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벽을 사이에 두고(4)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화-벽을 사이에 두고(4)
에네레실은 오늘도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야채를 볶아 부드럽게 만들고, 카레 가루를 넣은 스프에 끓여서 맛을 깊게 우려낸다.
불 위에 올라간 냄비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에네레실이 맛을 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불을 껐다. 괜찮네. 지크가 좋아하겠어.
벌써 10월, 이다볼 왕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이미 겨울이었다. 흐린 하늘은 해를 보여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낡은 옷을 껴입고 불가에 붙어 앉았다. 문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소리를 쳤다. “카레 냄새다!”
이베리아는 야채를 재배하기 쉽지 않은 황무지여서, 사람들은 밀가루로 만든 빵에 생선이나 시금치를 얹어 주식으로 먹었다. 독한 술과 향신료로 감칠맛을 주는 것이 이 황량한 툰드라 음식의 유일한 사치였다.
하지만 에네레실은 풍부한 맛과 향이 나는 음식을 좋아했다. 그녀는 항구에서 야채를 구했다. 정성들여 깨끗이 씻고 손질한 후 불에 길들여 부드럽게 만들고, 강황과 야채가 완전히 섞여 하나가 될 때까지 뭉근히 끓인다.
그렇게 카레가 완성되었다. 에네레실이 문가로 나갔다. 아이들이 일제 고개를 홱 돌렸다. 카레가 담긴 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아줌마!”
“음음!”
아줌마 아니야, 하고 말하고 싶은데. 에네레실이 아이들에게 수저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삽시간에 카레를 먹어치웠다.
-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트리히의 아이는 아들이든 딸이든 예쁠 텐데 말이야.
애들이 짤랑거리며 그릇에 수저를 떨어뜨렸다. 에네레실이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다르게 기쁘면 웃었고 슬프면 울었다. 저편 불가에 앉은 어른들은 늘 무표정한데 말이다.
- 지크가 오겠어.
에네레실이 일어섰다. 주방에 돌아오니 당근이 좀 남았다. 그녀가 생당근을 씹으며 생각했다. 당근 케익을 만들어야겠다. 지크가 좋아하려나?
딸깍 하고 문이 열렸다.
“누나.”
“음음!”
에네레실이 깜짝 놀랐다. 그녀가 다급하게 수첩을 폈다. <지크!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몸서리를 쳤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지크의 눈빛은 평온했고, 어깨는 긴장이 풀려 내려가 있었다. 수척한 뺨도 부드럽게 풀려 있다.
<왜 그래. 응?>
“누나.”
지크가 에네레실을 보았다. “잘 지냈어? 카레 했나 보네. 여기는 야채 없잖아.”
<돈 주고 샀지. 저녁 먹자. 근데 너...>
지크가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로 갔다. 손 씻는 소리가 났다. “고마워, 누나.”
- 갑자기 왜 저러지?
에네레실이 기겁했다. <너,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돼!>
“무슨 소리야.” 지크가 하하 웃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갑자기 차분해지니까 무섭잖아.>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였어?”
<그냥... 웃지도 않으니까.>
지크가 다시 웃었다. 그가 에네레실의 손을 잡았다. “밥이나 먹자. 출근하려면 먹어야지.”
손이 따뜻하다. 에네레실의 미간이 풀렸다.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군 훈련소로 출근한 지크는 병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지크의 얼굴을 본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와 철책을 흔들며 소리를 쳤다. “지크! 지크! 지크!”
지크가 깜짝 놀랐다.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저를 다 아나요?”
모부시 대령이 하하 웃었다. “폐하께서 소개를 잘 해주고 가셨거든.”
“총합 몇 명이에요?”
“한 40만 명 정도? 일단 사령관님부터 만나 보자고.”
지크는 병사들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사령실로 향했다. 벽돌을 얹어 지은 2층짜리 건물 사무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사람이 역광을 받고 앉아 있었다.
“디트리히.”
지크가 놀랐다. “여기까지?”
디트리히가 일어섰다. 그의 가슴에 3급 장군인 준장의 약장이 빛났다. “폐하께서 이베리아 전략군을 별도 조직으로 만드셨어.”
“네가 책임자구나.”
지크가 탄성을 질렀다. “그럼, 너 이제 사령관이네. 곧 2급 달겠구나.”
