한 거라 생각하고 거칠었던 태도를 한풀 꺾었다.


“좋은 말 할 때 주면 참 좋잖아. 안 그래?”


마침내 결정을 내린 재영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돈을 주고 끝내기로 한 것이다.

애용하는 모자가 더러워져서 기분도 나쁘고 이런 녀석들한테 돈을 주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불러오기를 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된다. 귀찮게 옥신각신 할 필요 없이 적당히 돈을 주고 끝내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법이었다. 기분이 좀 나쁜 걸 제외하면 모처럼 몸도 마음도 산뜻한 상태인데 구태여 훈계한답시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흐음, 반이나 줘야해?”

“왜? 갖고 있는 돈이 아주 많으신가봐? 일단 꺼내기나 해봐.”


재영은 지갑에서 5만원권 20여장을 꺼냈다. 담배피던 녀석들은 물론 같이 삥을 뜯기는 입장인 안경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재영이 현금을 잔뜩 갖고 있는 이유는 체크카드를 썼을 시 박문희에게 문자메시지가 가기 때문이었다. 마사지샵에서 십여 만원을 쓰고 한우나 참치회를 몇 인분씩 먹은 게 문자메시지로 가면 카드를 도난당한 줄 알고 확인전화를 걸어올 공산이 컸다. 그런 귀찮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여윳돈을 모두 현금으로 인출해 갖고 다니던 중이었다.

소매치기나 강도에게 당할 염려가 없는 재영이기에 200만원 가까운 현금을 아무렇지 않게 갖고 다닐 수 있었다. 물론 노골적인 금품갈취를 당하는 건 상정 외였기에 이런 상황에 놓이긴 했지만 말이다.


“뭐야? 너 부잣집 딸이야? 뭔 현금이 이렇게 많아?”


갈취까지 하면서 돈을 원했던 녀석들이지만 막상 큰돈을 보자 머뭇거렸다.

평범한 사람 중에 수백만 원씩 현금을 들고 다니는 얼마나 있겠는가. 부유한 사람이더라도 대부분 지갑에 카드 몇 장과 현금 몇 만원이 전부다.

요즘 세상에 현금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떳떳치 못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100만원을 내민 재영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일이 이상하게 꼬일까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놈은 어느 집단에나 꼭 한 명씩은 있다. 입술에 커다란 피어싱을 하고서 줄담배를 피우던 녀석이 그저 좋다면서 재영의 돈을 낚아챘다.

재영을 데려온 녀석이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피어싱을 만류했다.


“야, 야, 그거 괜찮겠냐?”

“뭐가?”

“딱 봐도 좀 이상하잖아.”

“아니, 그러니까 뭘 말하는 건데?”

“하, 씨발. 멍청한 새끼······.”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 됐다, 됐어. 네가 알아서 해라. 이제 난 모르겠다. 재미없어졌어. 집에 갈란다.”


흥이 깨졌는지 재영을 데려온 녀석을 필두로 5명 중 3명이 자리를 떴다.

눈치 없는 피어싱과 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투실투실한 녀석만 남아 이 돈으로 뭘 할지 시시덕거리며 즐거워했다.


“도, 돌려줘······.”


그때까지 겁에 질려 말이 없던 안경이 조그맣게 소리를 냈다. 덜덜 떨리는데다가 음량도 형편없이 작았다. 피어싱과 투실투실, 두 녀석은 코웃음 쳤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돌려달라고? 뭐를? 네 돈을?”

“내, 내 돈은 괜찮아. 하지만 쟤 돈은 돌려줘. 삥 뜯기에는 너무 큰 돈이잖아.”


양아치 둘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게 뭔 개소리야? 넌 무슨 말인지 알겠냐?”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야?”

“마, 말했잖아! 돌려주라고!”


이어지는 조롱에 안경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에 위압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경은 곧 목소리를 높인 대가를 치러야했다.

피어싱이 발길질로 안경의 배를 가격했다. 뒤로 나동그라진 안경은 잠시 뒤에 배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끼고 있던 안경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안경이 벗겨진 안경잡이는 침침한 눈으로 두 녀석을 노려봤다.


“야, 야, 야, 너 진짜 미쳤냐?”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피어싱이 안경의 뺨을 서너 차례 때렸다. ‘야’를 말할 때마다 손찌검을 하면서 안경의 고개가 좌우로 홱홱 돌아갔다.

마침내 안경도 참지 못하겠는지 피어싱의 얼굴을 이마로 들이박았다. 피어싱이 성대히 코피를 흩뿌리자 지켜보던 투실투실한 녀석도 끼어들어 2:1 싸움이 시작됐다.

1:1로 싸워도 이기지 못할 싸움을 2:1로 하고 있으니 안경은 당연히 주먹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흥분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저항은 계속해서 거칠게 이어나갔다.


‘이거 웃긴 녀석일세? 지 돈은 군말 없이 내줬으면서 왜 남의 돈 가지고 싸워?’


멀뚱히 싸움을 지켜보던 재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안경은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하다고 하기엔 굉장히 찌질했고, 비굴하다고 하기엔 나름 용감한 면도 있었다. 2:1로 싸움을 걸기에 싸움 좀 하는 녀석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생초짜였다.

위험할 정도로 싸움이 격해지면 말릴 생각이었지만 아직까진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피어싱과 투실투실은 쉼 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것에 비해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데 된 데에는 안경의 반사신경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 녀석, 의외로······’


잘 맞아준다고 해야 할까?

