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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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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최근연재일 :
2019.07.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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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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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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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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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SNL - 34

DUMMY

전 회차에는 김윤아가 거주하는 두메산골까지 도보로 갔지만, 이번에는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달리는 내내 골프가방이 덜렁거려서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김윤아네 샤워시설이 너무 열악해 가급적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대기시간 때문에 더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길을 헤매지 않은 덕분에 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최종적으로 비슷했다.


“실례합니다.”


재영의 목소리에 안마당에서 모종을 심던 김윤아가 나왔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시죠?”


김윤아의 반응은 전 회차와 똑같았다. 수상하다는 눈으로 재영을 살피며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말씀 좀 여쭐려구요. 버스를 잘못 내렸는데 그게 막차였나 봐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이 근처에 숙박업소는 없나요?”

“여긴 시골이고 관광지도 아니라서 그런 건 없어요. 읍내로 나가면 여인숙 같은 게 있긴 할 텐데······.”

“읍내까지는 걸어서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큰길 따라가면 한 세 시간······? 마을 사람들만 아는 길로 가면 그보다 짧게 걸리긴 할 텐데 이 시간에 길을 잃었다간 큰일 나니까 추천은 못 드려요.”

“이런, 이걸 어쩐다······.”


재영이 난처한 척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박덕자가 걸어왔다.


“윤아야, 무슨 일이다냐? 이 학생은 뉘고?”

“버스를 잘못 내렸는데 차가 끊겨서 나갈 수가 없대요.”


박덕자는 김윤아의 설명을 듣고 재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학생, 젊어 보이는데 나이가 어찌 되는가?”

“열일곱 살이에요.”

“하이고, 나이도 어린디 여까지 혼자 어찌 왔다냐. 저녁은 묵었고?”

“아뇨, 아직······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은 게 마지막이네요.”

“그럼 어두울 때 가덜말고, 저녁 한 끼 잡숫고 낼 해 뜨면 가시게.”

“아, 그래도 될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참이었는데······.”


박덕자가 재영을 받아들이자 김윤아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사정도 딱헌디 너무 거시기하게 그러들 말드라고.”


김윤아는 박덕자의 말을 거스르진 않았지만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김윤아에게 식충이 취급받기 전에 재영은 선수를 쳤다.


“갑작스럽게 신세를 지게 돼서 죄송해요.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괜찮아요. 손님한테 일을 시키면 할머니가 경을 치실 거예요.”


“그래도 공짜로 숙박할 수는 없죠. 이래봬도 농사일도 좀 해봤고 뭔가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것도 자신 있습니다. 아까 보니까 외양간 지붕이 무너질 것처럼 보이던데, 제가 한 번 봐드릴까요?”

“어, 그럴 수 있어요? 그래주면 고맙긴 한데······.”

“걱정 마세요. 실력 있는 분한테 직접 배워서 어지간한 건 다 할 줄 알아요. 연장이랑 자재만 부탁드릴게요.”

“알겠어요. 그러면 한 번 맡겨볼게요.”


이미 한 번 해봤던 작업이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작업의 완성도를 전 회차와 비슷하게 하면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낼 수 있지만, 전보다 정성을 들이느라 더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균열이 열리고 괴물들이 공격하면 어차피 금방 무너질 걸 알면서도 이렇게 공을 쏟은 이유는 산왕에 맞서 싸운 소의 기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강한 투지를 보였고, 그 덕분에 김윤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불러오기를 한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 일은 재영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저기요, 식사하세······ 어머나, 이걸 두 시간 만에 다 한 거예요?”


재영을 부르러 온 김윤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부탁한 건 수리였는데 재영이 한 것은 개조에 가까웠다. 전 회차에서 눈에 거슬렸는데 손대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을 죄다 건드리자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그나마도 적당한 선에서 스스로 타협했기에 이 정도지, 그러지 않았다면 몇 시간 정도로 끝낼 수 없는 작업이 됐을 터였다.


“거의 다 됐으니까 금방 마무리만 하고 갈게요.”

“어, 어······ 그러세요.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결과물에 김윤아는 놀란 만큼 굉장히 기뻐하기도 했다.

