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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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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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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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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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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SNL - 30

DUMMY

재영이 알고 있는 김윤아에 관한 정보는 이름을 제외하면 출생년도와 다니던 대학이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해당 대학에 가서 수소문을 했는데, 위상충돌 후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간 뒤였다. 학과사무실 직원에게 최면을 걸어 주소지를 알아보니 김윤아의 고향은 어느 궁벽한 두메산골이었다.


재영은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김윤아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짧으면 1박2일에서 최장 4박5일까지 계획한 외출이었다. 학교결석과 외박을 설명할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다보니 보육원 식구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최면을 걸어야 했다.

다만, 최면이 만능은 아니라서 위화감을 느끼고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기에 가급적 빠르게 돌아올 계획이었다.


목적지는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쉬지 않고 달리면 4시간 정도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5시간 쯤 걸려 도착할 수 있지만 재영은 뛰어가는 선택을 했다. 위상충돌 때문에 교외로 가는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배차간격이 늘어나고 불의의 상황이 발생하면 도중에 버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재영은 얼마못가 후회를 했는데, 등에 멘 골프가방이 덜렁거려 달릴 때 거슬렸기 때문이다.




“할머니, 이곳이 면산면 송안리 맞나요?”


평상에 앉아있던 노파는 재영의 질문을 듣고 한참 뒤에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 재영은 걸음을 옮기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핸드폰과 GPS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긴 하지만 통화권이탈 지역이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재영은 오랜만에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독도법을 사용해야했다. 도로를 따라왔다면 덜 헷갈렸겠지만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뛰어왔기에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와아, 진짜 시골이네.”


시골 아니랄까봐 가구 수에 비해 마을 면적이 지나치게 넓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한 뒤로도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디보자······ 162번지, 162번지······ 아, 저기구나.”


산 바로 아래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석면 플레이트를 지붕으로 얹은 낡은 시골집이었다. 나름 현대식으로 개조하긴 했는데 그 현대식이라는 게 최소 삼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그 밖의 특징은 집 앞에 장승처럼 서있는 커다란 오동나무 정도였다.

낮은 담장만 있고 문이 없어서 안마당이 훤히 보였는데, 마당 한쪽의 텃밭에 젊은 여성이 쭈그려 앉아 상추 모종을 심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 그녀가 김윤아였다.


“저기, 실례합니다.”


상추 심기에 열중이던 김윤아는 낯선 이의 방문에 놀란 얼굴이었다. 택배기사를 제외하면 젊은 사람이 이런 깡촌을 방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김윤아의 시선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무슨 일이세요?”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었는데 혹시 말 좀 물을 수 있을까요?”

“여행을요? 이런 시기에?”


사방에서 괴물이 튀어나오고 총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 모두들 예민해져 있는 시기였다. 이런 때에 한가롭게 여행이라니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런 시기니까 하는 거죠. 더 지나면 영영 못할지도 모르잖아요?”


재영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김윤아가 재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커다란 골프가방은 왠지 용도에 어울리는 쓰임새는 아닌 것 같지만 단순히 짐가방으로 쓰는 게 딱히 이상해보이진 않았다. 그 외에도 청바지에 티셔츠, 등산용 바람막이까지, 여행객이 입을 만한 간편한 복장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먼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도보여행 중인데 길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더라구요. 제가 좀 길치라서요. 안 그래도 도보여행은 포기하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여쭤보려고 했어요.”

“흐음, 그래요? 버스정류장은 여기서 작은 길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나와요. 가다보면 작은 개울이랑 다리가 나올 텐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버스정류장이에요. 아, 그런데 오늘 버스는 다 끊겼을 텐데······.”

“벌써요? 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잖아요.”

“여긴 그래요. 나가는 차는 일찍 끊기죠. 게다가 그 사건 때문에 배차도 더 줄어버렸어요.”


김윤아는 떠올리기도 싫은지 위상충돌을 그 사건이라고 뭉뚱그려 지칭했다.


“걸어서는 읍내까지 얼마나 걸리죠?”

“글쎄요······. 걸어 가본 적은 없지만 빨리 걸으면 세 시간 안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세 시간이면······ 해가 떨어진 다음일 텐데······.”


