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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야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23
최근연재일 :
2022.01.13 06:05
연재수 :
1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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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59
추천수 :
876
글자수 :
1,035,798

작성
21.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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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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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69. 알량한 자존심

DUMMY

“어르신. 드디어 미친 겁니까?”


투움이 제 옆까지 조용히 물러선 장에게 대뜸 쏘아붙였다.


“음? 무슨 말인가?”


끝까지 시치미떼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모르는 건가.


투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병이에요.”


“뭐? 큐어양, 혹시 내 병명이 뭔가?”


그 때문에라도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오게 생겼다.


후방에서 지켜보던 큐어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주책이라고나 할까요.”


“주책이라니······ 하하, 큐어양. 그건 병명이 아닐세. 그대도 착각하는 게 있구만.”


통쾌한 웃음을 내놓는 장 주위는 일제히 똥이라도 씹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도 모르고 벤과 로자릭은 쓸데없이 비장했다.


검을 꽉 쥐고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로자릭, 손에 힘을 조금 더 빼게.”


벤이 그의 긴장을 먼저 눈치챘다.


그럼 로자릭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미소를 흘렸다.


“쿠넬 경!”


마침내 벤이 어떤 이름을 크게 부르니 병사들이 움찔하면서 창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경이 폐하에게 보인 충심은 거짓이었습니까.”


벤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온건파의 귀족이자 그레이의 옆자리를 늘 지키고 있던 자였다.


그런 자의 배신은 확실하게 뼈아팠다.


철그럭.


이내 쿠넬의 갑옷 소리가 천천히 병사들을 제치고 나왔다.


“벤.”


샤프한 이목구비에 짤막한 머리칼이 더욱 그의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기사의 긍지가 잘 드러나는 남자를 하나 꼽으라고 하면, 벤은 반드시 그를 뽑았다.


“전 기사로서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묵묵하고도 진중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사실은 아직도 그렇게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 쿠넬이 내뱉는 말들은, 벤의 환상을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깨기에 충분했다.


“착각하지 마라!”


갑작스레 가슴 속에서 끌어내 목청을 한껏 높여 내뱉는 바람에 근처 병사들도 화들짝 놀랐다.

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난 그레이스 경을 사모하고 있을 뿐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다시 일제히 이마를 탁 쳤다.


벤은 머리에 종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런 코흘리개 왕 따위, 내가 뭘 믿고 충심을 보인단 말이야! 차라리 그레이스 경이 왕좌에 올랐으면 훨씬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 되었을 것을.”


쿠넬이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그레이에 대한 찬양을 던지며 과장된 몸짓은 전혀 봐줄 게 못 되었다.


“그 찬란한 머릿결과 사막의 오아이스 같은 눈동자, 강인하고 고결한 자태와 천상계의 목소리. 그레이스 경, 그레이스 경은 왜 같이 오지 않았지?”


“쿠넬은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저도 잘······. 원체 말이 없지 않습니까.”


뒤에 물러나 있던 귀족들도 그의 반응은 전혀 익숙하게 대할 수 없던 모양이다.


고개를 푹 숙인 벤을 옆에서 보던 로자릭이 안절부절못했다.


“쿠넬 경, 그만하십시오. 그 이상은 벤의 정신이······”


“호오, 로자릭. 자네도 자네일세. 토너라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가문 따위와 어울려 다니다니. 발터가 그렇게 된 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나?”


로자릭의 손이 떨렸다.

아직도 발터라는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이었다.


로자릭은 그런 자신을 몰아세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토할 것 같아······.”


축 처져있던 벤이 읊조린다.


그 중얼거림이 로자릭에게도 닿았다.


로자릭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너무 실망한 탓이었던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음에도 검의 손잡이를 쥔 주먹은 여전히 단단했다.


“뭐, 충분히 이해는 하네. 어린 왕의 편에 서지 않는 이상 네가 설 곳은 없었겠지.”


“그만 그 입을 다무십시오.”


“뭐?”


대뜸 자신에게 향하는 벤의 말투에 제 귀를 의심했다.


쿠넬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누가 지금 내게······”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으니까 닥치라고 말했다 쿠넬.”


돌연 변한 벤의 태도에는 쿠넬 뿐만이 아니라 로자릭과 귀족들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장의 흥미를 끌기에도 충분했다.


“방금까지 망설이고 있던 자신을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했다.”


조용히 검을 치켜세우고 그를 노려봤다.

벤의 안면에 구겨진 인상은 인간보다는 야수에 가까웠다.


“당신에겐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어.”


“하하!”


그 모습이 쿠넬에겐 아직까진 가소롭게 보였다.


쿠넬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건 아무렴 좋았다.

