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수호자의 귀환(3)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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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수호자의 귀환(3)
쏴아아아-
빗속을 뚫고, 흰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의 창문에는 왕이 된 지크가 앉아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디트리히가 정중하게 말했다. 마차가 멈추고, 흰 옷을 입은 왕이 계단을 딛고 내렸다. 람세스가 커다란 일산을 받쳤다.
"......"
지크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감옥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톨스토아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폐하!"
경비대장이 감옥 창살 뒤에서 엎드렸다. 지크가 열린 감옥 문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갔다. 지크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본 경비병들이 황송해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쪽으로..."
경비대장이 앞장섰다. 지하로 2층을 더 내려가자, 저 복도 끝에서 두터운 돌문이 나타났다.
"저기구나."
"그렇사옵니다."
"모두 물러가라."
경비병들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다른 감옥들을 모두 비운 듯, 주변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디트리히가 감옥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가 문을 열었다.
"어억..."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컴컴한 감옥 안에서 끔찍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디트리히가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람세스가 혹시 왕의 몸에 뭐가 닿을까 봐 눈을 치켜떴다.
"폐하..."
목쉰 소리가 감옥 안에서 울렸다. 지크가 그만 한숨을 쉬었다.
"대원수."
피투성이가 된 톨스토아가 저만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선 돌바닥을 빙 둘러싸고 검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은 지옥의 틈새처럼 악취를 뿜어 댔다.
"폐하!" 저만치서 울부짖음이 들렸다. 디트리히가 횃불을 비추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그을린 가족들이었다.
람세스가 의자를 가져왔다. 지크가 앉았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엎드렸다. 거기도 검은 원이 그려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검은 원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엄청나게 깊은 절벽이 호를 그리고 있었다. 지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도 없이 깊었다.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 지크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디트리히가 물었다.
"다리를 내릴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트리히가 도르래를 돌렸다. 위에서 다리가 내려왔다. 톨스토아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원수."
지크가 손짓했다. 톨스토아가 부들부들 떨며 일어났다. 그가 네 발로 다리를 건넜다.
"폐하..."
엉망진창이 된 톨스토아의 얼굴에 눈물이 덮였다. 지크가 미안함에 이마를 쓸었다.
"그대의 죄를 알고 있겠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채찍을 얼마나 맞았는지, 가죽이 쓸려서 속살이 다 드러난 등을 내보이며 그가 울었다.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대원수가 되어 처형을 시킬 수는 없지. 그러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소. 그렇지 않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의 명예에는 그러겠소. 하지만 그대의 신변에는 그럴 수 없소."
그가 손을 저었다.
"디트리히, 네가 데려가서 조용히 처리해라. 가족들도 함께."
디트리히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톨스토아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혼자 실실거리고 웃었다. 자기도 자기가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될 대로 되라. 이젠 지크가 알아서 하겠지 뭐.
"......"
디트리히가 톨스토아가 갇힌 상자 속을 똑똑 두드렸다. 웃음소리가 나서 걱정이 된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웃어젖혔다. 뭐 웃는다고 죽이겠는가.
"대원수님."
그가 나직하게 불렀다.
"괜찮다."
"정말입니까?"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폐하께서 기회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기회?"
"이제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얘기하시라고... 가족들은 책임지시겠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지크가 날 안 믿는구나. 갑자기 정신이 버뜩 들었다.
"반드시 내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톨스토아가 외쳤다. "애들은 무사히 있겠지?"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서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아발론은 아니지만..."
"난 진국에 어떻게 가는 거냐?"
"카르텔의 잔당들이 수송해 줄 겁니다. 저희가 준비는 다 해 놨습니다."
갑자기 그의 마음에 불안감이 일었다.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디트리히가 부인했다. "절대 아닙니다."
"으으..." 그제서야 아픔을 느낀 톨스토아가 뒤척였다. "몇 명이나 수송하고 있는 거냐?"
"오늘은 그만 얘기하시지요. 누가 듣습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상자의 안에 갇힌 톨스토아가 갑자기 홀로 남았다. 그가 외로움과 추위에 몸을 떨었다.
"여보..."
그가 행복하고 따뜻했던 지난 날들을 생각했다. 이태껏 한 번도 시련다운 시련을 겪은 적 없었다. 그렇게 대원수까지 올랐고, 그는 자기가 처세의 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하아.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진국에서 어떻게든 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들의 목숨은 없어.