재영은 큰 곤란에 빠진 것처럼 중얼거렸다.


“요즘은 7시만 좀 넘으면 깜깜해지니까요.”

“저기, 혹시 가능하다면 하룻밤만 이곳에서 묵고 가도 될까요?”

“네? 어······ 그건 좀······”


갑작스런 부탁에 김윤아는 당황했다. 사정이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낯선 이를 집 안에 들여놓기는 영 껄끄러웠다.

그때 멀리서 한 노파가 걸어왔다. 허리가 많이 구부러지긴 했지만 아직 밭일을 할 정도로 정정한가본지 양손에 호미와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윤아야, 뭔 일이다냐? 그 젊은이는 뉘고?”

“아, 할머니. 이분이 여행 중에 길을 잃었는데 버스도 끊기고 해서 우리 집에 묵고 갈 수 있냐고 물었어요.”


김윤아의 조모가 찬찬히 재영을 살폈다.


“학생, 젊어 보이는데 나이가 어찌 되는가?”

“열일곱 살이요.”

“하이고, 어린 학생이 밤길 위험해서 어찌 갈랑가. 그러지 말고 밥 한 끼 묵고 내일 가드라고.”


김윤아는 영 내키지 않아했지만 조모의 말을 거스르진 않았다. 뜻밖의 구원군 덕분에 재영은 생각보다 쉽게 김윤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재영은 버스 시간표를 미리 알고 있었다. 애초에 버스가 끊긴 것을 핑계 삼아 김윤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김윤아의 조모, 박덕자는 부엌에서 저녁식사준비를 했고 김윤아는 하다가 중단됐던 밭일을 재개했다.

다들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재영 혼자만 붕 떠있었다. 접근한 목적이 어떠하든 간에, 신세지는 마당에 멍청히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재영은 한창 호미질 중인 김윤아에게 다가갔다.


“일 도와드릴까요?”

“농사일 해본 적 있어요?”

“아뇨.”

“그럼 그냥 계세요.”

“그래도 나름 힘도 좀 쓰고, 아, 그리고 목공도 할 줄 알아요.”

“목공이요? 으음, 그러면 혹시 이런 것도 고칠 수 있으려나······?”


김윤아가 재영을 데려간 곳은 외양간이었다. 늙은 암소 한 마리만 덩그러니 있는 외양간이었는데 지붕 한쪽이 무너져 하늘이 훤히 내다보였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장마철이 되면 소가 비를 맞게 되고, 재수 없으면 지붕 전체가 붕괴될 위험도 있었다.

건축물에 손을 대는 건 처음이라 자신 없었지만 재영에겐 박동수가 있었다. 박동수를 호출해 가능여부를 물어보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식은 죽 먹기라고.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다. 그럼 부탁할게요.”


작업공간이 지붕이라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심미적 요소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기에 가구를 만드는 것보다 쉬웠다. 썩은 나무를 거둬내고 새 나무판을 얹은 다음, 못질을 하고 물이 새지 않게 실리콘을 바르면 끝이었다.

작업을 막 끝마쳤을 때 김윤아가 다가왔다.


“식사하고 하세요.”

“거의 다 끝났어요. 정리만 하고 바로 갈게요.”

“벌써 다 했어요?”

“한 번 보실래요?”


김윤아는 수리된 곳을 살피며 연신 호오, 호오 감탄을 터뜨렸다. 수돗가에 연결된 호스로 물을 뿌려 마감이 잘 됐는지 확인까지 하고 나자 여태 무뚝뚝하기만 했던 김윤아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작업 내내 조용하던 암소도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김윤아가 암소의 콧잔등을 슥슥 어루만지며 말했다.


“비 맞을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치?”


음머어어─




저녁을 먹고 나자 김윤아가 말을 걸어왔다.


“샤워하고 싶으면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시골이라 욕탕 설비가 좋지는 않지만 그냥 자면 찝찝하잖아요. 낮에 보니 땀투성이에다가 지붕수리 하느라 먼지도 뒤집어썼을 텐데.”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씻고 싶던 참이었어요.”