“책임자는 너야. 나는 그냥 명패만 얹는 거고.”
디트리히가 웃었다. “난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으니까 말이야. 탕리 장군님과 전략작전부도 봐야 하고, 팔콘기사단 일도 해야 해서.”
지크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가 지크의 안색을 살폈다. “왜? 또 뭐가 의심스러워? 아직도 온 세상이 힘을 합쳐서 널 해코지한다고 생각해?”
지크가 웃었다. “난 베르단디 여왕님하곤 달라.”
“그렇지.” 디트리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파에 앉았다. 친구가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폐하가 오셨었다며. 몇 달 전에는 날 그렇게 못 죽여서 안달하시더니, 또 좋게 말하고 가셨나 보던데?”
“맞아. 그 때는 네가 안나를 찾아 야반도주한 것에 엄청나게 실망하셨어.”
지크가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생각이 미친 부분이긴 한데 말이야.”
“말해 봐.”
“왜 폐하는 날 죽이지 않으셨을까? 톨스토아 원수님은 꽉 막힌 분이셔서 날 도와주진 않으셨을 거고. 네 말은 이빨도 안 들어갔을 거고. 그럼 탕리 장군님이 폐하를 설득하신 거야?”
“그래.”
“왜? 탕리 장군이 왜 날 도와?”
“내가 장군님께 정보부의 일을 보고 드리고 있어. 그 대신 장군님이 널 살려주셨어.”
지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위험한 줄타기를 하네. 폐하께서 아시면 널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디트리히가 웃었다. “괜찮아. 탕리 장군은 충신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디트리히가 거느린 팔콘기사단의 정보망은 누구보다 탕리 사령관을 최우선으로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탕리 장군은 유능하고 약삭빠른 전형적인 엘리트 장교였고, 절대 위험한 선을 넘지 않는 온건한 타입이었다.
“왜. 내가 탕리 장군님한테 놀아날까 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엄청난 수완가잖아. 수도방위군에서 승진해서 전략작전부대 사령관까지 겸직하더니, 팔콘기사단까지 은근슬쩍 발을 걸치고. 나하고 무와틸리 장관님이 군자금을 빼돌리는 것도 눈치챘다며.”
“진짜 모범적인 군인이지.”
디트리히가 웃었다. “처세도 잘하고 능력도 있으니. 네가 좀 본받을 필요가 있어. 일을 잘 하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승진하고 잘나갈 수 있다고. 넌 애가 너무 뻣뻣해.”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처세도 잘하고 능력도 있어서 좋겠구나.”
“너도 할 수 있어.”
“난 못하겠어.”
“지금도 잘 하고 있어.”
디트리히가 차를 따라주었다. “누나한테 얘기 들었어. 많이 좋아졌다며. 역시 이베리아로 오기 잘했잖아.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어?”
“나 아픈 적 없어. 그나저나, 너 누나 보러 왔구나?”
친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크가 찻잔을 놓고 킬킬거렸다. 친구가 에네레실이 보고 싶어서 폐하께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친구가 입맛을 다셨다. “야. 뭐가 그렇게 웃겨?”
“근데 난 여기서 뭐 해? 그냥 쉬면 되는 거야?”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야. 신임 소위들에게 전략체계서를 가르쳐. 그럼 소위들이 그 지식을 신병들에게 전파할 거야.”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그러니까 저자 직강이 필요한 거지. 강의는 하루에 네 시간이야. 출병 날까지 너한테 휴일은 없어. 감옥에서 충분히 쉬었으니까 상관없지?”
지크가 놀랐다. “뭐? 네 시간이나 하라구?”
“시험도 쳐야 하고 점수도 다 매겨야 해. 폐하께서 네가 매기시는 점수를 제일 중요하게 보라고 하셨으니까. 그리고 난 한동안 여기 못 오니까 사령관 직무 대행은 네가 해.”
“뭐?” 지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농담하는 거지? 나 혼자 어떻게 다 해?”
“넌 할 수 있어. 넌 천재잖아. 강의야 그냥 머리에 있는 거 읊으면 되고, 시험은 한 번만 보면 되잖아. 나머지 시간에 결재만 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지크가 반항했다. “못 해! 난 중령이야. 사령관 일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준장님하고 대령님들을 내가 어떻게 상대하라고.”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폐하께서 허락하셨어.”