상자 안의 톨스토아는 몇 번의 싸움 끝에 카르텔의 손에 떨어졌다. 팔콘기사단은 몇 번 싸우다가 상자를 뺏기는 척하고 도망쳤다. 카르텔은 그 상자 안에 아주 진기한 마약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팔콘기사단이 이 상자를 비밀리에 남쪽으로 수송하고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카르텔 대장에게 보고했다. "며칠 전부터 디트리히가 자기가 쓸 마약을 남쪽에 숨겨둔다는 소문이 돌았고요. 주변 마을을 깨끗히 소개하는 것도 저희가 직접 봤으니 틀림없습니다."
"근데 냄새는 아닌데?"
"팔콘기사단이 죽어라고 쫓아왔으니 하여튼 중요한 겁니다."
"디트리히가 직접 있진 않고?"
"있었으면 여기 못 오고 다 죽었죠. 헤헤."
"멍청한 새끼들이." 대장이 두꺼운 철제 상자를 발로 툭툭 찼다. "도대체 이걸 어디로 숨기고 있었을까? 그 창고만 털면 한 몫 잡는 건데 말야. 범대인이 좋아했을 텐데."
"그러게요. 일단 이것부터 열어 보시죠."
사람들이 좋아하며 상자를 열었다.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끼이익, 하고 상자가 열렸다.
"뭐야?"
사람들이 경악했다. 톨스토아가 거대한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온 몸을 감은 붕대가 피로 젖어 있었고, 파리한 얼굴은 잿빛이었다. 마약을 먹은 듯 목과 눈 주변은 벌갰다.
"이건..." 마른침을 삼켰다. "톨스토아 대원수 아니야?"
팔콘기사단이 왜 톨스토아를 옮기고 있었던 거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 마을 사람들이 마약이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야?" 대장이 부하들을 다그쳤다. "뭐야? 톨스토아는 죽은 거 아니었어?"
"저희도 모, 모르겠습..."
"멍청한 새끼들아!" 대장이 쾅, 하고 주먹을 내리쳤다. 부하들이 쿠당탕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이 새낄 여기 데려오면 어떡해! 빨리 약만 챙겨서 떠야 되는데- 아오. 미치겠네."
대장이 안절부절 못했다. "범대인한테 보고해야겠어! 모두 여기 죽은 듯이 숨어 있어라. 내가 예리코에 다녀올 테니까!"
예리코에서 대장을 기다리고 있는 건 거대한 흑인이었다.
"무슨 일이오?"
흑인이 물었다. "짐은 어디 있소? 난 짐만 받으러 왔는데."
"큰일 났소." 대장이 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 말씀하신 대로 약, 아니아니 짐. 짐을 찾으러 갔는데."
"왜요? 도둑 들었소?"
"아니 도둑이 아니고!" 대장이 손가락으로 마호가니 바에 글씨를 썼다.
톨스토아.
"그래요?"
우사이막스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입은 바텐더 옷에서 배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대장이 태연한 우사이막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놈은 무슨 군인 배지를 저렇게 달았대. 원래 군인이었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가 씩 웃었다.
- 지크가 말한 대로 됐군.
"왜 웃어요?"
기존에 간첩 조직을 이끌던 왕손록과의 관계가 틀어진 탓에, 범려는 진국과 이다볼 왕국의 연결책에 우사이막스가 끼어들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우사이막스는 진국에 숨어든 간첩 조직의 수장이었다. 이제 그는 범려에게도, 디트리히에게도 약간은 어느 편인지 아리송한 존재였다.
"뭐... 본사에 말해 보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데 원래 주문했던 것보다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 그래요?"
"네. 그게 바람이 잘 통할 거에요." 우사이막스가 얼음을 부수며 말했다. "내가 잘 말해 볼 테니까 걱정 마요. 물건은 일단 위로 올려요."
"그럴까요?" 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네!"
"아이구. 예리코에 대장님처럼 믿을 만한 짐꾼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우사이막스가 그에게 서비스로 칵테일 한 잔을 말아주었다.
"어우. 그렇죠 그렇죠!" 총 맞을 각오를 하고 온 대장의 얼굴이 확 펴졌다.
"빨리 짐 싣고 와요. 싣고 올 때쯤에는 내가 본사 갔다 올 테니까."
"네네! 알았습니다." 술을 쭉 마신 대장이 급히 바를 나갔다. 이 바에서는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간다.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
카르텔 대장이 문을 나서자, 세네 명의 남자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들이 모든 창문을 닫고 문을 걸어잠갔다.
한쪽 구석에 더러운 망토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던 스트라울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에 앉았다.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팔콘기사단이었다.
"잘 됐네."
"그래요."
우사이막스가 스트라울을 보았다. 스트라울이 술을 죽 마셨다.
"어우 맛있네."
"사과를 섞으니까 맛있지?"
"그럼 주문한 대로 제작해요?"
"그래."
스트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은 걸릴 것 같애요."