벤은 양 무릎을 굽혀 하반신에 중심을 뒀다.


이내 검을 가장 머리 위로 올려 내려치는 형태를 취한다.


장은 어딘가 묘하게 익숙했지만 낯선 그 검술과 마주했다.


그럼 자신도 모르게 예감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그건 제 조부에게나 들었던 먼 얘기였다.


게다가 그 검은 괴랄하기 짝이 없어 조부가 말했던 사용자가 아니라면 다룰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 조부조차 연구 도중 관둘 정도였으니.


하지만 한 번 생긴 위화감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그건 무슨 검술이냐. 카심류를 고집하더니 드디어 아류 따위에 다다랐나?”


쿠넬도 검을 잡았다.


가늘고 긴 검이 벤을 겨눴다.


쿠넬의 도발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벤은 그를 유심히 살폈다.


“당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철저하게 밟아주기 위해 고른 식이야.”


벤의 말에 쿠넬은 일일이 코웃음을 쳤다.

하루가 전달한 책의 모든 식을 훑은 후 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코어근육의 강화였다.


식 하나하나가 세세한 균형을 요구해 사실상 여태 힘만으로 밀어붙인 자신과는 썩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게다가 웬만해선 적의 공격을 흘리는 걸 우선하는 게 대부분.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이 자세만큼은 흘린다는 의미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럴 수 있도록 친히 함께 기도해주지. 물론 내 검을 볼 수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쿠넬의 콧대가 그렇게나 높아져 있을 때가 기회였다.


벤이 자세를 취한 후 어떤 반응도 없자, 쿠넬은 다가가기를 꺼리면서도 먼저 앞 다리에 무게를 실었다.


냉정하게 상대를 분석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공.

최초이자 최후의 선택일지도 모를 행동이었다.


쿠웅


쿠넬이 한 손에 쥔 검을 다시 양손으로 쥠과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옆면 베기.’


벤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쿠넬은 단숨에 제 목을 벨 생각이었다.


그것을 허용할 거라고 여긴 만큼 얕보인 것이라면, 괜스레 더 열이 뻗쳤다.


하지만 빠르다.


쿠넬의 역량이 생각보다 뛰어나선지 그대로 받아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벤이 양발을 미끄러지듯 뒤로 옮겨 검을 휘두르기 좋을 만큼의 리치를 만들어냈다.


‘무슨······!’


고정된 자세 그대로 이동한 터라 마치 벤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멀어져 보였다.

하지만 사정거리 안이다.


물론 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피할 생각은 없었으니.


‘카심 개량형 8식, 물결.’


벤이 있는 힘껏 제 앞까지 오는 쿠넬의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꾸우웅──


뇌 속까지 울릴 듯한 소리가 허공을 메운다.


분명 벨 기세로 휘둘렀던 쿠넬의 검이 격돌한 상태 그대로 허공에 멈춰섰다.


벤은 내리친 후 생긴 반동을 토대로, 쉴 틈 없이 팔을 휘둘러 검을 아래까지 내렸다.


쿠넬은 그 순간 벤에게 드러난 허점을 다시 발견했지만 저릿한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벤이 멈추지 않고, 이번엔 아래에서 방금 가격한 검의 동일부위를 올려 쳤다.


또 한 번 철의 공명이 근처에 한가득 울린다.


끄윽!


여기저기서 급격한 울림에 사소한 두통을 호소하는 자들도 발생했다.


쿠넬이 힘겹게 팔을 움직이려 하지만, 이미 검을 쥐고 있는 팔 하나는 제대로 마비되어 있었다.


저릿하다.

이 애송이가 그만한 파동을 일으킬 거라곤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저릿한 손을 놓고서 그나마 힘이 남은 팔로 검의 손잡이를 잡을 때,


텅그렁!


정체불명의 울림과 동시에 손잡이를 잡은 팔에 위화감이 들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뒤늦게야 단절된 검의 몸통을 바닥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부러졌어?’


쿠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시하고 있던 장이 의미심장한 음을 흘렸다.


“적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쳤네.”


투움이 먼저 그들의 합을 보고 내뱉었다.


과연 무기의 장인에겐 보이는가.

장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설마 검의 파동을 느끼는 자가 있을 줄이야.”


“느끼진 못한 걸세.”


놀랍다는 듯 말하는 투움의 말을 장이 반박했다.


“예?”


“거듭된 연습이 낳은 무의식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두 합에 나누진 않았겠지.”


투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내 쿠넬은 검을 놓고 두 팔을 절며 뒤로 물러났다.


으득


이갈리는 소리가 벤에게까지 닿았다.


“후우우우욱─”


여태 호흡을 참고 있었는지 벤은 마지막에서야 아주 길게 호흡을 내뺐다가 들이마셨다.

