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Winner Takes It All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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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지우의 두 번째 드라마 준비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됐다.
어느덧 대본리딩이 열리는 날.
ETVN 회의장에는 취재기자들이 먼저 모여들었다.
지난 ‘본투비스타’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연습 현장을 공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찰칵찰칵.
굵직굵직한 네임밸류의 배우들이 속속 대본리딩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의 셔터들이 바쁘게 울려댔다.
남주인 배서원 배역에 낙점된 선우하와 주조연급 중견배우인 정순재, 김보석, 이주미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캐스팅 제안에 흔쾌히 응한 인물들이다.
잠시 후, 이윽고 ‘블랙 셀러브리티’의 여주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인 주해나가 등장하며 다른 배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기자들은 그 장면을 담기에 일제히 바쁘게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머, 해나 씨.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정말 큰일 치렀어. 그 나쁜 자식 재판 받게 됐다면서.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면 안 된다, 자기.”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좋은 쪽으로 잘 결말이 날 거 같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와중, 살짝 얼어붙은 분위기로 남자 한 명과 함께 나타난 사람.
바로 GSK 엔터의 윤서연이었다.
그녀는 쭈뼛쭈뼛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원형 띠 모양의 테이블을 따라 쭉 늘어선 이름표들.
삼면을 돌며 자신의 네임을 찾는데.
‘뭐야, 왜 없지?’
옆의 남자, 김종혁 팀장도 난감한 표정이다.
“뭔가 착오가 있나 본데?”
마침 스태프가 다가오자 사정을 물었다.
“아, 윤서연 배우님이세요? 죄송하지만 자리가 이 뒤쪽입니다.”
“네? 여기가 아니구요?”
“네네. 배우님께서는 오늘 리딩 안 하시는 걸로 되어 있어서요.”
“...네?”
팍 상하는 기분.
하지만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미리 전달받은 1화 대본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 ‘심도희’의 대사는 딱 한 마디였다.
[네, 지금 갈게요.]
이걸 시키자고 맨 앞자리에 배치할 수는 없었겠지.
‘그래, 고작 1화니까.’
애써 이해를 해보려고 하지만.
분명 조연급이라고 해놓고 계속 이런 식이면 섭한데.
“두고 보자. 점점 비중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일단 그거라도 메쏘드 연기를 잘 해내 봐.”
옆에서 코치한답시고 나불대는 김 팀장이 짜증난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걷어차고 싶다.
“팀장님은 그 메쏘드 연기란 게 뭔지 알아요?”
“거럼! 뭐, 대부에 나오는 눈빛 연기 같은 식으로 엄청 강렬하게 하는, 그런 거 아니야?”
“하아, 됐고. 차에 가 계세요.”
“혼자 있어도 되겠어?”
“내가 애예요? 여기 매니저가 붙어 있는 배우 있나 한 번 찾아보세요.”
“큼큼. 나야 좋지 뭐. 아흠. 가서 한잠 때려야겠다.”
멀어지는 김 팀장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녀.
동시에 오버랩되어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아우라에 눈이 부셔서 손을 가렸다.
‘우지민 작가님!’
*****
민지우는 최인아 CP와 안규호 감독에 이어 대본리딩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는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배우들에게 인사를 했다.
특히 원로배우들에게는 깍듯하게 예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번 작품을 쓴 작가 우지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유, 너튜브에서 봤을 때보다 더 잘 생기셨네요. 난 신인배우가 들어오는 줄 알았지 뭐야. 호호.”
“나두요. 작가님이 웬만한 배우나 아이돌보다 더 잘 생겨서 혹시라도 펑크 나도 걱정 없겠누.”
“본투비스타 너무 재미있게 잘 봤어요. 함께 작품 할 수 없을까 기대했는데 이렇게 빨리 성사가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 작품 소설로 먼저 읽었는데, 얼마나 몰입해서 봤게요. 여기 사인 좀 해줄래요?”
