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8
최근연재일 :
2022.11.29 22:00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43,405
추천수 :
1,474
글자수 :
1,693,659

작성
22.11.05 22:00
조회
90
추천
3
글자
17쪽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9

DUMMY

코르를 떠나보내고 푸른 달빛의 왕, 드워프들의 추장은 자신의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움막 아래에서 제 마지막, 최후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숱한 마지막을 겪은 그에게 이는 마지막의 마지막,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일 것이다.


후회는 없다, 후회는 이미 그때 그 순간 모두 끝마쳤으니까.

죽음에서 도망친 그에게 있어 그 생애 모든 순간들이 기나긴 유서에 지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진정한 두려움은 오지 않는 것이라 배웠으니까.

마침내 닥쳐온 두려움은 더 이상 그에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왔군.”


허공 중에 새겨진 거대한 거울 혹은 유리를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무 투명하여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것이 시선을 옮길 때마다 생겨나는 묘한 일그러짐으로 제 존재를 각인 시켰다.


─쩍!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 가운데 직선으로 금이 그어졌다.

그것은 쪼개지는 것과도 달랐고 깨지는 것과도 달랐다.


<찾.았.다...!>


공간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촉수가 흘러나왔다.

그 촉수들이 공간을 잡고 틈새를 넓혔다.

동시에 촉수를 타고 어떤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여.기. 숨.어.있.었.느.냐!!!>


마침내 공간은 촉수에 완전히 찢어발겨지고 그 사이에서 데구르르, 무언가의 눈알이 굴러왔다.

그는 이 눈과 대척점에 놓인 것을 이 멀어버린 눈으로나마 본 적이 있었다.


“본체가 강림한 것은... 아닌가.”


이 움막은 작지만 저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장소였다, 이를 이번에 확인하기까지 했으니 틀림이 없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이 안에 봉인하고자 했건만 본신으로 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하긴, 개미를 잡고자 개미굴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은 없는 법이니.”


어차피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였다.

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곳’마저 그녀의 분노에 찬 외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갔으므로.

상위차원의 존재인 이데아, 그들의 새로운 여왕된 관리자는 그 존재의 밀도부터가 달랐다.


<마.이.트.레.야...!!! 드.디.어. 널. 발.견.하.다.니, 기.쁘.기. 한.량.없.다.>


─쩌저저정!!!


그것은 가히 공포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외침이었다.

과거 강대했던 그 몸으로도 견딜 수 있노라 쉬이 장담할 수 없는 격렬한 힘의 파동.


아니, 그때조차 단순한 음성만으로 공간을 깨부수는 존재는 없었다.

오직 ‘그’를 제외하고는...


“하하... 그래, 이젠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는 것도 너 하나뿐이구나. 망각이 유일한 나의 기록자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그래, 왕께서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사랑하셨지.”


사람들은 흔히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란 없다고 이야기한다.

허나, 보아라! 망각이 모든 역사의 기록자이니, 모든 역사는 거짓됐다.


그렇다면 우린 그 거짓 없이는 미래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정말이지... 끔찍한 인연이다. 우리는 이다지도 끔찍하게 얽혀있다.’


만일 예언된 그 존재가 아니었다면 망각의 저울 반대편에 오르는 것은 분명 자신이었으리라.


푸른 달빛의 왕은 잠시 자신이 이 땅에서조차 내쫓긴다면 어디까지 흘러갈까에 대해 생각했다.

영락했음에도 현세가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견디지 못해 평생을 이 안에서 숨어살아야만 했거늘 이곳에서조차 내쫓긴다면 대체 어디로?


어쩌면 그들이 있는... 허수차원, ‘기원’이 아닌 ‘존재’가 다스리는 그 땅으로 흘러갈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문은 비록 굳게 닫혀 있었어도 이곳에서 그곳으로 넘어가는 문은 활짝 열려있었으니까.


그 안에는 그를 기다리는 이들이 무척 많으리라.

그에 비하면 눈앞에 놓인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긴 상념을 마친 그는 저의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역사를 읊었다.


“그래... 한 때 ‘미래’를 상징하는 이데아 ‘마이트레야(Maitreya)’라 불렸다. 그리고 한때는 미래의 부처 ‘미륵(彌勒)’이라 불렸지. 또 한때는 미래를 보는 대현자 ‘미미르(Mimir)’, 마지막 전생에선 왕의 조언자이자 인도자였던 ‘멀린(Merlin)’이 바로 나다.”


윤회를 초월한 존재인 부처란 자가 부처 이후로도 이토록 많은 삶을 거쳤다.


“그래, 예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과거를 추억하며 담소나 나누자는 것은 아닌 것 같구나.”


