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뜻밖의 인연 (1)
“거기 가서 좀 쉬다 와. 정리 되면 다시 불러들일 테니까.”
GSK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2팀 김종혁 팀장.
그의 말에 민지우가 분노했다.
“제가 왜 거길 가야 합니까?”
“뭐라고?”
“칭찬 받아야 할 일에, 오히려 문책성 발령이라니요.”
“야, 지우야. 그러니까 내가 늘 말했잖아.”
“.......?”
“나대지 좀 말라고!”
나대다니.
범죄와 비리로 얼룩져 있는 유력 정치인에게 불미스러운 짓을 당할 뻔했던 신인 여배우를 구한 게, 나댄 거라고?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연예인을 나 몰라라 했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순진한 거냐.”
“.......”
“여기에서 몇 년을 굴렀으면서 이 바닥 생리를 아직도 몰라?”
“.......”
“너 때문에 중요한 비즈니스가 다 어그러졌어.”
“지금 무슨 말을...”
“하아, 됐다 됐어. 그만 하자.”
민지우는 미친 듯 몸 바쳐 일해 왔던 지난 몇 년을 떠올렸다.
그 흔한 실수도 한 번 안 하고 게으름이라고는 전혀 피울 생각 하지 않으며 담당 배우들 서포트에 밤낮을 매진해 왔건만.
언제는 일 잘 한다고 추켜세우더니.
이렇게 버려지는 건가.
하필 팀장으로 승진을 앞두고 있던 차.
밝은 햇살이 머리 위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누구보다 더 미친 듯 종처럼 매니저의 임무에 충실하게 달려왔던 자신이 허무했다.
이렇게 버려지다니.
그것도 억울한 일을 뒤집어쓰고 말이다.
“그렇게 알아듣고 일단 거기 가 있어. 마 실장님이 당장 내쫓으라는 걸 내가 이 선에서 막아 본 거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별로 답하고 싶지 않은데.”
“오 대표님도 알고 계시던 겁니까, 그럼?”
“이거 봐. 궁금해도 묻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새 또.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시키는 일만 그냥 하면 되는 데, 왜...하아.”
결국 민지우는 산하 드라마 제작사로 좌천됐다.
말이 제작사지 직원이라고는 달랑 두 명밖에 없는, 구멍가게.
엑스트라 모집이나 로케이션 답사대행 등 잡일을 주로 하는 곳이다.
‘차라리 그냥 나가라고 하지.’
며칠간 고민을 하던 그는 일단 참고 버텨보기로 했다.
회사 대표 오길중, 그리고 마도형 실장.
이 업계에서 인맥과 파워가 있는 이들이라 아마 다른 엔터사들에도 손을 써놨을 거다.
그렇다면 박차고 나가 봤자 받아 줄 곳도 없겠지.
결국 매니저 일을 때려치우는 길 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 동안 참고 고생해온 세월이 너무 아깝잖아.
“민지우 씨.”
“네?”
“미국 로케 사전 답사 좀 다녀와야겠는데요.”
“네? 미국에요?”
갑자기?
“고스픽처스에서 제작 준비 중인 드라마인데, 애리조나 국립공원에서 촬영을 해야 하나 봐요. 거기 답사 좀 갔다 와야겠어요.”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는데.
비즈니스 트립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
곧바로 짐을 챙겨서 바다 건너 도착한 미대륙.
민지우는 다시 육로를 거쳐 애리조나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간만에 가슴이 탁 트이는 걸 느끼는 민지우.
잠시겠지만, 한국에서의 일을 마음 속 깊숙이 수납해두고 새로운 경험에 마음과 몸을 맡겼다.
“이 쯤이라고 했지.”
전달받은 위치에서 경관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경치야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조금 가파르고 위험한 지형이라는 게 우려스럽다.
“이런 문제점은 리포트를 해야겠는데.”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그러다 유난히 가파른 곳에 섰다.
아래로는 고속도로가 다니는 곳.
그야말로 절경이긴 했다.
정신없이 카메라로 여기저기를 찍던 그 때.
미끄덩.
바위 위 흙에 한 쪽 등산화 바닥이 미끄러지며 휘청한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악!”
반대편 발도 접지에 실패하며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 몸.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와중, 뭐가 중요하다고 카메라를 꽉 잡고 있었는지.
민지우의 다른 손은 무언가를 잡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그는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남기며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점점 화면이 열리며 빛이 들어오고 피사체가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장면.
민지우는 그런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오, 마이 갓! 아빠, 이 사람 정신 드는 거 같아요!”
여자 목소리.
꽤나 어려 보인다.
그런데 그의 망막에 점점 또렷하게 잡히는 모습이 어딘가...
‘금발?’
백인이다.
푸른 눈동자를 한 아주 어여쁜.
‘아, 나 미국이었지.’
다행히 그의 기억이 재빠르게 현실을 스캔했다.
곧이어 그녀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
역시 백인 남자다.
체구가 꽤 건장해 보이는 사십대 전후의.
“정신이 드세요? 우리를 알아보시겠어요?”
흠, 한국말을 꽤 잘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가만, 이거 영어인 거 같은데.
‘근데 내가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 거지? 그것도 너무 편하게?’
일단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여긴 어딘지가 궁금하다.
“병원입니다. 나는 ‘에드먼드 조이스’라고 하고 얘는 내 딸입니다.”
민지우의 궁금증을 알고 있다는 듯.
그 남자는 그동안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갑자기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내린 그.
하필 그 때 그 밑의 도로를 지나던 차가 충격을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비스듬히 비껴가면서 밟지는 않았다.