그야말로 분위기 화기애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지민 작가의 팬들 중 배우들이 모여서 팬사인회라도 여는 줄 알겠다.
심지어 몇 명은 함께 셀카를 찍기도.
“여러분께서도 잘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지우는 뒷좌석을 채운 조조연급과 단역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여태껏 이런 적이 없으니 다들 감격하는 모습.
드디어 윤서연에게 그의 시선이 도착했다.
“윤서연 씨?”
“어머, 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모를 리가 있나.
잊지 못할 그 이름을.
괜히 오지랖 부려서 구해줬더니 보람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냉랭했던 그녀의 과거를 다 기억하는데.
‘너는 앞으로 나한테 해줘야 할 일들이 있어. 그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그 때에는 용서를 생각해 볼게.’
민지우가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비중에 연연하지 마시고 인상적인 연기 부탁드립니다. 절 놀라게 하시면 씬들이 확 늘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하하.”
“하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작가님!”
황홀한 기분으로 배꼽 인사 꾸벅.
좀 전에 자리 문제로 다소 상했던 기분이 한 순간에 제자리, 아니 더 높이 날아올랐다.
본격적으로 대본리딩이 시작됐다.
이번 작품에서도 민지우는 자상하고 차분하게 각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코멘트를 전달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더불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경청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줄여나가는 태도와 행동.
그게 모두의 눈에 신기하고도 멋지게 보였다.
“자, 그럼 15분 쉬고 다시 하시죠.”
안 감독의 말에 휴식시간이 시작되고.
자연스레 옹기종기 잘 아는 배우들끼리 모여 수다와 잡담이 시작됐다.
“우 작가님, 오늘 처음 뵙는데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준수하시고 쿨하시네.”
“본투비스타 출연한 후배한테 들었는데 자기같은 무명 배우한테도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주셨다고 입에 바르게 칭찬을 하더라니까.”
“실력은 또 어떻고요. 나는 그냥 ETVN 신인작가 공모전 대상 수상자라고 해서 예의 반짝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소설까지 베스트셀러를 찍어내는 분이야. 아까 봐봐. 자기가 쓴 대본 토씨 하나까지 안 보고 외워서 받아쳐 주시잖아. 분명 아이큐도 멘사급일 거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윤서연의 귀가 쫑긋 그들이 하는 말들에 쏠려 있다.
“그거 아세요? 국선영 작가님이 이번에 우리 작품하고 같은 시간대 편성해 달라고 한 사건?”
“뭐? 그게 정말이야?”
“원래 아니었는데, 우 작가님하고 영혼의 맞대결을 하기 위해서래요, 그게.”
“왜? 무슨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나?”
“그게, 우 작가님한테 해나 씨 빼앗기고 나서 클레임 걸었다가 대차게 창피 당하는 바람에 삐져서 그런 거래요. 해나 씨 자기한테 똥 튈까 봐 먼저 내쳤다가 금세 진실이 알려지니까 없던 일로 하자며 회유했는데, 그게 먹히겠어요? 게다가 최근 성적을 보면 나 같아도 안 돌아가겠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헐.”
역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은 진실이었다.
어느새 퍼진 신구의 대결이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나가기 시작했다.
*****
한편, 같은 날 같은 시각.
MBSC도 ‘죽방촌 사람들’ 역시 대본리딩을 진행 중이다.
공교롭다고 하기에는 너무 속 보이는 일이다.
“선생님. 혹시 대본리딩 날짜를 굳이 오늘로 잡으시고, 또 굳이 공개를 결정하신 것도 ‘블랙 셀러브리티’를 의식하신...?”
“맞아요, 국장님. 무슨 문제라도?”
“너무 그러시면 그 쪽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괜히 한 번 시선이 더 갈 수밖에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별로인 거 같습니다만.”
“그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네?”
“제 목표는 오직 하나. 그 작품의 시청률을 그 작품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 넘게 달성해서 우 작가를 따위를 포함해 ETVN 관계자들, 특히 하 상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반드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면서 울부짖게 만들 겁니다.”
