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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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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복숭아
작품등록일 :
2024.08.0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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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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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DUMMY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운 바에 의하면 남녀 간의 혼인이란 실로 신성한 것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

그렇게나 중요한 것을 대뜸 언급하는 태도에 멍한 표정을 짓자, 이젤라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뭔 반응이 그래요?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아가씨, 제발······.”

“알았어. 그런데 한 번 생각 정도는 해 봐요! 지금 내 옆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이젤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복도 너머로 휙 사라졌다.

힘겹게 이마를 훔치며 실례했습니다, 하고 연신 사과하는 집사는 순식간에 십 년쯤 늙은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투란은 이 성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외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수의 박제와 고풍스러운 가구, 화려한 장식품으로 가득한 집무실.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의자에 앉은 이가 발타스의 가주이자 오렘 시의 영주인 루그 발타스였다.


“어서 오게, 젊은 귀족. 내 이름은 이미 알겠지?”

“투란이라고 합니다.”


발타스 가주의 뒤쪽에는 칼을 찬 남녀 한 명이 공손히 서 있었는데, 분위기상 그를 호위하는 기사인 듯했다.

가주씩이나 되는 귀족에게 기사 호위 따위가 무슨 쓸모일까 싶기는 하지만.

투란의 말에 루그가 흥미로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투란이라, 그뿐인가?”

“제 가문과 적대하는 곳이 있어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흠, 요즘 일어난 분쟁 중에 그 정도로 큰 게 무엇이 있었지? 하디트와 코렐, 이레와 켈라우, 아라비온과 자하르-”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이름을 들은 순간 투란은 동요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개 가문의 이름을 나열하던 루그는 상대가 전혀 반응하지 않자 재미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어차피 지금 우리는 적대하는 가문이 없으니까. 다만 차후 발타스 혈통이 자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자네를 대접했듯 대접받으리라 믿겠네.”

“약속하겠습니다.”


이렇듯, 귀족이 다른 귀족을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며 충돌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만약 다른 가문의 영지에 들어갔음에도 대접을 거부한다면 이는 영지의 주인에게 ‘나는 네 손님이 아니다. 무언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왔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는 과거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웠던 접대의 관습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무엇 때문에?”

“제가 자란 환경이 특수하다 보니 아는 것이 많이 없어서,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그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꽤 있어서 미리 말해두지만, 도서관에 끝내주는 고대 마법이나 마력을 높이는 비법 따위는 없어.”

“괜찮습니다. 그런 것은 바란 적 없었으니까요.”


투란은 전혀 상관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정말로 평생 언덕 위에서 사느라 몰랐던 것을 알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투란을 빤히 바라보던 루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한다면 못 들여보내 줄 것은 없지. 어차피 그 안에 우리 가문과 관련된 기밀 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 오늘은 시간이 좀 되었으니 쉬고 내일 보는 것으로. 괜찮나?”

“가주님의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잊지 않으리라 믿네.”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루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 * *


다음 날, 성에서 나온 투란은 발타스의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가 가주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증 확인했습니다, 고귀하신 분. 하늘 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들어간 투란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책상과 의자 몇 개, 그리고 둥근 벽을 타고 나선형으로 설치된 계단이었다.

창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장의 동그란 구체에서 나오는 흰 빛이 실내를 환히 밝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책상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투란을 향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투란 님. 저는 이곳의 사서입니다. 가주님의 명에 따라 이곳의 이용 수칙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늘 도서관의 이용 수칙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첫째, 도서관 내의 책이나 시설물을 훼손할 경우 가문에서 매긴 금액대로 보상할 것.

둘째, 도서관 내의 책은 반출 금지.

투란이 듣기에는 그냥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나열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도서관 이용 중에는 제가 수칙 위반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투란은 사서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오자 가운데 공간에 설치된 책장, 그리고 거기에 꽂힌 수백 권의 책이 보였다.


“오······.”


수천 권의 책이 있다던 미단의 말은 오히려 사실을 축소한 것인 듯했다.

이 건물의 높이를 생각하면 수천 권이 아니라 수만 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


하지만 서너 층 정도를 더 올라가 보니 언제부턴가 책장 상당수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십 층 정도부터는 아예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았는데, 뒤따르던 사서가 이 위로는 책이 없다고 말했기에 투란은 다시 2층으로 내려왔다.


“도서관의 크기에 비해 책의 개수가 좀 모자라 보이는데.”

“이 도서관은 옛 제국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전쟁으로 오렘 시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며 그 과정에서 많은 책이 유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옛 제국.

어머니에게 지나가듯 몇 번 들은 적 있는 단어였다.

머나먼 고대, 프레아 신족이 이종족을 물리치고 세상을 정복하여 세운 나라였다고 하던가?

하지만 신들이 승천한 뒤 그 후예인 귀족들이 서로 반목한 끝에 제국은 무너졌고, 지금처럼 여러 마법사 가문이 난립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했다.

빽빽이 꽂힌 2층의 책들을 들여다보던 투란은 뒤에 있던 사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서라면 이곳의 책도 읽어봤겠지.”

“예.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필요한 책을 찾아드리는 것 역시 제 일입니다.”

“기본적인 상식을 얻고 싶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여기서 하는 말이 모두 가주에게 전해질 수 있음을 고려해 투란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를 들은 사서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책 몇 권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위층까지 몇 번 오간 끝에 그는 십수 권의 책을 1층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의 책 중 상당수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쯤 지난 것이라 고귀하신 분께서 원하시는 바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책들을 읽으시는 쪽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고마워.”