아무리 초인적인 내공을 가졌고 페이스를 조절했다고 해도 네 시간이나 산과 들을 내달리면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재영은 땀범벅이었다. 시간이 흘러 땀은 식었지만 간단한 세면과 옷만 갈아입고 자기엔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샤워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던 차에, 김윤아가 먼저 신경을 써준 것이다. 재영의 숙박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애초에 성격이 모질지 못한 김윤아였다.


재영은 머지않아 설비가 좋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곰팡이 핀 오래된 마감재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벽 모서리의 갈라진 부분에서는 가끔 이름 모를 벌레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온수는 나오다가 말다가 하는 바람에 물 온도를 맞추기도 힘들었다. 재영은 미지근한 물로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내공으로 몸을 덥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재영은 씻고 나온 다음 먼지투성이였던 외출복에서 기능성 언더셔츠와 헐렁한 조깅팬츠로 갈아입었다. 5월의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서 그 위에 바람막이도 덧입었다. 온돌로 난방을 하는 까닭에 바닥은 따뜻해도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이다.


사각사각


재영은 좁은 거실에서 조손과 함께 과일을 깎아먹으며 뉴스를 시청했다. 어색한 자리라 피하고 싶었지만 박덕자가 과일을 먹으라며 불러냈기에 재영은 하는 수 없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뉴스는 가장 많은 꼭지를 균열과 정화자에 할애했다. 최근 균열에 대한 정전위 대변인의 브리핑을 요약하고, 박수찬과 기자들의 인터뷰도 보여줬다.

박수찬은 현재 정화자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엄밀히는 정화자가 아니지만 그걸 모르는 대중에게는 멀쑥하게 생긴 젊은 초능력자일 뿐이었다. 외모가 제법 준수한 탓인지 인터넷에서는 팬 카페도 생긴 모양이었다.


“저 사람들은 괴물이랑 싸우는 게 무섭지도 않나······.”


말없이 뉴스를 보던 김윤아가 문득 중얼거렸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잠시 후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했다. 곧 여든을 바라보는 박덕자는 아까 전에 이미 잠들었고, 조모와의 산중생활에 적응한 김윤아도 드라마를 보다말고 일찍 이부자리를 폈다.


“심심하면 TV를 봐도 되는데 소리는 좀 줄여주세요. 잘 때는 저쪽 방에 이불을 깔아뒀으니 거기서 주무시면 돼요.”


머지않아 김윤아의 방에서 곤히 잠든 숨소리가 들려왔다.

재영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가 잠들어있는 방을 응시했다.


‘싸우지 않았을 때 잃게 되는 것들이 더 무섭기 때문이야. 하지만 잃기 전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조차 알 수 없어.’






날이 밝기 무섭게 조손은 일을 시작했다.

김윤아는 집 앞에 있는 밭의 가장자리에 고랑을 파고 콩을 심었다. 뻘뻘 땀을 흘려가며 밭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과거의 김윤아가 어떻게 대지의 정령술을 습득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농사가 좋아서 하는 얼굴이었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적당히 성적을 맞춰서 간 것이 아니라 농업에 정말로 뜻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멀리서 김윤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영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가 은은하게 전신을 뒤덮고 있는 걸 보면 각성은 한 모양인데, 대지의 정령과의 계약은 아직인가? 땅 파는 걸 저렇게나 좋아하니 정령과의 친화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과연 이것만으로 될까?’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단순히 농사일 좋아한다고 해서 대지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지금 상태를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대지의 정령술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생의 김윤아는 1세대 정화자일뿐만 아니라 위상충돌 초기부터 대지의 정령술을 사용한 걸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계약을 위한 계기가 있었다는 건데, 혹시······? 우로보로스! 이 근처에 균열이 열렸던 정보가 있어?’


-중형 균열이 열린 기록이 있습니다. 출현 괴물은 다수의 D급 산왕입니다. 전생과의 오차조정 후 발생예정 시간은, 현 시각으로부터 약 79시간 후입니다.


속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D급에 불과한 산왕이지만 그 수가 많고 상대하는 이가 이제 막 각성한 애송이 정화자라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전생에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겼으니 죽지 않고 대지의 정령술을 획득한 것이겠지만, 공석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재영의 개입으로 인해 미래가 변할지도 몰랐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도록 관망하든가, 반대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김윤아를 어엿한 정화자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재영은 위상충돌 때 공석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전생과 같은 결과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일깨우지 못하는 사람을 이끌어줌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석이 증명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재영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김윤아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밭에서 나오다가 집 앞 오동나무 아래에 서있는 재영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갔네요? 버스 시간 이미 지났는데? 다음 버스 타려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김윤아씨.”

