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 귀로(歸路)
= 맘에 안드는 인간들 아작내는 걸로는 조합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하네.
= 밴댕이 영감.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제 이해하실때도 되지 않으셨소.
= 누릴꺼 다 누리고 왕놀음까지 하다가 죽었으니 성계 니놈이야 너때문에 모가지 날아간 사람들 심정을 알 수가 없지. 이해는 무슨 놈에 얼어죽을 이해냐?
성게? 수염이 성게 가시처럼 까칠까칠해서 성게인가? 성게하고 왕놀음이랑 무슨 상관인가? 혹시 애기살 잘쓰고 왕놀음하던 성게면...... 성계? 이성계?
= 그러길래 위화도 갈때 형님이 앞장서서 갔어야 하는거 아니겠소.
= 왕이 가지말라는데 어떻게 가냐?
역사 공부는 관심이 없다. 철천지원수일 것 같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 저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 그건 부차적인 놀라움이고 이 귀신이 이성계라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상식은 이미 많이 초월해버렸고 어쨌든 나의 상상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많이 넘어서고 있었다.
- 따라오거라. 나와 좀 갈데가 있다.
"어디요?"
오전 내내 잘 보이지 않던 저승사자 누나가 대문으로 급하게 들어섰다.
= 야! 800아!
- 어찌 여기서...... 부의장님도 옥체 강녕하셨습니까.
= 옥체는 없어서 모르겠고 강녕은 했다. 영감은 아직 꼬장꼬장하게 잘 계시지?
부의장. 아마 저민련 부의장이겠지.
젠장, 이런게 자연스럽게 추론되어버리다니......
= 근데 얼굴 보자마자 어디를 가려고?
- 여기 이 령이 기억을 잃어서......
= 이 잡귀의 사정은 형님한테 대충들어서 안다. 그래서 어딜?
- 확인해 볼 것이 좀 있습니다.
저승사자 누나는 좌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마당에 있던 령들이 아침이 되니 다들 대문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길래 따라가 봤습니다. 멀리까지 가는 령들은 따라가지 못했으나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가는 령들은 전부 망자가 된 자리에 가서 머물더군요.
= 죽었던 순간을 끝없이 되새기는 거지. 딱히 할 것도 없고. 그러다 잘못하면 지박령이 되는 것이고.
- 그래서 저 령도 그 좌표로 한번 데려가 보려고 합니다.
내가 죽었던 장소로 가보면 내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
= 성계야. 너하고 지예도 같이 따라가라.
= 지예가 무슨 도움이 되겠소? 아직 령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데.
= 산 사람이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급하면 접신시키면 되지.
= 얘가 아직 저를 감당할 준비가 안되었잖소.
= 왜 꼭 니가 들어갈려고 하냐? 너 말고도 둘이나 있는데.
하긴 이성계 장군이 아니더라도 귀신은 둘이나 더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안해봤는데...... 첫 경험을......
= 형님이 800이를 아주 골로 보내시려고 작정을 하신 모양이네. 허허허.
= 그리고 T800 너는. 말 안해도 알고 있겠지만 함부로 마구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조심해라. 저 잡귀나 너나 딱히 다를 것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몸 사려라 몸.
특별히 준비하거나 쌀 짐은 없었다. 원래 없었으니. 하지만 애기살 아씨, 지예는 이것저것 챙기기 바빴다.
"무리하게 나서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거라. 열차타면 금방 갈 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을걸 어쩌겠느냐."
"수련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준비를 마친 지예는 개량한복을 입고 있던 무녀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누가 봐도 무녀라고는 할 수 없는 그 나이 또래로 평범하게...... 예뻤다.
- 그렇게 잡귀가 되어가는 것이다.
"제...... 제가 뭘요?"
무천도령으로부터 목적지를 전해 들은 지예가 앞장섰고 그 뒤를 세 귀신이 따라갔다.
살랑거리는 투피스 치마에 백팩을 맨 지예의 뒷모습이 계절과 어울리며 더 싱그럽게 느껴졌고, 예뻤다.
- 자네는 어쩌면 이미 잡귀인지도 모르겠다.
= 혹시 질투하시는거에요?
- 그런게 우리에게 있을...... 자네는 말도 생각도 너무 많다.
우리는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일행은 총 넷인데 열차표는 한장만 끊어도 된다는 점에서 크게 이득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건데요?"
- 가보면 알 것이다.
"뭘 그렇게 매번 안 가르쳐 주실려고 해요? 어차피 금방 알게 될 일을.
- 미리 이야기해주면 또 오만가지 잡생각에 수다스러워질것이 겁나서 그러는 것이다.
목적지는 저승사자 누나의 말대로 두시간이 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동대구역'
대구에는 대구역이 존재했지만 메인은 동대구역이었다. 어릴 때는 그런 것도 참 신기했었는데.
- 어릴 때의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가?
"어릴 때 기억이야 나죠. 대학 다니던 것도 기억이 나고, 근데 어느 타이밍에서부터 죽을 때까지가 기억이 안 나는 게 문제지."
- 일단은 가자.
잠깐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지예와 이성계 장군은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걸어가요?"
- 걸어갈 만한 거리다.
시간이 문제인 것이지 다리가 아프거나 한건 아니니 별 상관은 없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중교통보다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20분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예전에 월드컵할때 여기에서 거리응원 했었는데. 그때 정말 엄청났었죠."
- 그런 기억 말고.
범어네거리였다.
- 다른 기억나는 것은 없는가?
"아직은 딱히 없는데...... 교통사고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 곳이라고는 하던데 귀신이 정말 많네요."
- 지금 당장 자네와 상관있는 일에만 집중하는게 좋겠다.
한참을 서서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지켜봤다. 핸드폰 통화를 하며 즐겁게 지나가는 사람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지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
기다리던 지예도 지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수에 기대고 무선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했던 나도 뭘 듣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들을 수가 있나...... 지예한테 내가 빙의되면 들을 수 있을
- 아직은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한다.
- 집중을 하면 속으로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살아오면서 늘 들어왔다. 집중하면 공부가 잘된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 좋은 대학 가서 돈 많이 벌면 예쁜 색시가 생긴다.
그건 집중도 되고 열심히도 되는 사람들한테 해당하는 이야기지 애초에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와 같다.
내가 아무리 저 이어폰에서 흘러나와서 지예를 마음속으로 흥얼거리게 하는 소리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starry starry night~'
들린다.
Vincent!
- 작가의말
작가가 2002년 월드컵의 추억에 빠져있을 때
1
“범어네거리에 사고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 일 제대로 안하는 저승사자가 이렇게 많네.
“하긴 저승사자들도 엄청 바빴겠네요.”
= 2002년에는 여기에서 삼신할매들도 엄청 바빴을걸?
2.
- 보거라. 집중하니 다 되지 않는가.
“조금 뽀록인 거 같기는 하지만...... 노력하면 저사님 속마음도 읽을 수 있겠죠?”
- 자네 같은 잡귀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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