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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라 망친 악녀가 날 너무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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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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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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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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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해충을 제거하다

DUMMY

안 그래도 최근 엘리제의 기분은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착한 일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 같은 짓이나 하고 다녔으니까 당연하지.


악몽의 화신이라 해도 좋을 삼왕자를 실제로 만난 후유증도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긴 했지만, 괜찮다. 결국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 지었으니까.


무엇보다 ​레오를 위해서라면 선행이든 뭐든 할 수 있다.


그에게 사랑받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그 일념으로 사람 좋은 귀족 레이디를 훌륭히 연기해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쌓이는 스트레스도 레오와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면 여름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지.


좋아하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사서 기쁜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찾아보면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엘리제는 그런 특수한 취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친절을 연기하고 노력해왔는데··· 설마 이 행동이 이런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을 낳을 줄이야.


예쁘게 봐달라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정작 다른 것들이 자신을 쉽게 본다.


좋게 대해주니까 사람이 우습기라도 한 건지 전에 하지 않던 자잘한 실수가 늘어난 건 그렇다고 치자.


취약계층 지원의 일환으로 일자리 보장을 위해 새로운 시종을 추가 고용했으니 과도기 동안 잡음이 생기는 건 이해할 수 있지.


좋아서 한 건 아니지만 결국 신참을 다수 고용한 건 엘리제의 의향이었으니까.


감내해야만 할 부분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고, 지금의 엘리제는 그 정도 도량은 보일 수 있었다.


문제는 레오 주변에 알짱거리는 버러지들이다.


"주제도 모르고."


홀로 방에서 시녀장을 기다리던 엘리제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졸지에 삼왕자와 면담을 가졌을 때 이상의 격정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엘리제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레오의 위상도 변했다.


과거 레오는 그야말로 액막이였다.


엘리제라는 재앙이 흩뿌리는 독기를 걸러주는 필터.


그런 필터를 가까이하면 괜히 자신도 독기에 오염된다고 지금까진 다들 레오를 멀리하기 바빴다. 하지만 살아있는 재앙, 악녀였던 엘리제가 착해졌다.


진상은 좀 달랐지만, 적어도 남들 보기에는 그랬다.


그럼 자연히 레오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와 생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원래 우량주였지만 엘리제라는 리스크가 너무 커서 엄두도 내지 못했었는데 이젠 다르다는 듯이 하나둘 레오에게 눈독을 들이는 적령기 시녀들이 늘어갔다.


예전이었다면 혹시 자신이 불려갈까 싶어 괜히 레오만 봐도 겁을 먹던 것들이 이젠 레오 앞에서 꼬리를 살살 친다.


······그래도 그 정도였다면 아마 엘리제는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인기 많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부심 넘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실제로 취향 한번 특이한 귀족 중에는 일부러 예인만 건드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나 여가수가 자신의 트로피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흥분된다는 이유로 첩으로 만들거나, 혹은 첩을 인기 예인으로 키우는 도락가도 있다.


그 정도 수준까진 아니라도 엘리제 역시 남들 부러움을 사는 게 얼마나 충족감을 주는 건지 알기에 레오가 인기인이 되는 건 좋았다.


하지만,


‘──다른 여자 앞에서 그런 식으로 웃다니.’


이번엔 선을 넘었다.


레오에게 두려움을 사는 게 엘리제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라면, 가장 불만인 점은 레오가 자신에게 웃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먼지 쌓인 것을 털어봐도 자기 앞에서 레오가 진심으로 마음 편히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엘리제였다.


마지못해 억지로 웃거나 영업 미소만을 지었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조금 전 레오를 찾다가 본 광경에선 레오가 시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엘리제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감히···.’


겨우 이런 일로 레오에게 화가 나진 않는다.


그가 자신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는 건 결국 다 엘리제 본인 책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대신 레오에게 웃음을 받은 그 시녀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도 얻지 못하는 걸 시녀 따위가 누렸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힐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다.

참을 생각도 없다.


오랜만에 엘리제는 직성대로 일을 처리하고자 마음먹었다.


"아가씨,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엘리제가 판결을 내린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엘리제의 지시를 따라 곱게 늙었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입실한다.


시녀장 레아.


본래 후작 부인의 전속 시녀로 후작가까지 따라온 사람이다.


엘리제의 유모이기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피가 통한 친모보다 더 어머니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시녀장은 엘리제의 표정을 본 순간 직감했다. 무슨 일로 부른 건지 몰라도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가슴으로 낳아 키웠다고 해도 좋은 엘리제였다.


그런 엘리제의 표정만 봐도 대충 무슨 생각인지, 어떤 기분인지 알 수밖에 없지.


10년을 모신 레오보다 5년을 더 알고 지낸 게 레아 시녀장이다.


엘리제의 악랄한 성격에 대한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랬던 엘리제가 최근 개심한 것처럼 달라진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잘 알고 있다.


모르는 이들은 말한다.


후작영애 엘리제 버몬트가 이제 사람 됐다고.

착해졌다고.

개과천선했다고.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라고 레아는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엘리제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엘리제는 엘리제였고 그 독사 같은 성격은 사라진 것도 변한 것도 아니다. 그저 독을 잘 품어 감추게 되었을 뿐이다.


성격이 좋지 않을 뿐이지 엘리제는 아둔한 게 아니다.


영특, 아니 영악하다고 해도 좋을 아가씨였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할 것이 생겼기에 그걸 위해 다른 모든 걸 인내하고 있을 뿐, 변하는 세간의 인식처럼 착해진 게 아니라는 걸 레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증명하는 것 같은 저 표정.


실수한 메이드의 손등을 망설임도 없이 포크로 찍어버리던 7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끼면서 시녀장 레아가 엘리제의 말을 기다린다.


