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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라 망친 악녀가 날 너무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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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
작품등록일 :
2024.08.1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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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9.0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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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가씨는 상사상애가 하고 싶다

DUMMY

‘부드러웠지, 레오의 입술.’


영약을 섭취하고 기운을 소화하기 위해 마나연공에 들어간 레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얌전히 앉아있던 엘리제가 문득 그런 생각에 빠졌다.


여성과는 확실하게 다른 남자의 입술 감촉.


그걸 손끝으로 느끼니 갑자기 확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키스하고 싶어.’


몽글몽글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그 열망에 엘리제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정말 애가 탄다.


방금 레오의 입술을 억눌러 강제로 영약을 복용시켰던 검지로 살그머니 본인 입술을 쓸어 간접키스를 나누는 엘리제.


검지로 느낀 레오의 입술 감촉을 떠올리고 연상하며 황홀함에 잠긴다.

동시에 허무하기도 했다.


바로 코앞에 실물을 두고도 이렇게 애들 장난 같은 짓으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정말 슬펐다.


"···차라리 기정사실을 만들어버린다면?"


순간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이성을 발휘해 충동을 억누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가올 환란을 생각하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평화가 거짓말처럼 아카데미 입학을 기점으로 각종 사건·사고가 연이어 터질 것이다.


그걸 잘 이용하면 충분히 뜻을 이룰 수 있는데 잠깐의 욕망에 휘둘려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는 없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최적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려준 방식대로 엘리제는 인내했다.


언제까지 그 인내가 이어질지 좀 의문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참아냈다.


마음 같아선 지금 살짝 입술을 맞대는 수줍은 키스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그랬다간 자제할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게다가 마나연공 중에는 자칫 내상을 입을 수도 있기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식이다.


결국 정신 수양을 쌓는 성직자라도 된 기분으로 레오를 바라보며 욕망을 다스리는 엘리제.


이럴 때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최선이다.


작게 숨을 내쉬면서 엘리제는 계획해둔 앞으로의 일정을 점검했다.


‘사교도의 테러만큼 세간의 시건을 끌고 명성을 쌓기 좋은 이슈도 없겠죠.’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세상이 실은 수면 밑에서 얼마나 다양한 혼란이 끓고 있는지 증명해주는 사건이 머지않아 일어난다.


그 사건을 이용해서 엘리제는 레오의 명성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귀족 영애, 그것도 후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려면 명성은 필수다.


사교도의 준동을 막고 사람들을 구한 영웅.


이처럼 맛있는 화젯거리도 드물지.


무명의 집사가 단숨에 이름을 떨칠 기회였고 그래서 엘리제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고도 방치하고 있다.


어차피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도 없는 사건이고 딱히 자신이 피해 보는 것도 아닌데 막으려 애를 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일어날 일이라면 그냥 잘 이용해 먹겠다는 마인드였다.


같은 맥락으로 사전에 막을 수 있으면서도 방치하기로 한 크고 작은 비극이 몇몇 더 존재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양심이 아파서라도 뭐라도 해보려고 했겠지만, 엘리제는 달랐다.


괜히 건드렸다가 자신이 모르는 방향으로 사건이 튀어서 흘러가기라도 하면 손해였다.


얌전히 지켜보다 필요한 것만 쏙쏙 골라서 빼먹기로 했다.


그로 인해 누군가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 그런 건 엘리제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레오와의 장밋빛 미래다.


사랑하는 왕자님과 온 세상의 축복 속에 맺어지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비극을 방치하는 정도를 넘어 일어나도록 종용할 의향마저 있다.


착각해선 곤란하다.


엘리제는 결코 선인이 아니었고 그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억지로 선행을 베풀고 자원봉사를 할 때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적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자비로운 성녀 소리를 할 때면 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었다.


‘성녀라.’


마녀 소리를 들으며 화형당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낫긴 하지만, 참 속이 뒤틀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악녀, 괴물, 인류의 배신자 소리를 하며 오물을 던지던 것들이···.’


일어나지 않은 일로 욕하는 건 그렇지만, 정말 역겨운 이중성이라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엘리제.


최악으로 흘러가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심호흡하고 레오를 응시한다.


눈을 감은 채 마나연공에 깊이 빠진 그를 보는 엘리제의 시선에 애틋함이 서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루트’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남자.


그런 남자와 당당히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위선도 소화해낼 수 있다.


마음을 다잡으며 엘리제는 안 좋은 생각에 잠기느라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연기했다.


레오가 눈을 떴을 때 시궁창에 박힌 것 같은 기분 나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앞날을 생각하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우중충해졌던 엘리제의 얼굴 위로 다시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영업용 스마일이 아닌 오직 마음을 허락한 사람 앞에서만 보여주는 미소.


연공에서 깨어난 레오가 가장 처음 본 건 바로 그런 엘리제의 미소였다.


"아."


무심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는 레오.


"소득은 좀 있었나요?"


그런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엘리제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모두 아가씨 덕분입니다."


영약 덕에 그릇이 넓어졌다.


마나도 늘고 출력도 한층 강해졌다는 거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 하는 레오에게 엘리제는 그런 부담 가질 거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레오가 날 위해 해준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충성심이 보답받는 건 분명 기꺼운 일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해 온 것을 떠올리면 이렇게까지 보답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은 마음도 든다.


충성한 것 이상으로 돌려주는 주인에게 감사와 부담을 느끼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레오.


앞으로도 성심을 다하겠다는 태도에 엘리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담은 이걸로 끝.


본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솔렛 영애에게 줄 선물은 이 정도면 됐겠죠."


잘 포장된 수제 초콜릿 상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엘리제를 보며 레오는 의문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작 치료약은? 영약 써서 만들었다던 약은 어디 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약을 만든 건지도 의문이었고 선물 준비 다 끝난 지금까지 이솔렛의 체질을 고칠 치료약은 그림자도 구경을 못 했다.