<이데아의 끝을 가져온 최악의 배반자가!! 너로 인해 모든 동족들이 죽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이마저 이젠 전부 추악한 외신이 되어 저 허수차원을 유영한다!>


공간이 완전히 연결된 탓일까, 음성이 이전처럼 뚝뚝, 끊기지 않고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이에 그는 실소했다.

참으로 우습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 같지 않은가.

똑같은 죄인에 불과하면서도...


<뭐가 우습지? 뭐가 그리 우습더냐! 네 보잘 것 없을 최후가 그리도 우습더냐?!>


죄인의 마지막이 담긴 허탈한 미소에 관리자 레테는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렇게 영락한 육신임에도 그 격만큼은 한없이 높아 저 거대한 힘의 격류를 버틸 수 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면서 그는 좀 더 짙은 웃음을 흘렸다.


“두려움은 미지에서 오는가. 아니면 알기에 비로소 두려울 수 있는가. 과거에는 모든 것을 알아서 모든 것이 두려웠건만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두렵지가 않구나.”


그 죽음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에 관리자의 흥분이 조금 잦아들었다.


<묻겠다. 어째서... 어째서!! ‘맥스웰의 악마’인 네가 외신(外神)이 되지 않았지?>


맥스웰의 악마, 저 혼돈을 따르는 자들.

외신의 하수인이나 외신 그 자체를 뜻하는 말로 관리자가 가장 증오시하는 이름이었다.


“글쎄... 어쩌면 내가 스스로 깨닫고 열반(涅槃)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권능: 맥스웰의 악마(Rank:?)가 권능: 데카르트의 악마(Rank:?)로 변이합니다.]


푸른 달빛의 왕이 마침내 스스로를 그리 정의하자 그의 상태창이 변화했다.

그녀의 권능 중 하나인 상태창에 관여하려면 최소 외신 정도의 격과 힘을 가져야만 하기에, 이렇게 보잘 것 없어진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기에 관리자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거대한 눈알을 뒤룩, 뒤룩, 굴렸다.


<말도... 안 된다. 스스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났단 말이냐?! 인정 못한다.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어...!>


이 말은 즉, 이 세계 자체가 그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것.

바로 ‘데카르트의 악마’, 스스로를 깨닫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 이로 말이다.


관리자가 잠이 들었음에도 스스로 깨달음은 얻고 윤회에서 벗어난 성인들에게나 비로소 주어지는 권능이 그를 인정했다.


“넌 여전히 아집의 결정체로구나. 현재의 내가 섬기는 신, 가온이 한때 네 모습과 같았다. 미처 태어나지도 못한 새끼를 그리워하며 숲에서 태어난 그 누구도 제 품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그는 모두에게 미움을 샀고 결국에는 자신과 균형을 이루는 자마저 진창에 밀어 넣었다.


“네가 만든 이 감옥세계에는 대체 얼마나 되는 악마를 수용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곳엔 혹여 내 자리도 있느냐?”


외신(外神), 바깥에서 지구를 호시탐탐 노리는 아우터 갓(Outer God)을 의미하는 『맥스웰의 악마(Maxwell’s Demon)』


깨달은 자, 스스로 무대에 선 자, 해탈한 자나 열반에 든 자, 그 존재가 대부분 오래된 신들이었기에 고신(古神)이라고까지 불리는 엘더 갓(Elder God), 『데카르트의 악마(Descartes’ Demon)』


오래된 자, 원종(原種)을 뜻하는 올드 원(Old Ond)과 위대한 옛 것, 그레이트 올드 원(Great Old One), 그 진화의 끝에 있는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다윈의 악마(Darwinian Demon)』


전지(全知)의 악마이자 탑과 계약하여 현자에게 그 지식을 계승시키는 지혜의 악마, 어쩌면 탑이 원하는 그 목적되는 존재인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


본래 명칭은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관리자 레테가 만든 세계는 이들을 4대 악마로 규정했다.

아니, 부르는 명칭은 늘 변해왔다.


‘오래된 ’자라는 이 명칭 또한 그들이 사는 시절 그들 스스로를 오래됐노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부르는 명칭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변해왔다.


그렇다고 이 변한 이름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리라.

이름은 비로소 누군가가 불러줘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기에.

본질은 바뀌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나는 실존은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나는... 나는!!! 내 세계를 노리는 그들에게서, 너희 맥스웰의 악마로부터 계속 이 세계를 지켜왔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관리자 레테는 정녕 혼란스러워보였다.


“넌 나를 찾지 못했다. 있는 줄도 몰랐겠지.”


관리자 레테는 ‘왕의 힘’으로 그에게 사명을 부여했다, 운명을 주었다.

가장 끔찍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운명만을...


“나는 그저 네게 눈먼 돌을 맞아죽는 개구리였다. 그렇게 내가 원망스러웠느냐... 아니, 모든 것을 잊은 네게 있어 내가 원망의 대상이 되기는 했느냐?”


