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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작품등록일 :
2023.12.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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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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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한 피디 2

DUMMY

4.


나찰은 한 피디의 굳은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회장의 몸!


사실 지금껏 취했던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형편없고 불편하기만 한 몸이다.


하지만 나찰은 이 늙은 노인의 몸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건 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아우라 때문이었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가벼운 몸짓에 상대를 떨게 만들며.


사사로운 음성의 변화로도 상대를 두렵게 만드는 아우라!


그 아우라는 바로, 권력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권력이라는 것!


그걸 가진 자는, 근사하기만 했다.


약함을 상쇄하고, 늙음을 극복하는 놀라운 마법과도 같은 권력!


도사들의 부적을 손에 넣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나찰은 권력까지 쥐게 되자 점점 신이 나고 과감해졌다.


“막장으로 유명한 작가가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지? 돈 걱정은 말고 무조건 섭외부터 해봐!”


나찰은 유튜브 쇼츠로 봤던 김치 싸대기와 안구 레이저 발사와 같은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 말 나온 김에··· 이번에 인수한 회사에 걸그룹 하나 있잖아. 이름이 ‘아이러브’던가? 그 친구들 새 앨범을 아예 트로트로 내는 건 어떠냐?”


한 회장의 사무실에서 그간의 사업계획서들을 전부 꺼내 훑어본 나찰.


과거 인간의 글은 배워뒀기에 읽을 줄은 알았지만, 경영이란 건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낯선 용어와 거미줄 같은 그래프, 나라마다 다르게 사용하는 화폐단위.


게다가 복잡한 의사결정과정까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게 사는 인간들이라 빈정대곤 했는데···.


머리 아픈 문서들을 보니 이것들 진짜 꼴값들 떨고 있네 하는 생각에 더 적극적으로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권력에 기대에 마음껏 휘두르는 분탕질이라!


거기에 놀아나는 인간들을 상상해보니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조만간 나타날 일성도 이에 아주 만족할 듯싶었다.


후훗!


그래, 지난 번 아쉽게 운천에 붙잡히기 전보다 더 확실하고 화끈하게 깽판을 치는 거야!


나찰은 어쩔 줄을 몰라하는 한 피디의 모습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정신을 잃었다가 깬 것처럼 한 피디가 부스스한 얼굴을 들었다.


“저··· 아무리 그래도 막장 드라마라니요? 그리고 아이돌이 트로트는 좀···.”


그의 기생오라비 같은 말끔한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하지만 나찰은 조금도 물러서거나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쫙 폈다.


“쯧쯧··· 요즘 인터넷을 보라고! 시선을 단박에 끄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세상을 뒤엎는데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저··· 팬들과 기자들은 물론이고, 투자자들도 당황할 겁니다.”

“그게 뭐 그리 놀라고 당황할 일인가? 세상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소속사마다 전략과 컨셉이란 게 있고, 가수나 배우마다 이미지와 스타일이란 게 있는데···.”

“허허! 그놈의 컨셉··· 그놈의 스타일···.”


한 회장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 게, 투자자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건 투자할만한가입니다. 아무리 새로워도 브랜드 가치 유지에 있어서 의심이 든다면 언제라도 돈을 빼는 게 그들 아닙니까? 잘 아시면서요.”


조언을 하는 듯하면서도 은근 훈계하고 가르치는 투의 말이 거슬렸던 걸까.


나찰은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못 한다.


“거··· 하라면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갑작스러운 강압적인 말투에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한 대 칠 기세!


입이 벌어진 한 피디도 그대로 얼어붙는다.


“아니 근데, 줄리는 왜 빨리 안 오지?”


다시 전화기를 들어 비서를 다그치자 줄리는 지금 부재중이란 답이 돌아왔다.


“줄리한테도 말하겠지만, 우리 하던 거 전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 회장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몸을 휙 돌렸다.


회전의자가 빙글 180도 돌면서 창밖을 향해 멈췄다.


“아니다! 지금 즉시 내 말대로 실행해! 알았지?”


