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새로운 능력 (2)
하지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다짜고짜 연기 해보지 않겠냐고 말한다?
과연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번듯한 명함을 주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배꼽 보이게 기지개를 펴던 편의점 알바가 그런다면.
‘나 같아도 꽁무니를 뺄 듯.’
욕심을 무례와 바꾸고 싶진 않았다.
그 사이, 카드와 영수증은 이미 그녀의 손으로 갈아탔다.
남은 시간은 수 초 정도.
작가라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않을까.
이번에 ETVN 공모전에 당선됐다고.
홈페이지 명단과 내 주민증을 같이 대조해 보여주면 어떨까.
찰나에 많은 생각이 드는 민지우.
에라 모르겠다.
“저기...”
일단 질러보려고 하는데.
땡그랑 문소리.
악재가 등장했다.
“아직 못 샀어?”
친구로 보이는 다른 여성이 들어온 것이다.
하필 이 때.
“어, 샀어. 가자. 수고하세요.”
미소를 보이고 떠난 그녀.
눈앞에서 ‘본투비스타’의 유력한 ‘서헤라’를 놓쳐 버렸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내가 뭐하자는 거지. 지금이라도 쫓아가 볼까.’
자신의 소심함을 자책하며 갈등하던 그 때.
“오빠.”
배현아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현아 씨, 왔어.”
“좀 피곤해 보이네요.”
“그래?”
“쉬엄쉬엄 해요. 알바에 집필까지.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영혼 따위라고는 담기지 않은 자동응답기적 반응.
그의 머릿속은 다른 걸로 차 있었으니까.
좀 전 그녀에 대한 아쉬움으로.
“세상 참 좁네.”
“.....”
“지금 요 앞에서 선배님들 만났어요.”
“...어디서?”
“편의점 앞이요. 여기에서 나오던데요.”
“여기에서?”
순간, 초점이 나갔던 민지우의 시선에 영점이 잡혔다.
“혹시, 좀 전에 나간 두 아가씨?”
“맞아요.”
“그 분들이 현아 씨 선배들이라고?”
“네. 고등학교 동문이에요. 과는 다르지만.”
“정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
풀이 죽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폭죽처럼 터졌다.
“혹시 그럼, 연락 돼?”
“글쎄요. 번호만 알지 딱히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라서.”
“살아있는 번호겠지?”
“네, 뭐. 톡도 등록된 거 보면요.”
심봤다!
귀에서 팡파르 소리가 들린다.
이런 기적이 있나.
역시, 죽으란 법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 편의점이 복덩이인가 보다.
“현아 씨. 진짜 고마워!”
“네? 갑자기 웬...?”
“현아 씨가 날 구했어!”
“늘 그러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이 편의점 오빠가 왜 이러나 싶은 그녀.
설명을 듣고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오빠가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세린이 선배...”
“이름이 ‘세린’이야?”
“네. 지세린. 그 언니 성악 전공이거든요.”
“오, 그래?”
딱이다.
극 중 ‘서헤라’는 가수 겸 배우니까.
근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뮤지컬 배우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영역이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배우잖아.
“네. 제가 보기에도 그 역에 어울릴 것 같네요.”
“미안한데, 현아 씨가 다리 좀 놔 줄 수 없을까?”
“내가요?”
“응.”
“내게 작가로서 벽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 너무 시켜대는데...?”
“피디 된다며. 나중에 좋은 작가가 필요하겠지?”
“오빠라면...!”
“당연하지.”
“콜!”
흐릿해져가던 세상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
다음날 오후, GSK 엔터테인먼트.
마도형 실장이 오래도록 같은 자세로 몰두 중이다.
뭔가 감탄사를 중얼대면서.
‘와, 이건 진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
김 팀장이 입수해온 ‘본투비스타’ 시놉과 1화 대본이다.
‘대상 그 이상을 줘도 되겠는데.’
간만에 느껴보는 걸작의 향기.
호불호란 게 있을 수가 없겠다.
“최인아 CP가 찍은 이유가 있었어!”
지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TVN 임원들 사이의 베스트셀러라지.
이젠 직원들도 돌려보는 중이고.
주인공은 남녀 두 명.
캐릭터가 탐스럽다.
그 중에서도 포커스는 여주인 ‘서헤라’에게 맞춰져 있다.
만약 드라마가 히트한다면 그 배역을 맡은 배우가 가장 큰 빛을 보겠지.
“분명 탑급을 쓰진 못할 거야.”
유명 배우들은 신인작가에 모험을 걸려 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 함께 한다 해도, 거액의 출연료가 발목을 잡는다.
공모전 입상자의 처녀작에 넉넉한 예산을 배정할리 없으니까.
마 실장이 무릎을 쳤다.
“윤서연을 밀어 넣으면 안성맞춤이겠군!”
