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빙하기
이제는 사내 최고 유명인사가 된 그의 처신 덕에 팀까지 덩달아 유명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의 뒷배인 사장 눈치를 보느라 당사자 앞에서 하지 못했던 다른 팀 간부들의 화풀이를 애꿎은 팀원들이 감당하게 된 것이다.
“지금 개재욱 뭐하냐?”
팀원들이 일 때문에 다른 팀을 방문할 때면 팀장들이 으레 꺼내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팀원들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늘 긍정적이던 선미까지 신경질을 부리게 만들었다. 그런 일들을 겪는 사이 팀원들은 퇴근 때까지 다른 팀 사무실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업무 협의는 주로 전화로 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다 우리까지 왕따 당하는 거 아녜요?”
“이미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팀원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회의 때마다 터지는 기팀장의 지랄 같은 성질이다. 자신이 지시한 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무조건 화를 내고 온갖 폭언을 쏟아내는 것이다.
“총무에서 날 우습게 보는 거잖아요. 사준다고 그냥 받아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원래는 총무팀장도 우리가 요청한대로 결재를 올렸는데 관리본부장이 바꿨답니다.”
“그 말을 믿어요? 아이고, 이런 사람들하고 일을 하니 나도 진짜 한심하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다른 팀장들을 상대한 적은 없다. 그러기엔 현재 왕따가 된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의 신경질은 팀원들이 감당해야 했고 날이 갈수록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팀은 빙하기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요즘 우리 팀 분위기 너무 싫죠?”
“그렇죠. 뭐.”
“사람은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하는데.”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실은 기팀장 있잖아요.”
가끔 비서실에 들르곤 하는 선미가 들은 얘기는 이렇다. 기재욱은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지 못했으나 뛰어난 머리로 명문대를 나와 세계적 기업에서 M&A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에겐 아픈 기억이 있었다. 기재욱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간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외아들인데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 보니 버릇없이 자란 거죠. 그런 데다 최고 명문대 출신에 사장님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사람 조과장한테 너무하더군요.”
“전 조과장님 당할 때마다 무슨 일 터질까봐 조마조마해요. 평소 말이 없어서 그렇지 조과장님 성격도 대단해요.”
팀 분위기는 더럽지만 가끔 선미와 비밀 데이트를 하면서 나름 위안을 얻는다.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팀원들끼리 모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처럼 몰래 미팅을 갖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모른 척 했더라면.’
‘미래’ 팀원들의 스킬로 태클을 걸었던 일이 지금의 모든 결과를 초래한 것 같아 팀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기팀장 같은 인간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팀원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기들끼리만 만나는 것은 아닐까?
“임대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다니요?”
“아무래도 공장으로 돌아갈까 봐요. 여긴 숨이 막혀서 못 있겠어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몇몇은 퇴직까지 고려하는 것 같다. IGS 인증서가 있으니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프리랜서 컨설턴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청육에 남아봐야 기팀장 신경질에 스트레스만 쌓일 텐데 잘만 풀리면 고수익 프리랜서로 뛸 수도 있다.
“정도씨만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녜요.”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요즘 컨설팅 업계 불황인 것 알아요? 다른 회사에 들어갈 거라면 모를까 쉽지 않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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