그것은 정말 많은 것이 담긴 한 마디였다.

허탈함, 무력감, 분노, 원망...!


그렇기에 답을 알면서도,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는 도발하듯 재차 물어봤다.

설사 잊었더라도 상관없다. 증오란 되새겨지는 것.

그가 그녀를 기억할 수밖에 없듯, 그녀 역시도...


“답할 필요는 없노라. 내 존재를 깨닫자마자 이리 찾아온 네 그 행동이 그 원한을 증명한다.”


이에 그는 만족했다.

원망조차 않았다면 억울했을 거다.

자신은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음으로.

보답 받지 못하는 감정보다 끔찍한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미륵일 적에... 그는 석가에게 제가 빚은 세상을 빼앗겼다.

그가 미미르일 적에... 그는 머리만 남아서 샘을 지켜야 했다.

그가 멀린일 적에!! 그는 그 이름이 가지는 ‘검은 새(Merle)’의 자리를 얻지 못했으며 인도자로서 선택한 왕마저 불행한 끝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호수의 연인에게도, 겨울의 마녀에게도, 죄인으로 살다가 유폐되어 죽었다.


그리고 푸른 달빛의 왕이 된 그는... 천기누설로 대부분의 힘을 잃고서 말 그대로 벌레, 이런 깡마른 해골이 되어 살았다.


“한 때 공허를 제치고 이데아의 다음 왕으로 내정되었던 내가 이런 추하고 볼품없는 몰골로 남았다. 아직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느냐? 이데아의 왕만이 가진 사명을 부여하는 힘은 본래 나를 다음 왕으로 선택했었지... 그때의 내 힘은 그분과도 아주 닮아있었노라.”


그는 자신의 그 찬란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치장한다 한들, 그 추악한 본질은, 둘 사이의 격차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미래의 그분이 부여한 사명을 현재로 끌어와 모두를 죽인 것은 너다. 우리는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내가. 내가. 내가!!! 이데아의 마지막 왕이다.>


관리자의 분노에 세계가 다시 한 번 깨져나갔다.

모든 이데아의 힘을 가진 레테의 힘은 약화되었어도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 사명이 무엇인지도 잊은 네가 그 말을 하니 참으로 우습다. 사명을 망각하여 굴레에서 벗어난 이데아의 마지막 생존자가 바로 너 아니더냐.”


자신을 왕이라 부르는 레테를 그는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살아남은 단 하나의 백성조차 없이 홀로 존재하는 왕은 왕이 아니라 일갈했다.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존재의 목적성을 부여하는 왕의 힘, 사명은 이제 나에게 있다. 죽기 직전 왕께서 그 제위와 함께 내게 물려주신 것이란 말이다.>


그저 손가락으로 짓눌려죽일 수 있는 상대에게 이렇게 논쟁을 펼침은 그녀가 아직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어린아이에 불과함을 그 스스로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때는 모두가 어렸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기억이 적어 어렸다면 그녀는 기억을 잃어가며 끝내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테가 망각할지언정 거짓된 기억을 조작하지 않음을 알기에 푸른 달빛의 왕은 이내 모든 것을 깨닫고 광소했다.


“큭... 크하하! 그렇게 된 거였더냐? 왜 네가 왕을 자칭하는지 그동안 궁금해왔건만... 그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다만 나는 너를 기억한다. 그때 너도 그곳에 있었지. 사명이 내려지는 그 자리에...!”


<나는... 침묵했다. 네가... 혼돈을 만들었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세계가 또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젠 망각이 진실을 입에 담는가. 이번만큼 말세(末世)라는 것이 온몸으로 체감되었던 적이 없었다. 네가 잊은 진실을 말해주마. 내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이 나를 만들었다.”


마치 너처럼...

미래는 가까스로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이것까지 그녀에게 밝혀서 좋을 게 없었다, 스스로 망각한 지금에서야 더더욱.


“우리 이데아는 시간 바깥에 있는 존재, 미래라는 것은 본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지. 이데아가 있는 곳은 언제나 현재뿐. 미래는 정해지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채 탄생하지도 않은 이데아가 공허의 곁에서 나오니, 그 존재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나, 바로 미래라는 개념이었다.”


<너만 끝까지 입을 다물었으면...!>


하지만 망각은 이유를 알아도 원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듯, 제 형체가 일그러지도록 짙은 원망을 쏟아냈다.

이에 동조하듯이 푸른 달빛의 왕을 휘감은 강물로 된 촉수들에서 염소들의 머리가 솟아나 시끄럽게 울며 그를 물어뜯었다.


“크윽! 크아아아악!!!”


그 격통에 그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더는 웃을 수 없었다, 벗어날 수도 없었다.


“크흡... 그 모진 고문을 견디며 말이냐? 나는 미래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알았다. 영원의 고통을 못 이겨 결국 그들에게 태어난 목적을 주었을 것이고 이는...!”


