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마지막 왕자(10)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1화-마지막 왕자(10)
12월 21일 새벽 3시.
-살기다.
한밤중, 드라마스 왕자는 잠에서 벌떡 깨어 일어났다. 드라마스는 요즘 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케메네스와 의논했던 것보다 유폐가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스는 숨을 죽이고 살기를 살폈다. 타타타타, 하고 발소리가 난다. 조용히 달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울타리 밖이 아비규환이다.
드라마스는 벌떡 일어나 옆에 걸어둔 군복을 입었다.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찬 칼을 그러쥐었다. 아르사메스 왕이 그에게 준 단검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하는 함성이 들린다. 비명 소리도 들린다. 드라마스가 몸을 떨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일까? 율리우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케메네스는? 베르단디는? 지크는?
내 아들. 내 아들 오스카르는 무사할까?
드라마스가 턱을 악물고 침실에서 뛰쳐 나왔다. 그가 계단을 달려내려와 1층으로 갔다.
“누구냐!”
드라마스가 꼭 잠긴 침궁의 로비에서 소리쳤다. “어디 들어와 봐라. 내 두 조각을 내 주마!”
문 뒤에서 비명소리와 칼 부딪는 소리가 죽은 듯이 멈췄다. 저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발소리가 들렸다. 침궁의 문이 벌컥 열렸다. 횃불을 든 사내들이 우루루 로비로 몰려들었다.
“역적 드라마스 왕자!”
궁내 경비군이다. 율리우스가 보냈구나.
드라마스가 입술을 씹으며 칼을 고쳐 쥐었다.
“태자 전하의 명이다. 역적 드라마스는 얌전히 항복해라!”
드라마스가 우레처럼 고함을 질렀다. “하하하! 율리우스가 날 죽이려 하다니, 은혜도 모르는 자로구나!”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웃기지 마라!”
드라마스가 하, 하고 웃었다.
“내가 죽어 궁이 편안하다면 죽어야겠지. 하지만 설마 우리나라 군사들의 손에 죽을 줄은 몰랐구나!”
드라마스가 울먹였다. “아케메네스 대령님께 안부 전해 다오!”
“이야아아아아!”
경비대 한 무리가 덤벼들었다. 드라마스가 앞으로 내달렸다.
율리우스는 흰 태자복에 피를 가득 묻힌 채로 계단을 걸어올랐다. 복도에 도착하자, 그가 손짓했다.
“청소하라!”
한 무리의 경비대가 그를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복도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영문을 모르고 자고 있던 시녀들과 어린 청소부들이 저항도 못하고 경비대의 칼에 맞아 죽었다.
“끝났습니다.”
율리우스가 가만가만 복도를 걸었다. 복도 맨 끝에 화려한 문을 벌컥 열었다. 시종장이 기겁을 했다.
“율리우스 왕자님!”
율리우스가 도끼를 들어올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긴 폐하의 침실입니다!”
“나는 도끼가 편해서.”
율리우스가 도끼를 찍어 버렸다. 어깨에 도끼가 박힌 시종장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시녀들과 시종들이 비명을 질렀다.
“시끄럽다!” 율리우스가 소리를 질렀다. 경비대가 그들에게 칼질을 했다. 사방이 금방 조용해졌다.
“흠흠.”
율리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가 피범벅이 된 계단을 올랐다. 아르사메스 왕의 분노가 장막 너머까지 느껴졌다. 율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형님! 선물입니다.”
율리우스가 아르사메스의 가슴에 피범벅이 된 것을 던졌다.
“드라마스입니다! 보세요. 드라마스입니다!”
그것은 드라마스의 머리였다.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진 드라마스의 얼굴이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다.
아르사메스 왕이 헉헉대며 눈물을 흘렸다.
“드... 라...”
“말을 할 수 있다더니 진짜였군!”
율리우스가 드라마스의 머리를 저 멀리 던졌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아르사메스가 입술을 떨었다.
“내... 아... 들!”
율리우스가 아르사메스의 멱살을 잡았다. “뭐?”
“묻... 어... 줘!”
“안 될 소리지! 저 놈은 역적이다. 드라마스의 시체는 들개들의 먹이가 될 거야.”
아르사메스 왕의 어깨가 떨렸다. 왕의 눈에서 눈물이 샘솟았다. 율리우스가 피범벅이 된 왕의 침상에 걸터앉았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아들이 있었어. 첫째 아들은 당신이 젖도 먹이기 전에 죽였고, 둘째 아들은 당신이 일으킨 전쟁에서 죽었지.”
아르사메스 왕이 흐느꼈다. “묻... 어...”
“아케메네스가 그러더구만! 당신을 설득해서 수도방위군을 물리게 하라고 말이야.”