업자를 불러서 손대려면 돈이 꽤나 들 텐데 그걸 무료로 해준 셈이니 그 값어치는 하루 숙식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재영과 거리를 유지하던 김윤아가 도와줄 게 없냐고 먼저 물어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목공일 해본 적 있어요?”

“아뇨.”

“그럼 그냥 계세요. 잘못하면 다쳐요.”


재영은 전 회차에서 김윤아에게 들었던 말을 살짝 바꿔서 되돌려주었다.

하던 일을 모두 끝마치고 마땅히 할 게 없던 김윤아는 멀뚱히 재영의 작업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뒤에는 손이 민망했는지 구유에 여물을 넉넉히 넣어주고 애완동물용 빗으로 소의 등을 쓸어주면서 시간을 때웠다.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건만 재영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갈 작정인 듯 했다.

작업을 마치고 지붕에서 내려온 재영은 즐거운 얼굴로 빗질을 하고 있는 김윤아에게 말했다.


“소중하게 키우나 봐요.”

“으앗, 깜짝이야!”


재영이 가까이 온 줄 모르고 있던 김윤아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명색이 정화자면 감각도 일반인보다 뛰어날 텐데 등 뒤로 바짝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약간 나사가 빠져 있거나, 빗질에 그만큼 열중했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재영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그렇게 소리도 없이 움직였대요? 말하기 전까지 등 뒤에 온 줄도 몰랐어요.”

“그냥 평범하게 걸어온 것뿐인데······.”

“그, 그랬나요? 그보다 뭐라고 하셨죠?”

“소를 소중하게 키우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요? 낯선 사람한테도 그렇게 보일 줄은 몰랐네요. 하긴,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죠. 평생을 저와 함께 자랐으니까.”


소를 향하는 김윤아의 시선이 따스했다. 단순히 소중한 애완동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완동물 이상의 깊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저도 만져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재영은 김윤아의 옆으로 가서 천천히 소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물에만 집중하던 소가 갑자기 여물을 꿀떡 삼키더니 고개를 돌려 재영의 얼굴을 핥으려했다. 반사적으로 피하긴 했으나 소의 혀가 생각보다 긴 탓에 재영의 머리에 소의 침이 묻었다. 손수건으로 끈끈해진 옆머리를 닦으려니 이번엔 재영의 상의를 핥았다. 그 때문에 바람막이에 선명한 침 자국이 생겼다.


“어머, 안 이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괜찮아요?”


졸지에 봉변을 당했지만 친밀감 표시처럼 느껴졌기에 찝찝할지언정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괜찮아요. 동물들한테 사랑받는 편이 아니었는데, 얘는 어쩐 일인지 제가 마음에 드나보네요.”

“이를 어째? 옷이랑 머리가 엉망이네. 밥 먹고 샤워하셔야겠네요. 시설은 별로 안 좋지만 그냥 자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옷도 세탁해드릴게요. 이따가 저한테 주세요.”

“감사합니다. 또 신세를 지네요.”

“신세는 뭘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재영은 식사를 한 뒤 김윤아의 배려로 샤워를 하게 됐다. 샤워를 하기 싫어서 고속버스까지 탔지만 소가 핥는 바람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재영은 구시렁거리며 물을 끼얹었다. 그러던 중 욕실 밖에서 얼쩡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윤아였다.


“따뜻한 물은 잘 나오죠? 수건은 거울 달린 찬장 안에 있고, 드라이기는 밖에 가져다놓을 테니까 나와서 말리시면 돼요. 갈아입을 옷은 있나요?”

“네,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외양간 수리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김윤아의 친절도가 껑충 뛰어올랐다. 전 회차에서는 이러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전 회차 막판에 자신에게 쏟아진 김윤아의 원망을 재영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샤워 후에는 기능성 언더셔츠와 헐렁한 조깅팬츠로 갈아입었다. 전 회차에서는 여기에 바람막이까지 걸쳤으나 지금은 침 범벅이 된 까닭에 세탁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덕분에 피부에 밀착되는 언더셔츠만 입어서 상반신의 체형이 드러났다.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기를 가져다주자 김윤아는 재영의 봉긋한 가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 여자였어요?”