도발적 외모로 한 때 유망주 1순위였던 그녀.
하지만 불미스런 일에 얽힌 후 자숙 중인 상태다.
그냥 놔두기에는 아까운 계륵 같은 존재.
회사가 투자한 게 얼만데 말이다.
이제 슬슬 수면 위로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최적의 작품이 나타났다.
“섹시미에 여성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캐릭터라, 딱이네!”
단 한 큐에 과거의 이미지 세탁은 물론 스타덤에 오른다.
이 드라마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올린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아이구, CP님. GSK 마도형입니다. 잘 지내셨죠?”
세 시간 후.
그는 마포 어느 일식집에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상대방은 조우석 CP.
ETVN과 함께 ‘본투비스타’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 네온’의 기획제작 2팀 팀장이다.
“늘 CP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하.”
“저야 말로요. 지난 번 도움 잊지 못할 겁니다.”
“그 말씀에 든든합니다. 한 잔 드시죠.”
마 실장의 손에 두 사람의 잔이 차고.
이런 저런 이야기로 서두의 물이 덥혀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에 들어가는 그.
“이번에 아주 좋은 작품을 맡으셨더군요.”
“혹시, 공모전 대상...?”
“네네.”
“하아...”
왠지 조 CP의 반응이 떨떠름하다.
의외인데.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거 안 맡고 싶어요.”
“네?”
“펑크 땜빵이거든. 게다가 앞뒤로 ETVN 대작이 끼어있고.”
마 실장은 이 사람이 대본을 봤는지 의구심이 든다.
설마 비전문가인 본인보다 작품 보는 눈이 낮은 건 아닐 테고.
성향이 결과지상주의자이긴 한데.
“솔직히 신인이 뭘 알겠냐구요. 검증도 안 된 애를 쉐도우도 없이 무슨 미니씩이나. 나, 참.”
이제 뒷담화까지.
“경력 빵빵한 애한테 각색을 맡긴다면 또 모를까.”
불만이 상당해 보인다.
“그럼, 안 맡으시는 겁니까?”
“뭐, 그럴 순 없죠. 나도 월급쟁인데. 까라면 까야지.”
“사실 저도 의문스럽긴 하지만, 조 CP님께서 맡으신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적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당연하죠. CP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미다스의 손 아니십니까?”
“내가 그런 별명이 붙어 있었나? 하하하.”
엎드려 길 때는 철저히.
유치하다싶을 정도로 상대방을 올려 쳐줘라.
마 실장의 영업 지론 1장 1절이다.
웬만해선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번 작품 여주로 우리 윤서연이 좀 봐주십사 해서요.”
“윤서연이요?”
“네. 제가 시놉을 보게 됐는데, 아주 딱이더군요.”
“흠, 윤서연이라...”
“부탁드립니다. 다음 CP님 작품 때 우리 탑배우들 밀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군침을 삼키는 조 CP.
넘어온 게 보인다.
“그렇다면야! 지난 번 일도 있고.”
“감사합니다, CP님.”
“다 상부상조 하는 거죠. 그렇게 합시다. 하하.”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하.”
무르익는 술기운 속에 밤이 깊어가고.
두 사람은 2차로 향했다.
법인카드가 살을 뺄 시간이다.
*****
“안녕하십니까, 우지민 작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 드라마를 제작할 스태프들과의 상견례.
그의 인사에 박수가 울렸다.
“대본리딩장 착각하고 들어오신 신인배우 분인 줄 알았어요.”
“전 제가 아직 모르는 아이돌 멤버가 있나 했는데.”
“ETVN에서 돈 소문이 진짜였네요. 호호.”
“제작 첫 회의가 이렇게 화기애애한 적은 처음인 거 같아요.”
“솔직히, 진짜 잘 생기셨다.”
더없이 밝고 화창한 분위기.
민지우의 멋짐이 제대로 한 몫 중이다.
그를 처음 보는 협력사 스태프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마뜩잖아 보이는 사람도 한둘 보였지만.
“자, 그럼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최인아 CP의 주재 하에 ‘본투비스타’ 제작 첫 미팅이 시작됐다.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개괄 설명이 끝나고.
역할 분담 및 각 파트 별 준비 사항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정된 예산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제작에 있어서 돈 문제는 결과물 퀄리티와 관련된 핵심 이슈.
“돈을 챙겨주지 않을 거면 자리라도 좋게 주던가요.”
어느새 편성까지 싸잡아서 성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대충 때우란 거잖아요.”
불만은 주로 스튜디오 네온의 조우석 CP의 입에서 나왔다.
과거 ETVN 수석CP였던 인물.
“조 CP님. 마음은 알지만 자중해주셨으면 해요.”
