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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링 님의 서재입니다.

이세계 택배기사로 이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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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야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23
최근연재일 :
2022.01.13 06:05
연재수 :
186 회
조회수 :
27,949
추천수 :
876
글자수 :
1,035,798

작성
21.06.29 00:00
조회
116
추천
4
글자
13쪽

#42. 성녀는 그래야 하는 건가요

DUMMY

─스승님!


8살의 그레이는 입을 틀어막고 그 말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던 친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주체하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과 목구멍 너머로 계속해서 나오는 딸꾹질을 죽을 힘을 다해 참았다.


참다 참다 신물이 나올 때까지.


스승이 선택한 마지막 아이로서, 성녀의 상징을 이어받을 때까지 쥐죽은 듯 부서진 마룻바닥 틈 안에서 스승님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봤다.


미처 숨지 못한 아이들이 속속들이 스승님의 뒤로 숨었다.


그녀의 방어술식마저 조금씩 옅어졌다.


그레이는 서서히 제 몸에 힘이 차오를 때마다 스승님이 약해가는 걸 체감한다.


그것을 방관하고 있던 약탈자들은 구태여 손을 쓰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녀의 방어술식이 사라지기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레이는 치를 떨었다.


분노라는 감정은 가르침 받지 않았기에 그게 화라는 것을 모른 채.


끝내 계승의 의식이 마무리될 때, 스승님의 저택은 잿더미가 되었다.


연기를 너무 마신 탓인가 평범하게 목숨을 잃어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레이는 살았다.


등의 표식이 처절하고 아련하면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


긴장감이 감돈다.


이미 이 방은 포름과 그레이의 패기가 감도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하루만 무안하게 그들의 기 싸움을 묵묵하게 지켜봤다.


얕은 한숨과 함께 그레이의 측근이 가져온 차를 머금었다.


피부가 따갑다.


달칵


“일단 진정하시죠.”


찻잔을 내려놓고 슬슬 둘을 중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레이보다도 감정을 가라앉혀야 할 이는 포름이었다.


왕의 일도 있어선지 좀처럼 차분하지 못하고 있다.


“전 철회하지 않습니다. 그날도······ 조금의 힘만 있었다면······.”


그레이의 불끈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렇게 강한 적들도 아니었다.


정말 단순히 약탈자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잔당.


어쩌면 패잔병이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인근의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건지 정말 사소한 전투법만 숙지했다면, 조금의 힘만 다룰 수 있었다면,


“스승님이 저희에게 그렇게 교육만 했었어도 그때의 미래는 달라졌을 겁니다.”


분명 그랬을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있었다.


“기억의 오류가 있진 않습니까.”


“예?”


그런데 돌연 그가 생각지도 않던 부분을 걸고넘어진다.


“당신은 스승님의 교육이 아니라 성녀의 자격을 가지고도 죽어갔던 스승의 무력을 탓했던 겁니다.”


“무력하다뇨! 그분은 끝까지 저희를 지키다 가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스승님에 대한 모욕에 울컥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아뇨,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애당초 당신이 기사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기사 집안의 양자로 간택 받아서입니까.”


“전······!”


하루는 마치 그녀의 과거부터 기억을 뒤틀려는 듯 몰아세웠다.


“지금 친구들이 곁에 남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대 성녀가 무력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임종을 그런 방식으로 지켜보지 않았으리라 여기진 않았습니까. 난 그러지 말아야지, 난 적어도 온전히 숙지한 힘으로 비참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젠 강요를 한다.


차갑다.


그의 언행도.

그의 눈빛이나 기운 모든 것이.


“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의 눈썹이 어이없다는 듯 비뚤어졌다.


기어코 실소한 그녀와 더불어 포름도 당황한 듯 보였다.


“예?”


“그래서 당신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까?”


“······.”


“그 아이들도 말한 적이 없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과 주장, 무엇하나 그들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그렇다 단정 짓는 건 어떻습니까. 적반하장, 내로남불이 따로 없네요.”


“내로······ 뭐요?”


“있습니다, 그런 게.”


알게 모를 말을 내뱉는가 싶으면 그는 남은 차를 입에 털어버렸다.


하지만 둘의 기세를 싹 거두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만하면 아이들과의 첫 대면이 어떻게 이뤄진 건지, 경위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맥없이 말린 게 어쩐지 분한 기분이었다.


그레이는 거의 식은 차를 재차 내오라 할 생각도 못 하고 목을 축였다.


“······처음엔 어느 택배기사가 흘린 말 때문이었습니다.”


“택배기사?”


“예. 검은 제복의 검은 모자를 썼었네요. 외모까진 기억하지 못하지만.”


백묘와 상반된 색.


들은 적도 없다.


“그가 어떻게 말했길래.”


“정원에서 산책 중인데 무턱대고 어떤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더니······”


─아, 이런. 잘 못 찾아온 모양이네.