“뭐? 폐하께서?”
디트리히가 일어섰다. “난 바빠서 간다.”
“인수인계 하고 가야지.”
“다 했잖아? 도장 열심히 찍으라니까?”
“너 정말 이럴래?”
디트리히가 사령관의 망토를 둘렀다. 이베리아 전략군의 인장이 그려진 망토였다. 모부시가 문을 열었다.
“야아. 진짜 가는 거야?”
디트리히가 손을 흔들었다. “열심히 해라!”
“야. 잠깐만!”
모부시가 지크에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잘해라.’ 둘이 휑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 큰일 났네. 이거 어쩌지?
- 저 개새끼. 정말 인수인계 하나도 안 하고 갔잖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지크가 가만히 문만 쳐다보았다.
대령 약장을 단 장교가 들어와 그에게 경례를 했다. 여자 장교여서 그런지, 허리 품이 좀 남아서 허리끈을 바싹 조였다.
“지크 쿠아디스 대행님.”
장교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이베리아 전략군 교육대대 노바 대령입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노바 대령이 지크와 눈을 맞췄다. “폐하께서 대행님은 나라의 기둥이니 극진하게 예우하라고 하셨습니다.”
지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이야기를 폐하께서 하셨다구요?”
“네.”
대령이 다시 경례했다. “폐하께서 며칠 전에 다녀가셨습니다. 저희 이베리아 전우들이 대행님의 첫 번째 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대행님을 환영합니다!”
15도 위를 쳐다보는 대령의 오뚝한 콧망울이 자부심에 벌름거렸다.
지크가 노바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기요. 폐하께서 연설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지크가 눈을 가렸다. “말도 안 돼요. 너무 부담스러워요!”
“가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무슨 시간이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회사 하실 시간입니다.”
“네? 무, 무슨 개회사요!”
노바 대령이 깜짝 놀랐다. “못 들으셨습니까? 디트리히 사령관님께서 이베리아 전략군의 창설식 개회사는 대행님이 하실 거라고 하셨는데...”
지크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 40만 명 앞에서 저보고 연설을 하라는 건가요?”
“폐하도 연설의 달인이지 않으십니까? 폐하와 삼촌 간이시니 잘 하실 거라고-”
지크가 펄쩍 뛰었다. “폐하의 삼촌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돌아가신 드라마스 왕자님의 형제 아니십니까?”
지크가 숨을 들이마셨다. “도대체 누가 그래요!”
노바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그러셨습니다. 저희하고 저녁에 술 한 잔 하셨거든요.”
“술이요? 폐하는 올해-”
“여덟 살이시니까 드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죽죽 드시던데요. 나중에는 휠체어 끌면서 군가 부르시고 토하시고 난리도 아니셨습니다.”
“네에?”
“디트리히 사령관님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친구가 그런 중요한 걸 숨기다니 서운하다고... 아, 아닙니다!”
노바가 다시 경례했다.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이 언니...
지크가 노바의 맑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이 언니, 맑다. 정말 맑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왜 당구대를 안 쓰시냐고 대행님을 질책하셨습니다!”
노바가 외쳤다. “저희와 당구를 치셔야 합니다. 이건 폐하의 명령입니다!”
“술 드시고 하신 말이죠?”
“맞습니다!”
“그럼 무시할게요. 술 드시면 거짓말만 하시니까.”
“안 됩니다! 당구대가 아깝습니다! 가난한 조국을 일으키시려 유서 깊은 선왕의 유품까지 팔아 치우신 폐하께오서, 대행님을 위해 손수 당구대를 짓게 하신 그 절절하고 애틋한 심정을-”
“그냥 대령님이 개회사 하시죠.”
“안 됩니다! 사령관님 말씀입니다.”
“저 머리가 좀 아파서요. 대령님이 가셔서-”
노바가 군화굽을 탁 쳤다. “그냥 아프면 아픈가 보다 하시면 됩니다! 군인은 그런 겁니다! 당구를 치라면 치고 연설을 하라면 하는 겁니다!”
“교육대대 대령님 답네요.”
“당장 연단으로 가시죠!”
노바가 외쳤다. “시간 없습니다. 전우들이 대행님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연단 위에 올라선 지크는 말을 잃었다.