“네? 왜, 왜 그러시죠?”


대뜸 이름을 불리자 김윤아는 당황해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재영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저한테요? 으음······ 엿들을 사람도 없는데 그냥 여기서 하시죠? 할머니는 귀가 나빠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도 잘 못 들으세요.”

“알겠어요. 그러면 말씀드릴게요. 김윤아 씨, 저는 당신이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김윤아의 안색이 변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으로도 김윤아가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윤아는 발뺌했다.


“제, 제 능력이요? 뭐, 밭일에 자신이 있긴 해요. 어디에 농장이라도 차리려나 보죠?”

“당신이 정화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김윤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가 주위를 경계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냥 돌아가세요. 저는 이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혹시라도 다른 곳에서 얘기를 했다간······”


김윤아는 급한 대로 손에 들고 있던 호미로 위협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단순히 재영이 김윤아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살면서 타인에게 명확한 적의를 보인 적조차 없는 김윤아였기에 협박 자체가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부탁드립니다. 김윤아 씨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칩니다. 당신에겐 재능이 있어요. 당신의 재능으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정전위에 등록할 필요도 없고,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시면 돼요.”

“······꼭 저여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김윤아 외에도 많았다.

수틀리면 내일 당장 햇곡을 수십 톤 훔칠 수도 있었고,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불러오기를 하면 되었다. 박수찬과 공석일행이 토룡을 토벌할 때 개입해서 일이 커지기 전에 처리하면 손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무고한 이에게 피해를 주어야하기 때문에 꺼려졌고, 후자는 정전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하기에 내키지 않았다.


결국 최선의 길은 대지의 정령술을 습득한 김윤아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대지의 정령과 계약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계약을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하데스를 지상으로 꾀어내 무찌른 다음 서로 입만 닫으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게다가 전생에서 대지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던 전적이 있으므로, 방향만 적절히 제시해주면 이번 생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정령술을 습득할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김윤아는 갈등했다.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투쟁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성격으로 태어났고, 또한 그렇게 자랐다. 싸움이라고는 바둑을 두던 할아버지들이 멱살을 잡을 때나 이웃집 개들이 서로 물어뜯는 광경을 본 게 전부였다.

정화자가 되고 나서도 무거운 비료포대를 옮길 때나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덜 피로한 걸 제외하면 딱히 좋은 점을 찾지 못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초능력이 김윤아에겐 마음의 짐만 될 뿐이었다.


그러던 김윤아에게 낯선 이가 찾아와 도움을 구했다. 자칫하면 수백 수천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잠시만이라도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미 몇 번이나 매몰차게 거절했을 테지만 김윤아는 그렇게까지 모질지 못했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피해자가 된다 할지라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이상 모른척하기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해질녘이 돼서야 김윤아는 결정을 내렸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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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SNL - 55 19.06.28 75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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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SNL - 53 19.06.16 98 1 14쪽
53 SNL - 52 19.06.10 77 1 18쪽
52 SNL - 51 19.06.04 61 1 11쪽
51 SNL - 50 19.05.30 109 1 12쪽
50 SNL - 49 19.05.24 87 1 18쪽
49 SNL - 48 19.05.18 109 1 17쪽
48 SNL - 47 19.05.12 97 1 15쪽
47 SNL - 46 19.05.06 112 1 19쪽
46 SNL - 45 19.05.02 95 2 12쪽
45 SNL - 44 19.04.28 112 1 13쪽
44 SNL - 43 19.04.24 111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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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SNL - 41 19.03.04 147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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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SNL - 39 19.02.16 188 3 17쪽
39 SNL - 38 19.02.10 158 3 17쪽
38 SNL - 37 19.02.06 173 3 14쪽
37 SNL - 36 19.01.30 160 5 11쪽
36 SNL - 35 19.01.24 169 4 15쪽
35 SNL - 34 19.01.22 192 2 17쪽
34 SNL - 33 19.01.18 191 3 14쪽
33 SNL - 32 19.01.16 21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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