셋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루 역시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서요?”


“배송지가 잘 못 되었다고 하던가, 근데 누더기 옷차림의 아이라니 이상하잖아요. 처음엔 개인정보라나 뭐라나, 어쨌든 제 영지라 설득해서 겨우 확인한 주소도 이상하고.”


어쩐지 비슷한 의뢰를 맡은 기억이 있지만 언급하진 않았다.


“그리고요?”


“그리고······ 의뢰서를 슬쩍 훔쳐봤는데 배송의뢰품이 아이인 거예요. 그것도 콕 집어 신분 미상의 아이.”


포름과 하루가 동시에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쳤다.


설마하니 그런 흔해 빠진 함정에 당한 건가 싶으면


“의심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그 기사가 떠날 때 몰래 미행했죠? 응징해줄 생각으로요.”


확인받지 않아도 알아서 자백했다.


응징이 지닌 개념이 그런 식이었던가.


분명 검은 택배기사란 자가 고의로 보여준 의뢰서 외에, 품속에는 또 한 장의 의뢰서가 존재했을 것이다.


성녀라고 적힌 종이가.


성녀란 죄다 이런 4차원성을 계승 받는 건지 연구심이 싹튼다.


아무리 그레이라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짐작했는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곤 애꿎은 차만 홀짝 마셔댔다.


하루의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곤 여전히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 계기가 어떻건 이후에 자의가 섞이게 되면 그건 완전한 남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 말을 듣던 그레이가 찻잔에 입을 댄 채 그대로 고정되었다.


살며시 미간에 주름이 졌다.


뭔가 깊이 고심하던 하루가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름. 제가 의뢰를 마치고 오기 전까지 그레이를 예의주시하세요.”


“예?”


“의뢰자가 직접 힘을 써서야, 그만큼 의뢰비를 삭감할 동기를 주는 일이나 다름없잖습니까.”


“하루님 저를 어떻게 보시고······”


“이미 완전히 적자보고 하는 짓입니다.”


포름이 반쯤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하루에게 씌었던 콩깍지가 조금 벗겨지려던 순간이다.


“제가 그를 그대로 둘 거라는 생각인가요?”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문고리를 잡으려던 하루의 손이 멈칫했다.


다시 뒤돌아 응시하면 그녀답지 않게 다시 긴장했다.


“이제 와 도움을 청하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 의뢰의 범위 안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방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하루가 다시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아, 그래도 이건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 좀 알려주시죠.”


방금의 대사가 무색하게 뻔뻔스럽다.


그레이는 그 태도가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 분했다.


그래도 용케 말해주는 게 그녀의 진심이라고 여겼다.


문을 나가려 하면 곧바로 아까의 측근 안내자가 보인 바람에 잠시 움찔했다.


하루가 먼저 목례하니 안내자 또한 같은 예를 취했다.


덜컹


하루가 떠난 방은 몇 번의 달그락거림, 괜히 목을 가다듬는 소리 외에 정적만 감돌았다.


곧 그레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받았는지 발끈했다.


“대체 뭔가요 저 무례한 이는!”


─칠성교와 내통하고 있는 수단이 따로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까지 제 정체는 굳이 발설하지 마세요.


하루가 당부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택배기사지.”


“······!”


포름의 답에 한층 더 욱하려던 그레이는 용케 버틴 화를 숨으로 토했다.


다시 진정하는 모습의 그레이에게 포름은 아련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들이 그런 수모를 당할 일은 이제 없네.”


“······전쟁에 예고는 없어요.”


알고 있기에 더욱 그녀에게 전해야 했다.


“근위대장들이 이어받는 검에 대해 혹시 알고 있나?”


“갑자기 무슨 검이요?”


“성녀의 축복을 받은 검 말일세.”


축복받은 영웅들과 달리 일개 인간이었던 근위대장들이 감히 나란히 설 수 있던 이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반신반의했지만 역시 성녀였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검에 담긴 의미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그게 어쨌단 거죠.”


“검은 아직도 내가 지니고 있네.”


성녀의 행방이 묘연할 때, 그 관계의 단절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부식된 검.


“대대로 이어진 거라면 현 근위대장에게 넘기면 될 것 아닌가요.”


“녹슨 채로 넘기면 새겨진 글귀를 못 알아보지 않나.”


「genus, claritate, futurae.」


후손, 찬란함, 미래의 단어가 새겨진 그것은 검을 지닌 자의 희생도 상징했다.


검이 빛을 발하는 만큼 더욱 찬란한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당신도 그 택배기사하고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지켜내기만 하면 된다고?”


“된다고, 가 아니야. 우린 이미 한 번 그렇게 했네.”


한때 검을 치켜든 이들은 전쟁의 목적을 망각함과 동시에 바랐다.


이 앞으로 피가 흩뿌려지지 않기를.