연단 아래 도열한 40만 군대, 그 군대가 지크를 향해 미친 듯이 함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지크! 지크! 지크!”
지크가 침을 삼키며 옆을 돌아보았다. 노바 대령이 엄숙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함성이 잦아들었다.
- 무슨 말이든 하자!
“여러분은...”
지크가 정신을 차리려고 무조건 말을 시작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왜 군인이 되셨나요? 소중한 사람을 잃으셨나요? 아니면 출세하고 싶나요? 단순히 월급이 잘 나오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것 뿐인가요?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군인이 꿈이셨나요?”
그가 어렸을 적, 세루크와 앙리를 데리고 진국으로 밀항하려고 애쓰던 어린 자신을 떠올렸다.
“작은 나라의 군인인 건 참 서러운 일이죠. 승리보다 패배가 많고, 나라가 가난하니 월급도 적고요. 나는 왜 좀 더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위기가 싸해진다. 노바가 지크를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도 한땐 그런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제 인생은 제 아버지를 만나고 바뀌었어요. 모든 전술교본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시는 아케메네스 장군님 말입니다.”
아케메네스라는 말을 듣자, 연단 아래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좀 지나친 책임감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조국이 가난한 것, 백성들이 늘 많은 세금에 시달리는 것, 귀족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요. 정작 당신은 야전 사령관이셨으면서 말입니다.”
지크가 자카룸 정글의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있을 아케메네스와 앙리의 무덤을 생각했다. 그의 마음도 조금 따스해졌다.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친아들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다음 전투에서는 다리를 바치셨고, 말년에는 명예와 목숨까지 나라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은 행복했다곤 할 수 없어요. 군인의 인생이란 것이 그렇겠지요.”
지크가 40만의 전우들을 둘러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이유를 갖고 군인이 되었다. 전쟁이 없었다면 다들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포기하지 말라고. 도망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면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고.”
지크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전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인생을 당당히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 제 인생에 의미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것, 정말 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련 앞에서 눈을 똑바로 떠야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더 이상 두려워하고 배고파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부모와 가족을-”
지크가 울먹였다. “부모와 아내와 내 자식들, 친구들과 동생들을 적에게 잃지 않아도 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군사들이 소리를 쳤다. “와아아아아아아!”
지크가 질세라 소리를 쳤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비겁하게 적에게 무릎 꿇거나 부당한 폭력에 고개 돌려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려 하는 사람들! 자기 힘으로 가족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진국의 태자 구천은 죄 없는 우리를 학살한 것도 모자라 일 년에 금화 1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배상금을 갚으려 하면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다 굶어 죽어야 할 것입니다!”
지크가 주먹을 그러쥐고 외쳤다.
“늦게 전에 일어나 싸웁시다! 우리의 목숨,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가족들을 절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빼앗아간 놈들에게 복수합시다. 놈들에게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안겨줍시다!”
“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복수! 복수하자!”
지크가 칼을 뽑아들었다. 그가 외쳤다. “이 칼이 진국놈들의 피로 젖는 그 날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흥분한 지크가 연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울고 있는 맨 앞줄의 병사들과 눈을 맞췄다.
- 어리구나.
대부분 열다섯이나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들이었다. 어렸을 적 지크가 조국을 버렸던 그 나이, 구천의 편에 서서 앞장서 아발론 궁을 무너뜨렸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었다.
- 이 애들을 죽게 해서는 안 돼. 실망시켜선 안 돼!
-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만 해!
지크가 외쳤다. “싸우자! 가자!”
“와아아아아!”
“지크! 지크!”
“복수하자! 복수하자!”
죽은 가족 생각에 흥분한 군인들이 거대한 목소리의 파도를 지크에게 뱉어 냈다.
“이야아아아아아!”
지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참아 왔던 울분과 분노를 고함으로 뱉어 냈다. 사람들도 지크와 함께 괴성을 질렀다. 수많은 목소리를 뚫고, 뒤쪽 중앙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외쳤다. “지크 왕자님!” “지크 왕자님!”
“왕자라고?”
“지크가 왕자야?”
하지만 완전히 흥분한 지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진국에게 당한 분노와 울분으로 머리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크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복수의 그날을 위해! 모두 끝까지 나와 함께하자!”
“와아아아아아!”
40만 이베리아 전략군의 함성이 천지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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