"레아."


"예, 아가씨."


가슴으로 낳아 기른 엘리제였지만 신분 격차도 그렇고 사갈 같은 심성도 그렇고, 레아는 엘리제가 어려웠다.


어려울 수밖에 없지.


유모라는 이유로 감싸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레아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한 게 있나 열심히 궁리해보는 레아.


"요즘 시녀들 일 안 하나 봐?"


그런 레아에게 실소를 흘리면서 엘리제가 말을 이어 나갔다.


싸늘하게 눈빛이 죽은 시선과 시니컬한 표정.


이걸 보고 레아는 직감했다.


어떤 바보 같은 시녀가 엘리제의 심기를 거슬렀구나.


‘그렇게 당부했는데 기어이···.’


안 그래도 최근 시녀들 해이해진 기미가 보이긴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아무리 타이르고 오져도 잘 듣질 않더라. 그래도 엘리제를 직접 곁에서 보필하고 또 예전에 엘리제에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 시녀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저택에서 일하면서도 업무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엘리제의 악명만 접했지, 경험해보지 못한 시녀들은 달랐다.


사람은 아픈 교훈을 얻지 못하면 바뀌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엘리제를 쉽게 생각하는 시녀들이 있었다.


물론 쉽게 생각한다고 한들 고용주 가족을 무시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이들은 시녀장 레아가 뽑지도 않았겠지.


공손함을 잊지 않도록 교육 잘했고, 교육받은 대로 잘 해왔다.


문제는 그것과 별개로 엘리제를 대하는 태도가 틀렸다는 점이다.


평소 엘리제는 하인들이 자신을 대함에 있어 ‘공손’한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극정성, 극진해야 겨우 성에 차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급여를 두둑하게 줘도 못 하겠다고 관두려는 이들이 계속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었지.


그런데 그걸 제대로 못 하는 시종이 하나둘 레아 눈에도 보였다.


매번 그때마다 지적하긴 하는데···.


결국 터질 일이 터졌다고 생각하는 레아였지만, 그런 그녀도 정말 엘리제가 화난 이유는 모르는 것 같다.


시녀들 요즘 일 못 한다는 소리는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


진짜 엘리제의 눈에 거슬린 건 자신의 것에 꼬리 살살 치는 년들이지.


"본을 보이면 정신을 좀 차리려나."


이걸 어떻게 손 봐야 잘 봤다고 소문이 날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짜증 섞인 웃음에 레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막을 수 없다.


이런 일 안 생기게 아가씨가 잘 해줄수록 주의하라고 일렀건만 누군가 어떤 일로 엘리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그건 레아도 별수 없는 일이지.


최대한 진노를 가라앉혀 실수한 시녀가 끔찍한 골은 안 볼 수 있게 애써보는 게 지금 레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안나라고 했던가? 내 방 세탁물 관리하던 여자."


"예."


"해고해."


입에 담기도 험한 짓을 지시할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쫓아내는 걸로 일을 마무리 짓는다.


자기 발로 도망치게 다른 시녀들 동원해서 괴롭히고 일감을 감당 못할 정도로 몰아주고 실수를 연발하게 만들어 자존감을 뭉개라는 지시 정도는 내릴 줄 알았다.


보기 좋게 빗나간 그 예상에 이건 레아로서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엘리제도 예뻐서 해고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부숴버리고 싶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여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철저하게 망가뜨려 온 세상이 알게 해주고 싶다.


자신의 것을 건드린 도둑고양이는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러면 레오가 슬퍼할 테니까. 그간 고생한 게 무섭게 또 무서워할 테니까.


그건 싫다.


그러니까 적당히 저택에서 내쫓는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그게 통쾌한 기분은 좀 덜하겠지만, 멀리 봤을 때 적절한 조치라고 엘리제는 판단했다.


마침 괜찮은 이유도 존재한다.


까탈스러운 아가씨 보기에 일하는 게 성에 차지 않더라.


모처럼 좋아지던 이미지가 조금 나빠지긴 하겠지만, 원래 엘리제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착한 사람이 어쩌다 나쁜 짓 한 번 하면 대서특필되지만, 나쁜 사람이 나쁜 짓 하면 그건 그냥 당연한 거였다. 세상 이치가 그랬기에 새삼 히스테리 좀 부린다고 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하나둘 레오에게 주제도 모르고 꼬리치는 것들을 치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치 빠른 이들은 알아차리겠지.


후작가 저택이라는 좋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몸가짐을 바로 하면 되는지 말이다.


사실 이런 방법 쓰지 않고 그냥 속 시원하게 공표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나는 레오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모하니까 넘볼 생각도 하지 마라.

세상을 불사르는 한이 있어도 레오는 내가 가질 거다.


요즘 시녀들도 그렇고 혹시 누가 자신의 집사를 빼앗아 가진 않을까 하는 걱정 탓에 애가 탈 지경이다.


그런데 말할 수 없다.


레오가 후작가 영애에 어울리는 남자가 될 때까진 그럴 수 없다.


욕심만 앞세웠다 모든 게 망해버린 경험은 이미 해봤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같은 실수를 반복도 아니고 계속 반복할 정도로 엘리제는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기에 지금은 인내하기로 했다. 내 것에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거다.


"받아."


너무도 엘리제답지 않은 자비로운 처사에 놀라고 있던 레아.


날아드는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잡는다.


손바닥을 펴보니 백금화 하나가 반짝였다.


"그 시녀 퇴직금."


쫓아낼 때 쫓아내더라도 후작가답게 너그러움은 보여야 하니까.


금화는 이렇게 쓰려고 챙긴 거다.


수표 끊어주는 건 너무 예의 차린 느낌이니까.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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