<필연(必然)이라는 것이냐......>


레테의 분풀이가 잠시 멎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분노가 몰아치기 직전, 찰나의 정적에 불과했다.


<감히, 감히...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필연을 입에 담느냐!!!! 결국 운명에게 선택받지 못한 네놈이...?! 본녀에겐 네놈이 고통에 못 이겨 변명하는 걸로밖에 뵈지 않느니라!>


그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그였으니까.


“하아~ 하...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 이데아의 끝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왕이 아니야. 설령 동족의 유해를 긁어모아 만들어낸 윤회의 고리를 왕관 삼는다 한들, 그분의 행세를 했을 뿐이지, 그분이 되지는 못한다.”


마치 자신처럼...

그 역시도, 왕의 힘을 닮았을 뿐,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럼 나야말로 묻겠다... 너야말로 나를 원망하지 않느냐.>


끝까지 당당함을 유지하려는 그 태도가 고까웠는지 이젠 관리자 레테가 역으로 푸른 달빛의 왕에게 물었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서로가 서로의 미움의 대상이라니, 이보다 완벽한 관계가 또 있을까.

한쪽은 다른 한쪽의 세계를 부쉈고, 다른 한쪽은 한쪽의 세계를 빼앗았다.

한명은 진실을 입에 올리는 거짓이며, 한명은 필연을 말하는 우연이다.


<네가 지금 사용하는 이름이 ‘푸른 달빛의 왕’이면서도 푸른 달빛도, 왕의 자리도 모두 나의 것이다.>


레테는 그렇게 『붉음과 푸름의 연쇄』에 대해 노래했다.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끝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것은 ‘왕권(王權)’을 상징함이라.

붉은 태양은 푸른 지구를 낳았고, 푸른 지구는 붉은 달을 낳았으며, 붉은 달은 다시 푸른 달빛을 낳았다.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그렇게 왕의 자리 또한 이어져왔다.


<인도자였던 멀린은 제 왕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아는 미미르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세계를 만든 미륵불은 저가 만든 세계를 석가에게 빼앗겼으며. 아하하하!! 이데아의 다음 왕으로 내정되었던 마이트레야 네 꼴을 좀 봐라. 푸른 달빛은커녕 붉은 태양마저 미트라에게 빼앗기지 않았더냐!>


레테를 이루는 강물이 마치 수면처럼, 거울처럼 보잘 것 없어진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더듬이 뿔이 깨져 찢어진 신경다발이 그대로 보였다.

온몸에 난 이빨자국에 상처는 벌써 곪아가기 시작했으며 그 안으로 스며든 망각의 강물이 제 몸을 검게 태운다.

얼굴뼈의 한쪽이 함몰되어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이 기나긴 문답의 결과는 결국 그의 패배였다.

미래는 과거를 이야기했고 망각은 현재를 이야기했으니까.

현재를 사는 이데아로서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이빨이 몇 개 부러졌어도 단어를 조합할 혀는 멀쩡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떻게든 한 마디를 짜내었다.


“모든 것은... 순리(順理)대로 흐를 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공지 +2 22.11.29 263 0 -
공지 드디어 1부가 끝났습니다. +4 22.10.08 162 0 -
공지 이 소설을 읽어주신 분들께...(#연중 공지 아님.) +3 22.09.02 349 0 -
공지 초반부는 아포칼립스에 걸맞게 조금 우울할 수 있습니다. 22.06.17 347 0 -
공지 연재시간을 매일 오후 10시로 변경하겠습니다. 22.05.15 192 0 -
221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6 +1 22.11.29 81 2 18쪽
220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5 22.11.28 54 3 19쪽
219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4 +1 22.11.27 58 4 16쪽
218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3 22.11.26 50 5 17쪽
217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2 22.11.25 53 3 14쪽
216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1 22.11.22 58 2 21쪽
215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5 22.11.21 79 2 16쪽
214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4 22.11.20 49 3 17쪽
213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3 22.11.19 51 2 18쪽
212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2 22.11.18 61 2 16쪽
211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1 22.11.15 62 2 18쪽
210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6 +2 22.11.14 55 4 18쪽
209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5 +1 22.11.13 62 3 13쪽
208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4 22.11.12 59 2 14쪽
207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3 22.11.11 75 3 16쪽
206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2 22.11.08 67 3 19쪽
205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1 22.11.07 62 2 19쪽
204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0 22.11.06 60 3 11쪽
»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9 +1 22.11.05 91 3 17쪽
202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8 22.11.04 67 2 9쪽
201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7 +2 22.11.01 93 3 12쪽
200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6 22.10.31 80 4 13쪽
199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5 22.10.30 75 2 15쪽
198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4 22.10.29 76 4 18쪽
197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3 22.10.28 77 4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