본래 힘 위주의 검술을 갈고 닦아온 만큼 역시 완벽하게 터득하진 못한 듯하다.

제 팔도 쉽사리 원상태로 돌아오질 않았다.


“젠자아앙!”


쿠넬이 눈을 부릅뜨고 목젖이 보일 만큼 짖었다.


그런 발광마저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자존심은 제대로 박살 났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벤은 내심 불안했다.

이미 방심을 져버린 그를 막을 자신이 없다.


검을 노리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이 이상 무의미했다.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은 선택지를 떠올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콧잔등에 주름을 그리며 노려보던 쿠넬의 손가락이 꿈틀댔다.

순간 그 자신도 느꼈는지 흠칫하다가 미소를 짓는다.


“검을 내놓아라!”


쿠넬은 버럭 외치며 뒤에 있던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황하던 병사가 검을 건네자 그는 빠르게 그것을 낚아챘다.


뒤이어 검날은 여지없이 벤에게 겨눠졌다.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뿐. 감히 네깟 놈들이 그레이스 경과 나란히 선다는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어.”


쾅!


쿠넬이 박차고 나간 지면에 금이 갈 정도로 무게가 실린 도약이다.


벤이 다시 검을 들지만, 아까의 반동으로 사실상 자세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무리했나.”


아무렴 단시간에 터득할 수 있단 건 욕심이었을까.


“죽어!”


끝내 포기하지 않던 벤이 방어 자세를 취해봐도, 허공에서 돌연 몸을 뒤트는 쿠넬은 순식간에 궤도를 바꾼다.

방어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 어느새 접근한 로자릭의 검에 막혔다.


“로자릭!”


“차례차례로 아주 염병을──”


퍼억!


로자릭이 그의 검을 막아낸 후 곧바로 명치를 걷어차 떼놓았다.


떨어져 나가던 쿠넬이 다시 발끈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럼 그 뒤에서 또 귀족들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둘 다 너무 달아올랐다.”


로자릭 역시 거친 호흡의 벤을 비슷한 말로 타일렀다.


“벤, 여긴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니야.”


그제야 합을 나누던 두 사람의 시야에 주변인들이 들어왔다.


평소와 같이 통쾌한 웃음으로 걸어 나오던 장도 드디어 전장에 발을 들였다.

벤의 머리를 그 커다란 손으로 감싸곤 몇 번 휘저었다.


당황한 벤은 그저 헤집어진 머리를 어루만지며 장을 올려다 봤다.


“좋은 구경했네, 젊은 피들. 하지만 이젠 시간도 없으니 일찍 끝내보겠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만.”


로자릭의 설움이 묻어나온 한 마디만 쓸쓸하게 흩어졌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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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67. 만회했으려나 21.08.03 79 3 12쪽
67 #66. 전조 21.08.02 80 4 12쪽
66 #65. 정말 좋은 구경했네 21.07.30 79 4 12쪽
65 #64. 단장 명령! 21.07.29 74 3 13쪽
64 #63. 형님뿐입니다! 21.07.28 78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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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60. 이해, 조화······ 대화 21.07.23 90 4 12쪽
60 #59. 드디어 널 만날 수 있어 21.07.22 85 4 12쪽
59 #58. 일단 먹고 +2 21.07.21 90 4 12쪽
58 #57. 적당한 보험 정도로 21.07.20 83 4 12쪽
57 #56. 회유······요? 21.07.19 87 3 12쪽
56 #55. 좋지 않습니까 21.07.16 88 4 12쪽
55 #54. 스미스 정비소 21.07.15 88 3 12쪽
54 #53. 나는 반반 21.07.14 87 4 13쪽
53 #52. 저게 왕이라니 21.07.13 93 3 12쪽
52 #51. 차세대에 맡기겠습니다 21.07.12 101 5 12쪽
51 #50. 검은 아저씨 21.07.09 93 4 13쪽
50 #49. 당신이었군요 21.07.08 96 4 13쪽
49 #48. 자유도시 21.07.07 96 4 13쪽
48 #47.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21.07.06 94 5 12쪽
47 #46. 모든 걸 배송해드립니다 21.07.05 103 4 12쪽
46 #45. 특권이란 21.07.02 104 4 12쪽
45 #40. 그런 녀석이었지 21.07.01 105 4 12쪽
44 #44. 당신, 용사입니까 21.07.01 112 4 12쪽
43 #43. 나갈 수 있어 21.06.30 112 3 13쪽
42 #42. 성녀는 그래야 하는 건가요 21.06.29 120 4 13쪽
41 #41. 끝까지 모른다고 해줘 21.06.28 109 4 12쪽
40 #39. 흥미가 있습니까 21.06.25 111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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