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리모델링
어제 일 때문인지 선미는 시선을 피하는 눈치다. 좀 천천히 말할 걸 그랬나? 어쩌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일단 기다려보자고 스스로 다독이지만 합격자 발표를 앞둔 수험생처럼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이 와중에 누구도 예상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임사훈 대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아침 회의에 다녀온 강팀장이 임대리를 방으로 불러들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겠거니 했다. 무슨 얘길 하는지 한참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던 임대리가 강팀장이 건넨 서류를 들고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엔 뭔지 모를 미소가 번져있었다.
“임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모니터를 조작한 임대리가 가리키는 곳엔 ‘대리 임사훈 명 공장 생산관리과장’이란 문구가 선명한 인사발령장이 올라와 있다. 갑작스런 임대리 영전 소식에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진심어린 축하를 전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승진 발령장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지원과가 두 개로 분리됐네요.”
‘대리 진선미 업무지원1과 대리’
‘사원 은하얀 업무지원1과 사원’
‘사원 양한순 업무지원1과 사원’
‘대리 진정도 업무지원2과 대리’
‘주임 차도한 업무지원2과 주임’
‘사원 부순홍 업무지원2과 사원’
회의실에서 강팀장의 설명을 들은 업무지원과 과원들은 갑자기 갈라지게 된 상황에 먼 길 떠나는 사람들처럼 형식적인 서운함을 나타냈다. 그리고 인사발령장 맨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공장 생산관리과장의 퇴사 명령이다.
“이래서 임과장이 발령을 받은 거였네요.”
“과장 되신 것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그 덕에 서먹서먹하던 선미와의 말문도 다시 트였다. 그러나 아직 답을 한 것은 아니다. 임대리의 과장 영전과 팀 내 조직개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멀티플이어 덕에 업무는 2과가 제일 많네요.”
“그러게요.”
1과는 기존대로 총무, 자재, 영업을 맡게 됐고 2과는 인사, 네트워크, EIS, 자금, 생산을 맡게 됐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운영과 미호는 마치 외면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더구나 늘 경쟁자로 인식했던 임사훈이 과장으로 승진했으니 배가 아플 것이다.
“부순홍씨 앞으로 잘해봅시다.”
“예. 대리님.”
“그리고 차주임도 부하직원 잘 챙기고.”
“걱정 마십시오. 며칠 있다가 우리과 단합대회 한번 해야죠?”
“당연하지. 오늘 했으면 좋겠는데 임과장님 송별회가 우선이라.”
오후에 조직 개편에 따른 사무실 구조 변경을 끝냈다. 1과와 운영과는 기존에 있던 위치에 그대로 남았고 2과는 팀장실에 옆 창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때 공장으로 가는 임과장을 위한 간단한 송별식을 가졌다. 하지만 어제의 여파 때문에 팀 회식이 아닌 과 회식으로 끝냈다.
“선배님. 공장에 가시더라도 자주 연락하세요.”
“고마워.”
“정육점 개업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그러게 말이야. 항상 건강 조심해.”
그렇게 임과장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 이후 공장에서의 임과장 입지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지난번 구조조정으로 옛날에 미운털이 박혔던 전 공장장 강철성 라인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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