“······예?”

“아, 아니에요. 말을 잘못했네요. 미안해요.”


뒤늦게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재영의 귀에 들어온 후였다.


“남자인 줄 알았어요?”

“그게······ 혼자 여행하고, 키도 크고, 지붕 올라가서 뚝딱뚝딱 수리도 잘하고, 그래서······.”


남자로 오해받은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나름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여자라서 좋은 점이라고 해야 할까. 김윤아의 경계심이 대폭 옅어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내키지 않지만 사정이 딱해서 도와준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무심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여성스럽게 하고 다닐 걸 그랬나’라고 생각했다가 괜히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왜 남자라고 생각한 거야? 목소리를 변조한 것도 아닌데. 키 큰 여자보다 목소리 가는 남자가 더 있음직하다는 걸까? 혹시 전 회차에서도 나를 줄곧 남자로 알았던 거 아냐?’


재영은 끝내 자신의 문제가 말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평소에 윤슬이 아저씨 말투라고 그토록 놀렸음에도 그저 농담이겠거니 흘려 넘긴 탓이었다.




초저녁이 지나자 연로한 박덕자는 일찍부터 옆방으로 가서 잠들었고, 재영은 김윤아와 단둘이 비좁은 거실에 남게 되었다. TV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지만 재영의 귀에는 드라마의 내용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드라마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전 회차에 이어 두 번째 보는 거라 더더욱 따분했다. 그때 김윤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난 김윤아에요. 같이 밥도 먹은 사이인데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신재영이라고 해요.”

“아까 열일곱 살이라고 했죠? 난 스물두 살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저도 언니라고 부를게요.”


경계심이 완화돼서 그런지 김윤아의 말투가 전보다 훨씬 사근사근했다.

젊은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깡촌이라 낯선 이를 경계했고, 경계가 풀린 다음에는 그동안 외로웠던 탓에 반가운 감정만 남은 것이다. 김윤아는 무엇보다 언니라는 호칭에 굉장히 기뻐했다.


“어렸을 때부터 예쁜 여동생 한 명 있었으면 했거든. 대학을 농대 나와서 여자후배도 적은데 걔들이랑은 별로 친했어. 그러다가 이렇게 갑자기 언니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

“흠흠, 그러니까 예쁜 여동생을 남자로 착각했다는 거죠?”


농담조로 타박하자 김윤아는 겸연쩍게 웃었다.


“미안, 미안. 안 그래도 남자치곤 선도 가늘고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이런 시골엔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계실 거라 생각해서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혼자서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하긴 하지······. 있는 거라곤 TV랑 핸드폰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낮에는 밭일 하는 게 생각보다 재밌어서 괜찮아. 그것 때문에 농대를 들어간 거기도 하고.”

“말투가 서울에서 꽤 사셨던 것 같은데 왜 다시 내려온 거예요? 오히려 다들 시골을 떠나던데. 위험하다고.”


군경인력은 자연히 인구가 몰린 대도시지역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다보니 후미진 지역은 균열이 열려도 군사적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인들 대부분은 부모의 안전을 걱정한 자식들에게 모셔져 도시로 떠났고, 그렇게 텅텅 빈 마을에 남은 노인들은 자식이 없거나 있어도 연을 끊고 사는 이들이었다.

재영이 낮에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을 때에도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김윤아의 집을 포함해 세 곳뿐이었다.


“위험하니까 내려온 거야. 할머니를 지켜드리려고.”

“어떻게요? 균열에서 나오는 괴물들은 총 든 군인들도 상대하기 힘들다던데.”

“그건 어떻게든 될 거 같긴 한데······. 사실 할머니만 모시는 거면 아득바득 시내로 나가서 살 수 있긴 해.”

“그러면 그렇게 하지 그랬어요?”

“이곳에 추억이 많아서 그래. 할머니도, 나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해.”

“어떤 추억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별 거 아니라서 외부인이 들으면 재미없을 지도 몰라.”

