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갑돌이와 갑순이
처음 우려와 달리 은수저 강팀장의 등장으로 하루하루가 신나는 날들이 계속됐다. 이제는 고래 싸움에 눈치 볼 일도 없고 남이 못한 일을 떠맡을 일도 없다. 그런데다 막강한 오너 집안 팀장에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사장 직속의 팀이니 청육에서 가장 힘 있는 조직이 된 것이다.
“요즘엔 정말 회사 다닐 맛납니다.”
그러나 결국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 언제부터인가 사무실 안에서 로맨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로맨스 감정의 흐름이 일방통행이라는 게 문제다.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은 신입사원 3인방이다. 입사하자마자 첫 눈에 은하얀에게 마음을 빼앗긴 손정남, 입사동기로써 손정남을 흠모하게 된 양한순, 하지만 이들에겐 마음 뿐, 아직까지 상대에게 속을 보인 적은 없는 것 같다.
“언제부터 그런 거래요?”
“모르겠어요. 저도 최근에 눈치 챘는데 정남씨는 하얀씨를, 한순씨는 정남씨를 좋아하더라고요.”
“완전 삼각관계네요.”
그날 이후 그들을 눈여겨보니 분명 선미 말대로 그들의 일방통행이 확연하게 드러냈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씩 치러지는 대청소 날이 되면 그들의 일방통행은 더욱 노골적이었는데 정남은 하얀이 맡은 팀장실 휴지통을 비웠고 한순은 정남이 사용한 걸레까지 빨아주는 것이다.
“정도씨. 하얀씨가 좋아하는 것 알아요?”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예요? 정도씨죠.”
“저를요?”
순간. 퇴근 때 치운 적이 없는 책상이 출근 때마다 말끔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이 늘 궁금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하얀이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하긴,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정의감에 불타 불의에 맞섰고 상은 커녕, 그로 인해 보복까지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튼 뜻밖이다. 하지만 하얀은 취향이 아닌 걸 어쩌겠는가.
“좋겠어요.”
“뭐가요?”
“남자들 어린 여자 좋아하잖아요.”
“선미씨. 왜 그래요?”
질투하나? 하긴, 선미가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미를 알고 지낸지 거늬 2년이고 그동안 가졌던 둘만의 시간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정식으로 사귀자고 한 적은 없다. 어쩌면 날이 갈수록 서른이 가까워오는 선미는 대시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저녁을 먹고 집 앞에서 웃는 낯으로 헤어졌지만 선미 마음이 그리 편하진 않은 것 같다.
“정도야. 너 여자 있니?”
“응.”
“만난 지 오래됐어?”
“거의 2년 다 돼가.”
“그럼 결혼할 생각도 있는 거네.”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 은퇴하신지 10년이 넘는 아버지에게 있는 거라곤 지금 사는 아파트뿐이고 수입이라곤 국민연금과 보험사에서 받는 연금이 전부인 마당에 빚을 져가면서까지 결혼할 수는 없다.
“요즘 방 2개짜리는 얼마나 하나?”
“다세대 같은 것도 4억은 줘야 해요.”
“이 집을 좀 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집 팔고 다세대로 가면 가능할 거예요. 우린 방 1개만 있어도 되잖아요.”
우연히 듣게 된 안방에서 새어나온 두 분의 대화다. 일부러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고민을 해 오셨던가 보다. 지금 사는 집은 방이 4개나 된다. 옛날엔 세 식구뿐인데 집이 이렇게 클 칠요가 있나 했다. 그런데 두 분의 대화를 듣고 보니 마치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이 평생을 바친 집인데.”
“아쉽지만 어쩌겠어? 요즘 여자 애들이 시집살이 할 것 같아? 그리고 어차피 우리 죽고 나면 정도가 물려받을 텐데. 뭐.”
만약 여자가 같이 살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일생을 바친 이 집을 팔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버지 말씀대로 요즘에 그런 여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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