한 피디는 의자의 등받이 위로 보이는 한 회장의 뒷머리를 보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아··· 아버지! 아니, 회장니이이임!”


한 피디는 한 회장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다.


복잡한 심경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이를 악문 한 피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불쑥 던진다.


“이럴 거면··· 왜 사업을 쪼개서 줄리와 저에게 나눠 주신 겁니까?”


그제야 목석같던 한 회장이 반응을 보였다.


회전의자가 다시 슬쩍 한 피디 쪽으로 돌았다.


“으응?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5.


사무실에 돌아온 한 피디는 한 시간째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살짝 벌어진 입에선 가늘게 침까지 흐르고 있다.


겨우 다시 정신이 돌아온 건 회사 그룹웨어에 전사 공지가 떴음을 알리는 알람을 듣고 나서였다.


티슈를 한 장 뽑아 입가를 닦은 한 피디는 모니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


흐리멍덩하던 눈이 커지더니 부르르 떨렸다.


공지 안건은 둘이었다.


하나는 줄리와 한 피디의 이사 임명을 철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유가 기가 막혔다.


“뭐어···? 자질도 검증 안 된 자녀들을 당연한 듯 후계자로 임명하는 건 현대경영에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아···!”


또 하나는 신사업추진에 관한 건.


앞서 회장실에서 들은 대로 <아이러브>의 트로트 앨범 제작과 줄리의 새 드라마를 막장 컨셉으로 시도한다는 내용이었다.


황당한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으잉? 앞으로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매니저는 본인이 직접 한다고?”


한 피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우리보고 당장 실행하라고 다그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본인이 직접 챙긴다고 나서는 건 또 뭐야?”


이사 타이틀이야 단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쉬울 건 없다쳐도.


“피디까지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정말··· 노망이 난 거 아니야?”


지금까지 수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데뷔시킨 아이돌이 몇이고, 업계에서 얻은 신망은 또 얼마나 두터운데.


이건 뭐···.


하루아침에 훈장 받은 고위 장교에서 갓 전입한 이등병으로 강등된 기분이었다.


이마에 번진 식은땀을 손등으로 훑던 한 피디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어찌어찌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저 노친네의 상태를 보아하니···.


줄리와 합심해서 자기를 물 먹이려고 수 쓰는 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한 피디 자신이 줄리와 손을 잡아야 한다.


졸린 음성의 비서에게 줄리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계속 연락이 닿지 않은 건 촬영 일정 때문일 수도 있다.


- 아직 자택에 계시는 거로 압니다.

“그래요?”


비서에게 줄리가 나오면 바로 알려달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 직접 전화를 하는 편이 낫다.


한 피디는 핸드폰을 꺼내 줄리에게 문자를 하나 보낸다.


오누이 간이지만, 일 년에 한두 번 통화도 안 하고 지낸 지 오래되었기에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이러브>의 매니저였다.


작은 키에 역도 선수 같은 우락부락한 체형의 남자는 듣기에 서른 초반이라 했다.


그런데 콧수염까지 길러서 그런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그는 다짜고짜 한 피디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


벌컥 들이닥친 것도 실례인데, 이렇게 위압적인 분위기라니···.


놀란 한 피디는 두 손을 내저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까지 밀렸을 때였다.


가까스로 멈춰선 매니저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더니 쉰 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알만했다.


한 피디 자신도 그의 입장이었다면 이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일단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일.


바로 저, 갑자기 노망이 든 한 회장의 괴이한 몽니 때문이 아닌가.


“위··· 위에서··· 갑자기 정한 거라···.”


하지만 매니저는 한 피디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급히 말을 끊더니 동시에 자신의 이마를 한 피디의 코 끝에 들이댔다.


“우리가 이런 꼴 당하려고 M&A 허락 한 줄 아쇼?”


놀란 한 피디가 두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아··· 아니, 그게 말이에요··· 한 회장께서···.”


어떻게든 자기가 결정한 게 아니란 걸 어필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막무가내였다.


책임자를 밀어내고 구닥다리인 회장이란 자가 사업진행을 꿰차는 일!