더 이상의 미래에 희생이 없기를.


어딘가에서 속으로 내뱉는 말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돌연 종전은 다가온 것이다.


그녀 또한 그때의 바람을 이뤄낸 이들 중 하나였다.


“······그랬죠.”


“하물며 그 의미를 아는 성녀가 그런 종교 따위하고······”


“성녀는 그래야 하는 건가요. 성녀가 종교와 연관되었다는 얘기, 딱히 드물지도 않잖아요.”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나!”


포름의 호통에 두통이 느껴졌다.


그레이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고스란히 감쌌다.


지금에야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수도자들의 감언이설에 매혹된 자신을 떠올리니 조소가 절로 나왔다.


그들은 제 가슴에 구멍을 내고 과거를 속속들이 끄집어냈다.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알 수 없는 힘이라도 실린 듯 정신을 차려보면, 그들의 부탁대로 그곳에 있었다.


아니, 그 때문이라기보다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힘을 기르게 해줘야 한다고.


과거에 뼈저린 경험이 뒷받침해주듯 생각은 굳은 다짐이 되었다.


입을 다문 그녀가 손바닥으로 이마만 싸맨 채 적막을 유지했다.


포름은 감히 대표씩이나 되는 귀족이 서툰 판단을 했으리라고는 여전히 생각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나.”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요.”


“자네 끝까지······”


“정말입니다.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섞여 있었으니까. 천계의 말인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글쎄요, 어쩌면 그들의 성서라는 걸지도 모르죠.”


“성서? 정말 그 칠성교인가 하는 놈들인 건가.”


“그래도 그게 세뇌의 술식을 지니진 않았습니다. 순전히······ 설득당한 거죠.”


시무룩해진 그레이와 달리 포름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하루 역시 축복받은 이라면, 그들과의 접점은 위험하리라.


함께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했다.


둘 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냅다 한숨만 내던졌다.


#


하루는 역시 귀족 대표의 영지라며 감탄했다.


웬만한 대도시가 아니고서야 찾기 힘든 통신구 가게를 찾아냈다.


‘CCTV가 나온 시점에서 개인 통신구가 나올 법도 한데.’


따위의 말을 속으로 하고 있으면 상대방 쪽에서 응답해왔다.


[백묘 제2 지부입니다.]


하루는 방금까지 정해놓은 생각을 재차 꺼내기 망설였다.


하지만 역시 몇 번을 검토해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능력의 사용이 꺼려지긴 해도 단시간의 이용은 그녀도 익힐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혼자 수긍하면 하루는 입술을 뗐다.


“하루입니다. 필을 좀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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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8. 너만은 널 21.08.04 73 3 12쪽
68 #67. 만회했으려나 21.08.03 75 3 12쪽
67 #66. 전조 21.08.02 78 4 12쪽
66 #65. 정말 좋은 구경했네 21.07.30 77 4 12쪽
65 #64. 단장 명령! 21.07.29 74 3 13쪽
64 #63. 형님뿐입니다! 21.07.28 77 3 12쪽
63 #62. 정말 미친놈이라고 21.07.27 83 3 13쪽
62 #61. 답답하진 않네 21.07.26 81 4 12쪽
61 #60. 이해, 조화······ 대화 21.07.23 87 4 12쪽
60 #59. 드디어 널 만날 수 있어 21.07.22 81 4 12쪽
59 #58. 일단 먹고 +2 21.07.21 87 4 12쪽
58 #57. 적당한 보험 정도로 21.07.20 80 4 12쪽
57 #56. 회유······요? 21.07.19 86 3 12쪽
56 #55. 좋지 않습니까 21.07.16 87 4 12쪽
55 #54. 스미스 정비소 21.07.15 83 3 12쪽
54 #53. 나는 반반 21.07.14 85 4 13쪽
53 #52. 저게 왕이라니 21.07.13 89 3 12쪽
52 #51. 차세대에 맡기겠습니다 21.07.12 96 5 12쪽
51 #50. 검은 아저씨 21.07.09 90 4 13쪽
50 #49. 당신이었군요 21.07.08 94 4 13쪽
49 #48. 자유도시 21.07.07 93 4 13쪽
48 #47.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21.07.06 94 5 12쪽
47 #46. 모든 걸 배송해드립니다 21.07.05 100 4 12쪽
46 #45. 특권이란 21.07.02 98 4 12쪽
45 #40. 그런 녀석이었지 21.07.01 103 4 12쪽
44 #44. 당신, 용사입니까 21.07.01 110 4 12쪽
43 #43. 나갈 수 있어 21.06.30 110 3 13쪽
» #42. 성녀는 그래야 하는 건가요 21.06.29 117 4 13쪽
41 #41. 끝까지 모른다고 해줘 21.06.28 107 4 12쪽
40 #39. 흥미가 있습니까 21.06.25 11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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