투란은 감사를 표한 뒤 의자에 앉아 책 한 권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커버는 두툼한 소가죽, 종이는 잘 재단한 양피지로 만들어졌으며 안쪽에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새겨넣은 듯한 글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처럼 느껴지는 물건.


‘이게 바로 책······.’


투란은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물건을 간단히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나뭇가지로 모래를 긁어내는 식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기에 조금 더듬거리긴 해도 그럭저럭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은 ‘세계 일주기’.

누군지 모를 책의 후원자를 예찬하는 서문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저자는 오렘 북쪽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귀족으로, 세상의 끝을 보고 싶어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책에 적힌 이야기의 내용은 투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하루 한 번씩만 좌우로 열리는 산맥의 통로, 그곳에 숨어 살며 지나다니는 사람을 잡아먹는 눈먼 난쟁이들.

끊임없이 모래만이 펼쳐져 낮에는 끓어오르고 밤에는 얼어붙는 사막.

울창한 밀림의 요정,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 바다와 암초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경을 실감 나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할 정도로 생생히 묘사하는 능력은 실로 마법과도 같았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쯤, 투란은 허기를 느끼며 우선 읽은 부분을 기억한 뒤 책을 접었다.


‘대단한데.’


이제 그는 저 동쪽으로 가면 어떤 신기한 지형이 있는지, 그리고 막연히 이름만 들었던 이종족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생태와 문화를 가졌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고작 책 한 권을 반쯤 읽었음에도 이 정도인데 저것들을 다 읽으면 또 무엇을 알게 될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은 뒤, 투란은 매일 아침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이 되고서야 성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둘째 날, 대가문부터 시작해서 평범한 마법사 가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는지, 어떤 체계로 도시와 마을을 경영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셋째 날, 그가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물건들이 어느 지역에서 나온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여 만들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넷째 날, 마수 도감을 통해 마수들이 생물별로 어떤 힘을 주로 개화하는지, 어떤 신체적 특성이 어떤 힘을 상징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다섯째 날, 옛 제국 시절의 유물 중 상당수가 세상 곳곳에 퍼져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도서관부터 시작해서 그가 오렘에 오는 길에 보았던 돌로 된 도로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런 지식을 하나하나 쌓을수록 그저 미지의 공간으로만 여겨지던 세상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무지한 양치기 소년에서 조금 더 나은 무언가로 진화하는 기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마력을 얻을 때처럼 말초적인 쾌감은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정신적인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섯째 날.

도서관으로 향하던 투란은 루그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집무실에 도착한 투란을 보자마자 대뜸 용건을 꺼냈다.


“도서관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지?”

“예.”

“내가 자네를 귀족으로서 대접한 것과 별개로 도서관을 이용하도록 허락한 것이 호의임을 알리라 믿네. 지금 그 대가를 받고 싶네만.”

“말씀하십시오.”


이쪽이 받아먹기만 하고 요구는 안 들어준다고 들면 저쪽에서도 이제 슬슬 꺼지라고 하지 않겠는가.

보통 귀족이 영지를 방문한 손님을 대접하는 시간은 관례상 사나흘 정도.

슬슬 이를 넘어선 투란으로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최근 오렘의 북쪽에 마수 하나가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다더군.”

“제가 놈을 사냥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투란의 물음에 루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토벌하러 갔던 기사 네 명이 돌아오지도 못하고 잡아먹혔네. 아무래도 귀족이 직접 나서야 할 텐데, 우리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건 두 명뿐이야. 자네까지 참여해 세 명이 된다면 훨씬 안전하겠지.”


발타스 가문의 구성원은 루그 부부와 루그의 동생, 딸과 조카 두 명까지 총 여섯 명.

그중 루그의 동생과 조카 한 명은 오렘이 아닌 다른 도시의 영주로 나가 있으며, 본인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도시를 보호해야 했고 부인은 전투에 능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원할 수 있는 귀족은 딸과 조카까지 두 명뿐이라는 계산이었다.


“알겠습니다.”


흔쾌히 허락한 것은 요즘 책을 읽느라 밖으로 나다니지 않아 실전 경험과 마력을 전혀 쌓지 못하기도 했고, 과거 케오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르기도 해서였다.

인간은 언제나 마수에게 생활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으며, 따라서 마법사가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


이곳 오렘의 평민들이 투란의 양은 아니지만, 그가 먹고 마시며 몸에 두른 것들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을 터였다.

양치기는 양의 털과 살점을 먹으며 연명하는 대가로 양을 늑대에게서 지켜야 하는 법.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무레이의 공무원이 말하던 것을 생각하면 귀족이건 기사건 마수 사냥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던데, 그는 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반응한단 말인가?

간접적으로 묻자 루그가 답했다.


“놈이 틀어막은 북쪽 길이 중요한 무역로니까. 벌써 열흘째 막혔으니 빨리 뚫어야지.”


열흘이라······.

투란은 닷새 전, 그가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하자 의미심장하게 웃던 루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야 왜 도서관 이용을 흔쾌히 허락했는지 알 수 있게 되어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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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화 +56 24.09.01 41,331 1,730 13쪽
26 25화 +42 24.08.31 41,065 1,55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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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화 +36 24.08.27 41,372 1,661 14쪽
21 20화 +39 24.08.26 41,158 1,66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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