이러니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자신이 먹은 영약이 치료제를 만들고 남은 거였을까, 하는.


그렇다고 이미 꿀꺽한 지금 시점에 그걸 추궁하듯 묻는 것도 웃긴 일이고.


이게 맞나, 하는 복잡한 심경으로 파티가 열리는 유스티치아 영지로 떠날 채비를 돕는 레오였다.


그런 레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하태평인 엘리제.


이러다 정작 이솔렛의 치료에 실패라도 하면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일을 망칠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레오는 불안감에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저, 아가씨. 유스티치아 영애가 살에 찌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고명한 사제도 체질적인 문제라고만 했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과 대처 방법을 제시하진 못했다.


그래서 몸에 문제가 있는 거면 해답은 영약이라는 듯 복용시킨 영약이 오히려 살만 더 찌게 했지. 그로 인해 크게 마음이 상한 이솔렛 유스티치아는 이후 진료도 거부한 채 틀어박히는 일이 됐다.


그런 그녀의 병명을 엘리제가 알고 있다니까 불안 해소 겸 궁금증 풀이를 위해서라도 묻게 된다.


여러 시종과 호위를 거느리고 유스티치아 영지로 향하는 버몬트 후작가의 행렬.


그 중심에 있는 마차 안에서 예전처럼 레오와 단둘──은 아니고 불청객 안나 카레니나를 포함해 파티 참석을 위해 발길을 옮기는 엘리제.


귀찮은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레오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엘리제는 친절하게 질문에 답해주었다.


다름 아닌 레오의 질문이니까 당연히 답해줘야지.


"이솔렛 영애의 문제는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어요."


‘그리고 정신은 제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죠.’


뒷말은 삼킨 채 엘리제가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몸을 백날 고치려고 해봤자 고쳐질 리가 없지 않겠어요?"


이솔렛 유스티치아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떠올리는 엘리제.


아카데미 입학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이솔렛 유스티치아는 자살을 시도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빠지지 않는 식욕, 멈출 수 없는 식탐에 견디다 못해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일 바에야 죽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귀족 가문의 자식이라면 거의 무조건 가야만 하는 게 그랑시아 아카데미였으니까.


세상을 등지고 흉한 모습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솔렛 유스티치아에게 아카데미 입학은 사형 선고 같은 일이지.


그래서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빠르게 발견되어 미수로 끝난다.


그리고 그 자살 시도가 전화위복이 되어 다이어트에 성공하는데 나중에 진료해본 결과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식욕을 향한 브레이크가 고장 났던 뇌가 정상 작동하게 됐다나.


뇌라는 게 알려진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운이 따라준 덕에 이솔렛 영애는 다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걸 알고 있는 엘리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초능력으로 그녀의 정신을 건드려 고장 난 식욕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몸만 가면 그만.


친교의 상징으로 선물 하나 정도만 챙겨 들고 가면 된다는 소리다.


영약이니 치료약이니 하는 건 전부 거짓말.


물론 겉으로는 선물 안에 약을 숨겨두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매번 실패로 돌아간 치료 탓에 약이니 진료니 하는 것에 거부감이 클 테니 이런 식으로 먹이는 수밖에요."


그럴싸한 변명거리까지 내세우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게 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유스티치아 영지로 향하는 건 파티 전에 이솔렛 영애와 접촉하기 위함입니까?"


"맞아요. 그것도 있고···."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


사교계 파티가 열릴 때면 항상 그 말을 실천으로 옮겨왔던 엘리제다.


어느 파티든 입장이 거의 끝나갈 무렵 등장해서 이미 와 있던 선객들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걸 즐기던 엘리제.


그런데 이번에는 파티가 열리기 족히 일주일 전에 유스티치아 자작령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그 이유를 새삼 확인하는 레오에게 엘리제는 그 이유가 맞다고 답하면서도 사족을 달았다.


"귀찮은 상대와 경로가 겹치면 피곤하니까요."


"예?"


아무리 눈치 빠른 레오라고 해도 이 말만 들어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설명을 해주었겠지만, 지금은 안나라는 쓸데없이 듣는 귀가 동석하고 있기에 그냥 침묵하는 엘리제.


그녀가 일주일 먼저 움직인 건 피하고자 하는 상대, 바로 삼왕자 탓이다.


지리상 왕도 카르민과 버몬트 후작령에서 유스티치아 영지로 가는 길은 겹친다.


재수 없으면 가다가 삼왕자 행렬이랑 마주쳐서 자작령까지 가는 내내 동행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부러 그걸 노리는 이들도 있었고 엘리제 역시 한때는 그랬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서 일부러 삼왕자랑 가는 길이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한 건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것도 일종의 운명이라는 걸까요?"


하늘은 역시 마녀의 편이 아닌 모양이다.


산뜻한 미소를 짓는 삼왕자를 마주 보는 엘리제의 눈이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와 달리 전혀 웃질 않았다.


작가의말

선작, 추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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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집사와 함께 춤을 +3 24.09.08 318 12 13쪽
28 아가씨의 꿍꿍이 +1 24.09.08 311 11 13쪽
27 염탐과 다이어트 +1 24.09.07 312 10 14쪽
26 이솔렛 유스티치아 +2 24.09.06 337 10 13쪽
25 짜증 스택이 쌓이는 아가씨 +3 24.09.05 329 12 13쪽
24 불편한 동행 +3 24.09.04 350 13 12쪽
23 행운의 여신이 악녀를 비웃다 +2 24.09.03 376 12 12쪽
» 아가씨는 상사상애가 하고 싶다 +1 24.09.02 411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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