바로 그 차를 운전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이 백인 남자인 거다.
그러니까 민지우는 추락과 교통사고를 한꺼번에 당한 셈.
곧 이어 나타난 하얀 가운의 의사가 몸 상태를 설명해준다.
“그나마 이 정도인 게 다행입니다. 뇌수술을 실시했는데 경과는 아주 좋습니다. 팔과 갈비에 골절, 그리고 얼굴이 좀 벗겨져서 성형수술을 일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에 치명적인 부상은 피했다는 것.
정말 기적에 가까웠다.
“다만, 좌뇌가 충격을 크게 받아서 그게 좀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왼쪽 뇌에요?”
“네. 그리고 우리 에드먼드 작가님과 따님 분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작가’라고?
“자칫 인적이 드문 그 곳에 방치됐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거든요. 게다가 작가님께서 헌혈을 해주신 덕분에 수술도 가능했구요.”
“아이 참, 박사님도. 제가 이 분을 쳤다니까요.”
“그건 경찰에서도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고 결론을 냈죠.”
“그래도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말을 듣고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짐작 간다.
로케이션 리포트에 쓸 사진을 촬영하다가 바위의 흙을 밟고서 미끄러지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었지.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한 번 기이함을 느끼는 민지우다.
‘어떻게 내가 이 말들을 다 알아 듣고 있는 거냐.’
사고는 사고고.
도대체 머리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경관.
그 가운데 버티고 있는 별장, 아니 저택이다.
민지우는 에드먼드 조이스와 그의 딸을 따라 이곳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몸 완쾌될 때까지 머물러 주세요.”
역시나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민지우는 그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갈 곳도 없고 아직 몸 상태도 성치 않아서 일단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 상황 설명 다 들으셨으니 그렇게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엄청 좋은 사람이란 확신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함으로 철면피를 두르는 세상인데.
이 사람은 잘만 하면 피해갈 수 있는 책임도 마다하지 않네.
민지우는 새삼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성형 전문 병원에 예약이 돼 있습니다.”
“성형이요?”
“네. 얼굴, 특히 코와 이마, 턱이 많이 쓸렸어요.”
그의 얼굴은 붕대 천지다.
사고 당일 처참함의 흔적들이다.
“그건 한국에 가서 하겠습니다. 여기는 비싸다고 들었는데.”
“하하, 돈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미용 목적이 아니라서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작가라면서, 돈이 많다는 게 느껴진다.
이 집만 해도...
평수부터 어마어마하고 시설도 좋다.
주위의 저택들이 이 동네의 수준을 가늠케 해주고 있었다.
‘아차. 내 정신.’
민지우는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미국에 온 목적.
다행히 스마트폰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내준 방으로 들어온 그가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 어? 민지우 씨?
자신을 미국으로 보낸 구멍가게 제작사 사장.
반응이 마치 귀신을 대하는 사람 같다.
“연락이 갑자기 끊어져서 놀라셨죠? 미안합니다. 사고가 생겨서 그만...”
- 살아 있었군요?
“네? 그게 무슨...”
- 죽었다던데.
“네? 누가요?”
- 마 실장님이요.
“마동혁 실장 말입니까?”
- 네.
뭐지.
이 싸한 기분은.
GSK 엔터테인먼트 마 실장이 날 죽었다고 했다고?
또 하나 기막힌 사실을 전해 들었다.
- 거기에서 행방불명은 곧 죽음이라고. 그러면서 퇴사 처리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뭐, 뭐라구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
몇 년을 개처럼 굴렀던 부하직원이 출장을 가서 실종이 됐다면, 당연히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아니면 걱정이라도 하든가.
근데, 뭐라고?
곧바로 퇴사 처리를 해버렸다라.
그럼 사유는 ‘객사’라도 된다는 건가.
정이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섬뜩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히다.
민지우의 입술이 저절로 꽉 물어졌다.
피가 날 정도로.
“알겠습니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 말해 보세요.
“저한테 전화 왔었다는 말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주세요.”
- 흠, 그렇게 하죠. 잠깐이라도 같이 근무한 정도 있는데.
민지우가 전화를 끊고 난 후 에드먼드의 딸 벨라가 들어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그녀가 따스한 코코아를 건넨다.
중학교 3학년이라던데.
역시나 백인들은 빨리 성숙한가 보다.
처음 봤을 때 대학생인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
“아버지께서 작가세요?”
민지우는 그제야 여유가 생긴 건지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종특은 어쩔 수 없다니까.
“네. 혹시 데이라잇 아세요? 영화 말고 드라마.”
“데이라잇, 당연히 알죠! 그 유명한 범죄수사 시리즈 아닌가요?”
그도 몇 편을 몰입해서 본 기억이 난다.
한국에도 이른바 광팬들이 존재할 정도.
“어머, 맞아요. 알고 계시구나. 그 시리즈 작가이자 쇼러너세요.”
“오, 그러시구나. 근데 ‘쇼러너’란 게 뭐죠?”
“아, 한국말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종의 총괄책임 프로듀서예요.”
“그럼 작가이시면서 프로듀서?”
“보통 미국 드라마는 대부분 작가들이 쇼러너를 하니까.”
“아...”
시스템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에드먼드가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어쩌면 미국인들한테는 엄청 유명인일 지도.
“그 외에도 ‘고스트 이레이저’, ‘프로즌 이클립스’, ‘데드맨 서처’ 등도 우리 아빠가 제작했거나 지금 담당 중이세요.”
민지우가 전부 한 번쯤은 들어본 작품이다.
그 드라마들을 총괄하는 작가.
3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그런 사람 차에 부딪혔다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신의 뜻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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