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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오피스 108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9.10.25 20:57
최근연재일 :
2020.06.06 00:19
연재수 :
109 회
조회수 :
38,778
추천수 :
1,022
글자수 :
254,932

작성
20.03.06 02:03
조회
277
추천
8
글자
8쪽

59. 목격자

DUMMY

가혹한 일기예보는 왜 이리 잘 맞는지, 오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날씨가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눈발이 조금씩 날리는가 싶더니 거리의 행인들에게 함박눈을 쏟아낸다. 문득 작년 크리스마스이브가 떠오른다. 나 홀로 크리스마스를 탈출했던 그날도 눈이 내렸지만 오늘처럼 춥지는 않았다.


[저 먼저 출발할 게요.]

[네.]


선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회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30분전만 해도 불지 않았던 바람이 급기야 눈보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체감 온도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래도 낭만의 야외테이트는 안 되겠다 싶어 몇 군데 돌아다녔지만 회사 근처엔 어디에도 빈자리가 없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다른 데 가야겠어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릴게요.]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서울에 있는 차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는지 도로가 주차장 수준이다. 전용차선을 달리는 버스도 쌓인 눈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류장은 눈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이러다가 저녁은커녕 버스도 못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미씨. 여기예요.”

“갑자기 날씨가 왜 이래요?”


겨우 인파를 뚫고 나타난 선미도 상당히 놀란 눈치다. 이럴 때는 위치 선정을 정확히 예측해야 버스에 탈 수 있다. 그런데 어딜 가지? 시내에서 벗어나면 자리는 있겠지만 이런 날 멀리 나가는 것은 고생길을 자처하는 것이다.


“어디로 가죠?”

“저희 집 가는 길에 괜찮은 데 있는데 거기 갈래요?”


순간, 선미를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올 때 버스에서 봤던 번화가가 생각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끝내야 하나 걱정하던 중에 단비 같은 얘기다. 일이 잘 풀리니 기다리던 버스가 우리 앞에 멈춰준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요.”


날씨 때문인지 버스 안은 옛날 콩나물 수준이다. 하지만 그 덕에 자연스럽게 선미와 간접적 스킨십을 하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일까? 그녀의 재킷 속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향기롭다. 모른 척했지만 수줍음에 고개를 숙인 선미의 양 볼은 발갛게 물들었다. 그 사이 눈발이 약해지면서 버스에 속도가 붙기 시시작한다.


“힘들었죠?”


정류장 몇 개를 지난 버스는 사람들이 빠지면서 한결 홀가분해졌다. 버스 안에 남은 사람들은 우리 같은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엔 커플도 있긴 하나 대다수가 싱글이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경험자의 직감에 의하면 나홀로마스족이 분명하다. 정류장 두 개를 더 지나 버스에서 내렸더니 눈앞에 화려한 조명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가득한 2차선 도로는 됨직한 넓은 골목이 펼쳐진다.


“여기 어때요?”

“전에 버스 타고 가면서 보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골목 안엔 양쪽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뽐내는 주점들과 치맥 간판을 단 호프집들이 어우러져 있다. 선미가 데려간 곳은 번화가 안쪽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이다. 안에 들어서자 차분한 캐럴이 흐르는 가운데 테이블 마다 커플들이 자리 잡고 있고 안쪽엔 조화로 만든 넝쿨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여기 분위기 좋은데요?”


마침 운 좋게 창가에 빈자리가 있어 전망을 만끽하며 저녁을 먹을 수 있는 행운까지 잡았다. 그런데 긴장이 풀리면서 또 다른 걱정이 앞선다. 내부를 둘러보니 제법 고급스러운 것이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종업원이 건넨 메뉴판을 보니 역시 영이 세 개짜리는 몇 개 없고 그나마 있는 것들은 샐러드 종류 뿐이다. 그래도 남자 체면에 티를 내면 안 돼지.


“선미씨. 먼저 골라요.”

“어머! 언제 이렇게 올랐지? 우리 다른 데 가요.”

“요즘 어딜 가나 똑같아요.”


잠시 고민하던 선미는 영 네 개짜리 중 비교적 낮은 것을 골랐고 같은 것 두 개를 주문 받은 종업원은 계산서를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문득 레스토랑 안쪽에 장식된 넝쿨을 바라보는데 그 뒤로 지나가는 여성이 눈에 띤다.


“선미씨. 저 여자분 혹시 우리 회사 비서실 여직원 아닌가요?”

“어디요? 어? 유가인씨네.”


자타 사내 최고인 그녀의 미모가 눈에 띠게 만든 것이다. 그동안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은 있으나 직접 대화를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녀를 보고 있던 선미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탄성이 터졌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유가인이 나온 방에서 화이트셔츠 바람의 사장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봤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다.


