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My Sweet Lady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듯이 잊을 만하면 고개를 드는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니 10명이란 인원도 적은 게 아니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겪었던 그 일들로 인해 도덕이란 잣대가 결코 유명무실하지 않음이 증명됐다. 그 시간들 속에 안타까운 기억도 있고 미안했던 기억도 있지만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자신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을 떤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번에 얘기한 애는 아직도 만나?”
“응.”
“만나기만 하면 뭐해? 나이가 한둘이야?”
엄마 말이 맞다. 호감과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 사랑이라고 하기는 둘 사이의 벽이 아직은 두껍다. 그런데 지난번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속마음을 눈치 챘을 선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엄마의 말처럼 지금의 관계를 영원히 갖고 갈 수는 없다. 진급도 했고 살 집도 준비될 것이니 선미의 선택만 남았다.
“진정도대리님. 팀장님 찾으세요.”
회의하는 날도 아닌데 무슨 일로 찾지? 방에 들어서자 회의 탁자에서 강팀장이 문을 닫으라고 손짓을 했다. 회의 때가 아니면 늘 문을 열어 놓던 강팀장의 표정을 보니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다름이 아니라. 손정남씨 말인데요. 일 잘합니까?”
“네. 아직 좀 느리긴 하지만 지난번 대처하는 것 보니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미호대리는 어딜 갔다 온 겁니까? 그 일이 있기 전에 자주 자리를 비운 것 같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말이 없어서 말이죠.”
“알았어요. 방금 한 얘긴 우리만 아는 것으로 합시다.”
방을 나오는데 느낌이 묘하다. 그동안 강팀장은 주로 업무적인 대화만 나누었을 뿐 팀원들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손장남은 왜? 혹시 이번 시스템이 다운됐던 일 때문인가? 그날 강팀장은 미호에게 화를 많이 냈었다.
‘설마.’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지만 시스템 관리를 정남에게 맡기기엔 아직 이르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혹시 그냥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떠본 걸까? 바로 이때, 진동음을 느끼고 스마트폰을 꺼내보니 선미가 보낸 메시지가 있다.
[저녁때 지난번에 갔던 그 집에서 기다릴 게요.]
드디어 마음을 정한 건가? 저절로 시선이 가는 지원1과를 보니 선미는 냉정하리만큼 차분하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어찌 저리도 차분할 수 있을까? 문득 오래전에 TV에 나온 ‘미투’ 뉴스를 보던 엄마의 얘기가 생각난다.
“여자가 독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남자는 그것 잘못 놀리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게 뭔데?”
“몰라서 물어?”
평소엔 지원과 모두가 같이 갔던 점심식사도 선미가 과원들만 데리고 가는 바람에 우리끼리 식사를 했다. 오후 내내 시선조차 주지 않던 선미는 퇴근 시간이 되자 과원들만 남긴 채 먼저 퇴근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몸과 마음이 따로 라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 느낌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굳게 마음먹으려 해도 이내 허물어지고 만다.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섰다. 그런데 오늘 따라 버스 안에 커플들이 많다.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와 헤어졌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그러면 선미는 생각도 없는데 혼자 좋아했던 걸까? 온갖 생각들을 하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구석 자리에 창밖을 보고 있는 선미가 보인다.
“왔어요?”
“좀 늦었죠?”
“아녜요.”
그러나 선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탁자 밑으로 시선을 내리는 동작만 계속한다. 지금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데 말이다. 한참 뒤, 기다림이 한계에 이러렀을 때 드디어 선미가 입을 열었다.
“믿을게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왜 그렇게 불안해했을까? 아직 남자가 되려면 멀었나보다. 어쨌든 그녀의 마음을 얻었으니 더욱 잘해줘야겠다. 아니 존경해줘야겠다. 결혼하게 되면 피할 수 없는 퇴직을 감당하고 내린 힘든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가 끝나기 전까진 사내의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몰래 커플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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