“안... 돼.”
율리우스가 킬킬거렸다. “나도 알아! 당신을 설득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내가 태자 자리를 드라마스에게 주는 거지!”
율리우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 난 다 알고 있었어. 아케메네스는 나를 왕으로 세우고 드라마스의 허수아비로 삼을 생각이야. 라르트망과 바우돌리노는 모두 드라마스를 지지하지. 그런데 당신이 베르단디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아케메네스의 계획을 망쳤어! 그건 감사하게 생각해. 정말로!”
“율...”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이제 드라마스가 죽었으니, 왕이 될 사람은 베르단디와 나 뿐이야! 하지만 베르단디는 왕 감이 아니야. 당신도 알겠지!”
아르사메스가 율리우스를 노려보았다. “멍... 청... 한!”
“이제 아케메네스는 나를 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이 반란은 머지않아 진압될 거야. 아케메네스가 있으니까! 베르단디는 감히 아케메네스를 죽일 수 없어. 군이 반란을 일으킬 테니 말이야! 내 계산이 정확하지? 응?”
아르사메스 왕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반박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 도... 넌...”
율리우스가 작은 단검을 쳐들었다.
“난 네 아들을 죽였지. 그리고 네 무능한 딸이 왕이 되게 할 거야. 이제 네 나라는 망하겠지. 그리고 내 손으로 내 아내와 큰애의 복수를 할 거야!”
“율...리우스!”
아르사메스 왕이 헉헉거렸다. “늦... 었... 다!”
“뭐가 늦어? 드라마스가 당신을 죽이고, 내가 드라마스를 죽인 걸로 꾸미면 다 해결돼! 자. 보이지? 내가 당신에게 준 당신의 태자 즉위식 선물이야. 당신이 드라마스에게 준 단검이야!”
왕이 입술을 떨었다. “역... 적!”
“내가 역적이라고!”
율리우스가 웃어젖혔다. “진 놈이 역적이고, 이긴 놈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거야! 저 세상에서 잘 봐라. 누가 역적이 되는지!”
그가 단검을 꽂아 넣었다.
12월 21일 오전 7시.
“와아아아아아아!”
베르단디의 수도방위군이 아발론 궁의 내벽에 도착했다. 군이 고함을 지르며 궁의 문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쿵, 쿵 하는 소리에 궁 전체가 울렸다.
바삐 움직이고 있는 아케메네스의 휠체어 바퀴가 벌벌 떨렸다. 헌병대장과 천 명의 헌병대가 다 죽도록 태자는 교지를 갖다 주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태자 전하!”
아케메네스가 쉰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태자 전하! 어디 계십니까! 전하!”
아케메네스가 계단에 도착했다. 장교가 아케메네스를 업었다. 아케메네스가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분위기가 의아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케메네스가 기겁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사방이 피범벅이었다. 어린 청소부들과 시녀들이 칼을 맞고 넘어져 있었다. 오렌지빛의 벽에 산산히 흩어진 피가 새벽 햇빛에 창백하게 빛났다. 아케메네스가 장교를 닦달했다.
“폐하께 가자! 빨리! 뛰어라! 뛰어!”
아케메네스를 업은 장교가 뛰었다. 시체와 피가 너무 많아서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아케메네스가 몇 번이고 닦달했다.
장교가 무엄하게도 국왕의 침실 문을 쾅 하고 걷어찼다. 피냄새가 진동했다.
“폐하!”
아케메네스가 울부짖었다. “폐하! 폐하께 가자!”
장교가 장막을 걷었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폐하!”
“폐하!”
아케메네스가 장교의 어깨를 치며 울었다. 아르사메스 왕이 눈을 치뜨고 입을 벌린 채 죽어 있었다. 피에 젖은 그의 가슴에 드라마스의 단검이 빛났다.
“폐하... 폐하!”
아케메네스가 부르르 떨었다.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폐하. 노신이 잘못했사옵니다!”
아케메네스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폐하!”
장교의 어깨가 눈물로 젖었다. 장교가 눈물을 훔치며 아케메네스를 추켜올렸다.
“대원수님. 그만 우십시오! 이제 어떻게 하지요?”
장교가 울먹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요? 어디로 가지요?”
“다 끝났다! 이젠 베르단디가 와서 우릴 다 죽이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도망치셔야지요.”
“여기서 죽으련다. 폐하를 지키지 못했으니 여기서 죽으련다! 날 내려놓아라!”
“안 됩니다!”
장교가 아케메네스를 업은 등을 다시 추켜올렸다. “드라마스 왕자님께 가시지요! 장군은 나라의 대들보이십니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드라마스!”