"그래. 호랑이한테 안부 전해 주고."
"네. 안녕히 계세요."
스트라울이 사라졌다.
뿌우우우-
눈부신 흰 옷을 입은 범려를 봤다면, 지크는 옷을 차라리 진국에서 주문할걸,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범려의 도포는 구천의 명령으로 마감마다 보석을 달았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부석거리며 햇빛을 산산히 부수었다.
- 어우 무거워.
보석도 돌은 돌이라, 개선식 내내 옷을 입어야 했던 범려는 어깨가 빠질 듯했다. 마침내 영락궁의 아홉 번째 문지방을 넘자, 그가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시오." 구천이 저 멀리서 말했다. 그 말이 태감들의 입을 타고 퍼졌다.
범려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범려를 위해 구천은 푹신한 양탄자를 깔아 놓았다. 붉은 카페트 위에 선 범려가 황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구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신의 승전을 들은 영락궁의 하늘이 드높구나..." 구천 옆에 선 태감 동순이 교지를 읇기 시작했다. 범려가 졸려 오는 눈을 겨우 부릅떴다.
구천의 앞에 엎드려 어마어마한 녹봉과 식읍을 하사받고, 구천의 칭찬을 30분이나 들은 뒤, 모든 대신들보다 앞에 서서 세 번 절을 올리는 개선식이 끝났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지만 정말 돈이 아까웠다.
바로 화려한 연회가 이어졌다. 범려에게 술을 한 잔이라도 받으려는 대신들이 줄을 섰다. 범려 옆에 앉은 주지서와 왕손록은 눈에 띄게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 주지서가 결국 밭은 웃음을 쳤다. 그걸 들은 대신들이 눈치를 보며 조금 물러섰다. 구천이 들으란 듯이 혀를 찼다.
"쯧쯧. 범대인!"
구천이 불렀다. 범려가 무거운 옷을 질질 끌고 옥좌 앞에 나아갔다. 구천이 웃으며 손짓했다. "옷은 벗어 두시오."
"예, 폐하."
범려가 드디어 옷을 벗었다. 어깨가 날아갈 것 같았다.
"정말 고생 많으셨소. 선왕의 원수를 갚으셨소!"
선왕 합려를 죽인 이용이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범려가 들으란 듯 길게 읍했다. "이렇게 저를 환영해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이 당연한 일이지." 구천이 웃으며 그에게 술잔에 든 물을 따라주었다. 그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범려가 단번에 들이켰다. 머리가 아주 조금 맑아졌다.
"범대인이 이렇게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것 잘 알지만 좀 참으시오. 그래야 주지서와 왕손록이 좀 기가 죽지 않겠소."
"예." 범려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지크가 왕이 되고 나서, 예리코에 기어드는 게 더 어려워졌다지?"
"네, 하지만 괜찮사옵니다." 범려가 웃었다. "그 쪽에 세작을 박아 두었사옵니다."
"몇 급이오?"
"대령이옵니다."
"수도방위군이오? 아니면 이베리아 전략군?"
범려가 살짝 웃었다. "팔콘기사단이옵니다."
우사이막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려는 그 자가 우사이막스인 줄은 모르고, 그냥 팔콘기사단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간첩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왕손록이 그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사이막스는 외줄 타는 광대처럼 그걸 잘 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구천이 눈썹을 꿈틀하며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범대인이오! 대단하구려!"
"감사하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시급을 다투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들었던지라 이제야 말씀을 올리옵니다."
"뭐요?"
범려가 구천에게 귓속말을 했다. 구천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가셨다.
"음."
그가 범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일어섰다. 범려가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연회장을 나갔다. 이용과 동순이 그림자처럼 뒤를 좇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얼마짜리요-"
구천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주지서의 불만섞인 소리가 높아졌다. 구천이 들은 척도 않고 정자로 향했다. 둘이 정자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톨스토아가?"
"네. 디트리히가 도대체 왜 톨스토아를 남쪽으로 옮기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지크는 톨스토아를 죽이라고 했다면서. 톨스토아가 도망가다가 걸렸다는 게 어제의 보고 아니었소?"
"네. 그런데 디트리히가 톨스토아를 빼낸 모양입니다."
"흠." 구천이 긴 수염을 쓸었다. "불쌍해서 도와 주려고 했나? 그 놈은 그런 성격이라."
"아닐 수도 있습니다." 범려가 고개를 저었다. "놈을 진국에 들이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그 놈이 궁에 뿌리를 내리면 뽑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구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데려와서 심문해야 하지 않겠소? 살려줄지 어떻게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범려가 일어났다. "알겠사옵니다. 당장 톨스토아를 압송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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