“압니다. 그냥 푸념이에요. 내가 뭔 힘이 있겠어요.”
그예, 연출을 맡은 이정운 감독이 기름을 붓는다.
“솔직히 조 CP님 말에 공감은 가요.”
“...?”
“대상은 좋다 칩시다. 솔직히 경험 한 번 없는 신인작가만 의지해서 어떻게 촬영을 스무스하게 진행합니까. 예산이 적으니 늘어지게 찍을 수도 없는 거고.”
대놓고 우지민 작가 저격인데.
분위기 좋던 집안 꼴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그건 저하고 의논하시면 되구요.”
“가뜩이나 포트폴리오 급한데 이런 데 끌려와서는, 에이.”
노골적인 불만 표시.
두 사람 때문에 닻 올리기도 전에 배가 출렁인다.
그 때.
“제 생각엔 예산이나 편성, 모두 큰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문득 목소리의 주인공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다들 귀를 의심한다.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쌩초짜 신인작가였기 때문이다.
“저기요. 대상 축하드립니다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네요.”
“뭘 안다고 그래요. 그냥 듣다가 가세요.”
조 CP와 이 감독의 날선 반응.
굳이 개막전에서 이렇게 빈볼을 던져도 되는 건가.
민지우는 그들이 실망스럽다.
‘내 작품 말아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느껴지는 위기감.
이게 웬 난리래.
“총괄 CP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아, 네. 작가님.”
민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더 커 보이는 느낌.
좌중의 시선이 모였다.
못마땅한 두 명의 안구까지 포함해서.
“읏차.”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그가 밑에서 무언가를 테이블에 올렸다.
두툼한 제본 덩어리.
“일단, 대본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12부까지 완성됐으니까요.”
“벌써요? 그게 다 대본입니까?”
“네. 남은 4화는 이번 주 안으로 완료될 거구요.”
그의 행동에 최 CP가 미소를 지었다.
또 시작이군.
그런데 이번엔 더 다채로울 예정이다.
“이 정도면 촬영이 늘어질 염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허험, 큼큼.”
민지우의 시선을 받은 이 감독이 헛기침을 뱉어낸다.
할 말이 없어서.
“완성도에 의구심이 드시면 기성 작가님들께 검토를 의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국선영 선생님께 부탁하셔도 되구요.”
헐.
뭔 자신감이래.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제가 CP님께 예산을 대충 들었습니다. 말씀대로 풍족하진 않지만 탑급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는다면 부족하지도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
그는 나름 계산한 바를 설파했다.
사실 제작비 중에서 가장 부담되는 게 바로 유명배우 출연료.
그것만 아껴도 몇 회분 촬영비용이 나오니까.
논리가 납득이 간다.
“시놉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큰 비용이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텐트하우스’처럼 엄청난 장소의 섭외나 부분적 CG조차도 필요하지도 않죠. 또한 ‘눈썹의 여왕’에서처럼 명품으로 도배해야 하는 씬도 거의 없습니다.”
조곤조곤.
간략 명료한 발언.
매너와 표정은 또 어떻고.
참석자들은 벌써 그 묘한 마력 같은 기운에 빠져 들어간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
“아시다시피 저 신인이라 대본료 가성비 좋습니다.”
“하하.”
그 말에 순간 폭소가 터졌다.
심지어 자발적 빌런 역할을 맡으려던 두 사람조차도.
생뚱맞지만 진심이 담긴 자백.
순식간에 냉기가 온기로 바뀌는 순간이다.
경직됐던 허리들이 풀어졌다.
“출연료와 대본료. 이 둘만 감안해도 앞뒤 대작의 몇 분의 일로 비용이 줄어들 겁니다.”
모두가 끄덕끄덕.
사실 이 설득을 최 CP가 하려고 하던 것이었는데.
‘도대체 이 친구는 못하는 게 뭐야.’
그녀마저 미소 띤 얼굴로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존재란.
민지우는 편성도 오히려 유리하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보통 인간의 심리는 기대와 눈높이가 정비례한다는 것.
초기대작 사이에 낀 ‘본투비스타’.
상대적으로 만족도의 허들이 낮을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시청자 분들이 재미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될 겁니다. 제가 개런티 하겠습니다!”
당당한 자신감.
힘 빠질 뻔했던 스태프들은 순간 가슴이 웅장해진다.
저 설득력과 흡인력이라니.
“나 왠지 믿어져.”
“저런 작가님 처음이야!”
“잘 생겨, 글 잘 써, 저 당당함에다 말까지 잘 하네. 어쩜.”
“이러면 사기지.”
“엄마. 치트키가 등장했어요.”
“전 우지민 작가님과 일해야 능률이 오를 것 같습니다.”
스태프들의 감탄과 하트 뿅뿅이 날아다니는 회의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민지우가 그 분위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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