막거나 피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모든 공격이 몸에 적중되고 있었으니까.

대신에 안경은 급소 위주로 피하거나 보호해 덜 위험한 부위로 대신 맞고 있었다. 자주 맞아본 경험, 그것도 반격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경험이 아니라면 이런 재능(?)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2~3분 정도 열심히 안경을 때린 두 녀석은 발길질을 멈췄다. 숨이 차기도 했고, 분이 풀릴 만큼 충분히 때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두 녀석은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엔 만신창이가 된 안경잡이와 재영만 남았다. 재영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안경을 주워 그에게 건넸다.


“고, 고마워요.”


어수룩한 외모와 자신감이 결여된 태도. 어째서 그렇게 재주 좋게 잘 맞을 수 있는지 뻔히 보였다. 힘자랑하고 싶어 하는 녀석들에게 노려지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평소에 자주 괴롭힘 당하고 있었으리라.

안경이 재영에게 물었다.


“저기, 괘, 괜찮아요?”


누가 보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재영이 쌍코피를 흘리는 안경을 걱정하는 게 옳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안경은 엉망이 된 몰골로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재영은 이 상황이 우스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착한 건지 꼴에 남자라고 객기를 부리는 건지 모르지만, 불량배 녀석들 때문에 나빠졌던 기분이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한결 누그러졌다.


재영은 주머니에서 포켓티슈를 꺼내 안경에게 건네줬다.

기대치 않은 친절에 감동했는지 안경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코피나 닦아라, 바보야.”


다물고 있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자 안경은 놀란 토끼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험한 말을 접하는 게 익숙하기 때문인지 그에 대해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걱정해주는 말이었기에 기분 나빠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싸움도 더럽게 못하는 놈이 싸움은 왜 건 거야? 그러다가 재수 없게 잘못 맞으면 골로 가는 거 몰라?”

“그, 그렇지만 그렇게 큰돈을······”

“내 돈인데 왜 네가 신경 써?”

“그, 그렇지만······”

“자꾸 그렇지만, 그렇지만. 도대체 뭐가 그렇지만인데?”

“그, 그게······.”


재영은 말이 끝나길 기다렸으나 안경은 계속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됐다. 너한테 대답을 들어서 뭐하겠냐. 저쪽 손이나 내밀어봐.”


재영이 시키는 대로 안경은 오른손을 냉큼 내밀었다.

안경은 중지가 탈골되어 있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본인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놔두면 강한 통증이 오고 환부에 염증이 생길 수도 있었다. 다행히 뼈나 근육이 상하지는 않았고, 뼈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뿐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탈골된 거 맞출 거니까 아파도 참아.”


우드득 소리가 나면서 번개를 맞은 것처럼 안경이 몸을 떨었다. 미리 주의를 받아서 어금니를 악문 덕분에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재영은 안경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혈도를 건드려 상처부위가 빨리 낫도록 조치를 취했다. 붓기나 멍 정도의 가벼운 타박상은 며칠 안으로 완치될 것이다.


“뼈 부러진 데나 크게 찢어진 곳은 없으니까 병원 갈 필요도 없겠네. 그럼 난 간다. 날 도와주려고 한 건 고마웠다. 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킥, 웃음을 흘리며 재영이 떠나려는데 안경이 허겁지겁 달려와 재영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왜? 아직 볼일이 남았어?”

“저, 저기, 그게······.”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거리는 모습이 답답했다.

안경은 계속 눈치를 보다가 재영이 짜증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조, 좋아해요! 첫눈에 반했어요!”


재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안경은 자신의 목소리가 작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조, 좋아해요!”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빨았나?’


만나는 족족 이상한 놈들뿐이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고전적인 방법으로 삥을 뜯질 않나, 초면에 대뜸 고백을 하질 않나. 00년대 청춘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들을 몰아서 겪고 나니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보이나?’


사이비종교의 길거리전도를 연이어 당한 기분이었다.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 혹시 자신의 외관이나 분위기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이런 것들이 꼬이는 건가 의문마저 들었다.


재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타인의 호감을 받는 것이 기분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껄렁껄렁한 녀석들에게 시비를 걸리거나 말도 안 통하는 괴물의 적개심을 받는 것보다야 당연히 더 나았으니까.

물론 나쁘지 않다는 것뿐이지 좋을 것도 없었다. 겉은 여자면서 속은 남자인 어중간한 성 정체성 탓에 재영은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성적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상 무성애자나 다름없기에 우정이나 친밀감 이상의 호감은 거북할 뿐이었다.


하지만 평생 또래들로부터 경계와 두려움의 눈빛만 받던 재영이었다. 그러다가 호감 섞인 시선을 받으니 색다른 기분도 들었다. 흥미가 동한 것이다.


“왜 날 좋아하는 거야? 날 언제 봤다고.”


“그······ 아까 상황에서 침착하던 모습이 멋있었고······ 외모도 제 취향이고······”


자신의 약함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때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을 만큼 강해보이는 이성에게 끌리곤 한다. 그게 남자라면 재영처럼 보이시하고 체격이 큰 상대에게 끌리는 것이다.


‘뭐, 상관없으려나?’


불러오기를 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된다. 다음 회차 때 이 일에 엮이지 않도록 하면 될 일이다. 오랜만의 휴식인데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긴 귀찮았다.

그리고 재영은 이런 사소한 일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길이라는 것이었다.

슬슬 혼자 노는 것도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재영은 안경에게 물었다.


“야, 저녁은 먹었냐?”


작가의말

막간 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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