“사장이요?”

“네. 소문이 정말이었나 봐요.”


마침 주문한 식사를 들고 온 종업원에게 슬쩍 물어보니 룸을 사용하려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코스요리를 주문한 손님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사장 눈에 띨까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느라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마치고 그곳을 나왔다. 그런데 밖에선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도씨. 빨리 걸어요.”

“네? 왜요?”

“저기 서있는 벤츠 보여요?”

“네.”

“그거 사장님 차예요. 빨리 가요.”


선미를 따라 가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유가인이 남성 재킷을 팔에 걸고 차에 타고 있다.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문 앞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 사이 벤츠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선미는 한숨을 토하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오래전부터 회사에 유가인씨가 사장님 세컨드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정말요?”

“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소문이 아니었네요. 그런데다 유가인씨가 사는 아파트가 이 근처거든요.”


그런데 원래 유가인씨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입사동기였던 그는 훤칠한 키에 아이돌 같은 외모까지 갖춰 신입사원 시절 여직원들의 타깃이기도 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면서 화살이 인사 담당 임원에게 향했고 그 화살은 갑질이 되어 신입사원을 향했다.


“요즘 신입사원들 일은 안하고 딴 데 정신이 팔려있다던데 아십니까?”

“딴 데라니요?”

“아직 젊어서 그러나? 서로 여직원들 차지하려고 난리라고 합디다.”

“그럴 리가요.”

“아직 소식이 깜깜이시군. 나도 신입사원 몇 명이 여비서들한테 찝적대는 걸 봤는데 그런 소릴 하십니까? 앞으로 직원들 단속 좀 하세요.”


결국 사장의 한마디는 회사에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유가인이 사귀던 직원은 이유도 모른 채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스스로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누구도 유가인과 대화를 한 사람이 없었고 사장의 의중을 눈치 챈 임원들은 유가인을 상전 받들 듯 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l 다른 사람한테 해선 안 돼요. 했다간 그날로 끝나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이해가 안 돼요.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딸 같은 여자를.”


드라마에서나 봤던 갑질 얘기를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얘기를 듣는 동안 지금쯤 사장이 하고 있을 짓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 때문일까? 선미가 승진한 뒤 가슴속을 자리 잡았던 어색함이 전혀 없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온전히 지나가나 했는데 아니네요. 그렇죠?”

“정말 그러네요. 작년엔 갈 데가 없어서 눈 맞으면서 저녁 먹었는데 오늘은 저녁은 잘 먹었는데 뜻밖의 사건을 목격했네요.”


아무튼 어이가 없다. 지은 죄도 없이 후식으로 나올 커피도 마다하고 도망치듯 레스토랑을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쉬움을 달래긴 했지만 세상사 정말 모를 일이다.


“원래 그런 거예요. 만약 사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겠죠.”

“아무튼 재미있는 크리스마스가 됐네요. 참, 연말에 집에 가겠네요?”

“가야죠. 보너스도 받았는데. 정도씨 부모님 용돈 드려요?”

“그럼요.”


사실은 거짓말이다. 2년 전, 보험 영업을 하는 친구들 부탁으로 이것저것 가입하고 나니 월급의 반이 넘는 보험료가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형편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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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0. 고래싸움 20.04.13 265 7 7쪽
69 69. 여인천하 20.04.10 266 7 4쪽
68 68. 도장 찍기 20.04.08 282 7 5쪽
67 67. 갑돌이와 갑순이 20.04.08 253 6 4쪽
66 66. 은(銀)수저 20.04.08 250 7 5쪽
65 65. 긴장 속의 만남 20.04.08 240 8 4쪽
64 64. 빗나간 카더라 20.04.08 249 8 4쪽
63 63. 드러난 야심 20.03.16 273 8 5쪽
62 62. 남은 자들의 전쟁 20.03.15 278 8 4쪽
61 61. 뒤늦은 보상 20.03.11 289 8 6쪽
60 60. 존재감 20.03.09 277 8 6쪽
» 59. 목격자 20.03.06 278 8 8쪽
58 58. 낯선 느낌 20.03.04 283 9 5쪽
57 57. 양지와 음지 20.03.02 291 9 4쪽
56 56. 양들의 분노 20.02.29 292 8 8쪽
55 55. 빙하기 20.02.26 302 9 4쪽
54 54. 야누스 20.02.25 313 10 5쪽
53 53. 뉴 페이스 20.02.25 299 8 4쪽
52 52. 괘씸죄 20.02.18 324 9 4쪽
51 51. 빛바랜 영전(榮轉) +1 20.02.17 332 13 5쪽
50 50. 논공행상(論功行賞) 20.02.14 321 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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