“괜찮아요.”


김윤아는 과거를 회상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뜬 그녀의 눈은 아련한 옛 기억에 잠겨있었다.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봤어?”

“오동나무요?”

“수종(樹種)도 아는 구나?”


재영은 빙긋 웃었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50년 정도 살다보니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 오동나무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두 분이서 심은 거야.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잠들 곳을 마련해놓자며 두 그루를 심으셨지. 예정대로 한 그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베어서 관을 짜는데 썼어. 지금 남은 한 그루도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마 관으로 쓰일 거야.”


김윤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단순히 관으로 쓰려고 심은 거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그 자체가 되어버렸나 봐. 다른 기억은 희미해져도 오동나무에 얽힌 것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신대. 지금도 한가할 때는 오동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셔. 죽을 때 같이 갈 친구라면서 말이야. 물론 말은 그렇게 하시는데, 정작 돌아가실 때가 되면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하실 것 같아. 아무리 당신께서 돌아가신 뒤라고 해도 나무가 베이는 꼴을 어떻게 두고 보겠어. 이미 나무가 추억이 돼버린 걸.”


사별한 이에 대한 정이 깊어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 미디어를 통해서 종종 접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딱딱한 화면 너머가 아니라 직접 전해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 나무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러면 언니는 이곳에 어떤 추억을 가지고 계세요?”

“나는 뭐, 이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랑 산 기억도 있고······ 하지만 역시 현숙이 때문이 아닐까 싶네.”

“현숙이요?”


재영의 물음에 김윤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아까 너도 만났잖니. 외양간에서.”

“혹시 그 소요?”

“킥, 맞아. 남들한텐 그냥 가축이겠지만 내게는 오랜 친구야. 그거뿐이겠어? 현숙이가 지금까지 우릴 위해 해준 일이 엄청 많아. 기계도 못 들어오는 동네에서 현숙이마저 없었으면 할머니랑 난 농사일하다가 골병들었을 거야. 그런 현숙이를 그냥 놓고 갈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현숙이를 데리고 어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젠 내가 돌봐줄 차례지.”

“팔고 떠나지 않은 거 보면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그리고 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팔려고 해도 아마 안 팔렸을 거야. 육용으로 키운 것도 아니고 게다가 너무 늙었거든. 현숙이는 지금 18살이니까.”


조모와 손녀, 둘 다 옛정 때문에 이 궁벽한 산골을 벗어나지 못했다. 누가 보면 답답하고 미련하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영만큼은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그녀들의 결심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재영이는 왜 여행을 시작한 거야? 여자 혼자 여행하면 무섭지 않아?”

“사람들이 여자인 줄 잘 모르더라고요.”


재영과 김윤아가 동시에 키득거렸다. 잠시 뒤 웃음을 멈춘 재영이 김윤아의 눈을 직시했다.


“여행을 시작한 건······ 도움이 필요해서예요. 제가 지금 어떤 난관에 부딪혔거든요. 혼자 하는 것보단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절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복잡한 일에 휘말렸나 보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

“죄송해요.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기엔 좀 사적인 일이라서······.”

“아니야, 괜찮아. 세상엔 말 못할 일도 있는 거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밤 10시가 되자 김윤아는 연신 하품을 했다. 산중생활에 익숙해져 생활패턴이 남들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탓이었다. 졸음을 참기 힘든지 김윤아는 방에 들어가서 요를 폈다.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졸리네. 먼저 잘게. TV 보고 싶으면 계속 봐도 돼. 대신에 소리는 조금 줄여줘. 잘 때는 저쪽 방에서 자면 돼. 이불은 내가 미리 깔아놨어. 그럼 내일 보자.”


김윤아가 불을 끄자 재영도 TV를 껐다. 유일한 광원이 사라지면서 삽시간에 집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산골짜기의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재영의 눈동자뿐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어.’


외양간을 고쳐주고 여자인 게 밝혀지면서 김윤아와의 관계가 전보다 크게 개선됐다. 그 덕분에 박덕자와 김윤아의 개인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이 작은 변화들이 미래의 흐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이길 기원하며 재영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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