그런 일은 이 바닥에선 드문 걸 넘어 황당한 일일 뿐이니까.


매니저의 눈빛에서 분노가 이글댔다.


너같이 말랑한 놈한테 뒤통수를 맞아서 억울하다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우리 애들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뽕짝 아이돌이나 하란 말이오?”


한 피디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보았다.


매니저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색이 된 한 피디의 목소리가 잠겨 들어갔다.


“매니저님! 잠시만···.”



6.


매니저는 한참 동안 험악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결국 경비원에게 끌려나갔다.


어지럽고 멍한 머릿속을 겨우 진정시키던 중 이번에는 또 다른 폭풍이 들이닥쳤다.


드라마 제작 피디였다.


영상 쪽은 줄리한테 가서 말하면 될 텐데 왜 자기한테까지 와서 이러는 걸까.


“드라마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어서···.”


한 피디는 굳은 얼굴로 발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줄리가 연락이 닿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찾아왔다는 말로 한 피디에게 엉기더니···.


또 분노를 분출한다.


“아니, 막장이라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우리가 오로라 공주 같은 걸 어떻게 찍어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한 피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드라마 피디는 지금 촬영 중인 걸로 보이는 드라마 대본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려댔다.


“작가들이 다들 나가겠다고 난리들이에요. 쪽팔려서 못 다니겠답니다.”


화가 치밀었을 때 저렇게 자해를 하는 사람이란 걸 오늘 처음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 사람이 아까 매니저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 피디는 드라마 피디를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잠시 후 또, 비서가 문을 빠끔 열고 머리를 들이밀더니 한 피디를 불렀다.


“뭡니까?”

“저···.”


뭔가 또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한 피디는 준비를 단단히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러브> 애들이 찾아왔습니다. 피디님하고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맙소사!


한 피디는 비서를 보고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눈치 빠른 비서는 ‘나 없다고 하세요’라는 뜻임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한 피디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BW가 하루아침에 난장판이 되어버렸어. 난장판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상황이다. 어쩌지···.”


한 피디는 곧 들이닥칠 기자들과 투자자들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줄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퇴근할 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한 피디는 여전히 오락가락을 반복하는 비를 보면서 핸드폰을 귀에 댔다.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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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110. 식신 vs 식신 1 24.05.10 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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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108. 보이지 않는 반격 1 24.05.08 3 0 12쪽
107 107. 교란작전 2 24.05.07 2 0 11쪽
106 106. 교란작전 1 24.05.06 4 0 11쪽
105 105. 히트 앤드 런 2 24.05.05 8 0 11쪽
104 104. 히트 앤드 런 1 24.05.04 6 0 12쪽
103 103. 화살은 정의원에게로 3 24.05.03 7 0 11쪽
102 102. 화살은 정의원에게로 2 24.05.02 7 0 12쪽
101 101. 화살은 정의원에게로 1 24.05.01 5 0 12쪽
100 100. 트레이닝 데이 2 24.04.30 6 0 11쪽
99 099. 트레이닝 데이 1 24.04.29 6 0 11쪽
98 098. 연결고리 3 24.04.28 7 0 12쪽
97 097. 연결고리 2 24.04.27 5 0 11쪽
96 096. 연결고리 1 24.04.26 6 0 12쪽
95 095. 건우가 필요해 2 24.04.25 7 0 11쪽
94 094. 건우가 필요해 1 24.04.24 9 0 11쪽
93 093. 마주선 두 사람 2 24.04.23 8 0 11쪽
92 092. 마주선 두 사람 1 24.04.22 9 0 11쪽
91 091. 나무아미타불 3 24.04.21 10 0 11쪽
90 090. 나무아미타불 2 24.04.20 10 0 12쪽
89 089. 나무아미타불 1 24.04.19 12 0 11쪽
88 088. 패스워드 2 24.04.18 12 0 12쪽
87 087. 패스워드 1 24.04.17 14 0 11쪽
86 086. 설경에 갇힌 나찰 2 24.04.16 10 0 11쪽
85 085. 설경에 갇힌 나찰 1 24.04.15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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