이 정도 되면 거의 광기 수준이다.
그녀의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과 찢어지는 보이스를 들으며 김종훈 국장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막무가내로 편성을 앞당겨달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에는 참 꼴 보기 싫기도 했는데, 그래도 저렇게 네임드 작가가 배수진까지 치고서 애써 주면 그 과실은 우리가 그대로 따먹게 되는 거잖아. 어차피 대결 구도로 가게 된 거, 좋게 생각하고 우리도 밀어 주는 게 맞는 거 같네.’
사실 MBSC 입장에서 그녀의 투쟁심이 나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방송사 간 프로그램 성적 경쟁은 늘 불타오른다.
항상 시청률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명확하게 갈리는 법.
그 결과는 회사의 존립과도 직결된다.
저렇게 이를 갈며 동시간대 경쟁작을 이겨주겠다는데.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닌가.
국 작가는 이내 손미주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거기 분위기는 어때?”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서 미간이 급격히 구겨지는 그녀.
“뭐? 그렇게나 많이 몰렸다고? 잘못 본 거 아니야?”
또 뭔가 분노의 대상이 생긴 모양이다.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은 국 작가에게 손미나가 물었다.
“작가님. ETVN에 기자들이 많이 왔대요?”
“응. 대략적인 숫자를 말해주는데,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것 같아.”
“네? 그럴 리가...”
“정신 나간 것들!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여기 온 애들은 전부 MBSC 기자들밖에 없잖아! 일을 어떻게 이따위로...!”
국 작가는 대본리딩부터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맞불을 놓고 나서 기자들의 숫자로 승패를 가늠하려 ETVN 쪽에 세작을 심어 염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나보다 저런 초짜의 작품에 관심을 갖느냔 말이야! 하아, 참.”
이렇게 되면 그녀 혼자서만 펼친 프리뷰 라운드에서부터 깔끔하게 녹다운을 당해버린 셈이다.
*****
대본리딩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민지우.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에드먼드 조이스로부터의 연락이다.
‘본투비스타’의 미드 버전 제작 때문인 줄 알았던 민지우는 의외의 내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지우 군. 애리조나 국립공원에서 자네가 추락했던 사고 때문인데, 혹시 통화 가능할 때 연락 좀 줬으면 해.
그가 곧바로 에드먼드에게 전화를 넣었다.
- 통화 괜찮겠어?
“네,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그 때 자네, 언덕에서 떨어졌던 거 말이야. 그 바로 전 순간의 기억이 안 난다고 했잖아. 그래서 우리는 자네가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거라고 일단 가정을 했던 거고.
“네네.”
- 거기가 바위와 모래가 있어서 미끄러운 곳이란 건 나도 잘 아는데, 그래도 그 떨어진 지점 위에 지형이 젊은 사람이 쉽게 미끄러져 추락까지 할 정도로 가파르거나 위험한 곳은 아니거든.
그 공원 바로 옆 별장에서 일 년의 반을 보내는 사람이니 지리와 지형에 훤할 수밖에 없는 그다.
- 그래서 내가 혹시나 해서 경찰에도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해놓고 주변에 수소문도 넣어 놨었거든.
“아, 그러셨어요?”
- 근데, 우연히 누가 사진 한 장을 제보해 왔어.
“사진이요?”
- 응. 생물학자인데, 연구조사차 왔다가 찍었던 셀카 사진 한 쪽 모퉁이에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거야. 근데 그 모습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등 뒤에서 미는 듯한 장면이었던 거지. 언덕을 배경으로 해서 거꾸로 찍혔으니까 처음엔 몰랐다가 나중에야 그 모습을 확인하고 이상하다 생각해 제보를 하게 됐다는 군.
갑자기 등줄기에서 느껴지는 서늘함.
그렇다면 혹시 미국에서 그 날의 일.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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