아케메네스가 외쳤다. “드라마스를 지켜야 한다! 당장 드라마스에게 가자. 그 애만 살아 있으면 그래도 나라에 희망이 있다!”
장교가 죽어 넘어진 시녀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침상의 계단을 우다다다 달려 내려갔다. 그가 다시 침궁의 문을 걷어찼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왜 그러느냐.”
“장군님.”
장교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왜 그러느냐! 빨리 가자! 별궁으로!”
“장군님...”
장교가 울먹였다.
“어쩌면 좋습니까!”
아케메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횃불이 깜빡이는 어둑어둑한 저편에,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아케메네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안 돼!”
아케메네스가 외쳤다. “안 돼!”
장교가 드라마스의 머리에 다가갔다. 피범벅이 된 드라마스의 머리가 계단 아래 널부러져 있었다.
“드라마스! 드라마스!”
아케메네스가 눈물을 터뜨렸다.
“아아아아아아아!”
아케메네스가 흐느꼈다. “드라마스! 드라마스! 이 나라를 놔두고 이렇게 맥없이 죽어 버리다니, 이 나약한 놈! 네가 왕자의 자격이 있느냐! 돌아오너라! 어서 돌아와!”
“대원수님!”
장교가 아케메네스를 내려놓았다. 아케메네스가 피로 물든 바닥을 기어 드라마스의 머리를 안았다.
“드라마스. 드라마스! 어서 돌아오거라!”
아케메네스가 통곡했다.
“이제 어찌하면 좋으냐! 이 나라를 어찌해야 좋겠느냐!”
“대원수님, 고정하십시오! 위험합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곧 율리우스가 올 겁니다!”
장교가 눈물을 훔쳤다.
“율리우스가 이런 게 맞지요? 율리우스가 다 죽인 거지요? 맞지요?”
아케메네스가 허옇게 센 머리를 끄덕였다. “다 내 잘못이다. 베르단디를 누르려고 율리우스를 궁에 부른 건 실수였다! 내가 나라를 망하게 했구나! 내가 역적이다!”
장교가 눈물을 흘리며 아케메네스를 붙들었다. 아케메네스가 드라마스의 머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미안하다! 어린 너를 궁에 데려와서 결국 이 꼴로 만들었구나. 왕이 되었어야 할 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다니! 다 내 탓이다! 다 내 잘못이야!”
“어서 가셔야 합니다!”
“날 죽게 놔 둬라!”
“안 됩니다. 대원수님! 어서!”
장교가 아케메네스의 바짝 마른 몸을 업었다. 드라마스 왕자의 머리를 죽은 왕의 머리맡에 고이 모셔두고, 왕과 함께 피에 젖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장교가 아케메네스를 안고 어두운 복도를 내달렸다. 그가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계단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12월 21일 오전 8시.
베르단디 공주는 출정한 지 두 시간 반 만에 아르사메스 왕의 침실이 있는 가장 안쪽에 도달했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1층부터 경비병들과 시종들의 시체가 낭자했다.
“모두 여기 있어라.”
베르단디가 로비에서 군사들을 물렸다.
“지크, 너만 따라와.”
베르단디와 지크가 가만가만 계단을 올랐다. 침실로 향하는 복도가 피에 젖어 있었다.
베르단디는 벌벌 떨려오는 몸을 추스르며 검을 곧추세웠다. 지크가 베르단디의 앞장을 섰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베르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시종들의 시체를 넘으며 복도를 나아갔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얼어붙은 피가 복도에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지크가 쾅, 하고 침실의 문을 걷어찼다.
“항복해라!”
지크가 소리쳤다.
“폐하께서 납셨다. 무리한 저항은 그만두어라!”
“지크,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베르단디가 지크를 앞질렀다. “폐하. 폐하!”
베르단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괜찮으시옵니까?”
컴컴한 장막 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베르단디와 지크가 시체들을 넘으며 다가갔다.
“폐하!”
베르단디가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으시지요? 괜찮으신 거지요?”
베르단디가 떨리는 손으로 장막을 잡았다. “폐하...”
그녀가 장막을 열어젖혔다.
“아아아아아악!”
베르단디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지크가 장막 안을 보고 경악했다.
“폐... 폐...”
지크가 조심스럽게 피범벅이 된 천을 열었다. 가슴에 단검이 꽂힌 아르사메스 왕과 드라마스 왕자의 머리가 있었다.
“폐하!”
베르단디가 통곡했다. “폐하. 제가 늦었습니다!”
지크가 베르단디 옆에 엎드렸다. “폐하! 폐하!”
베르단디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칼을 뽑아들었다.
“아케메네스는. 율리우스는!”
베르단디가 소리를 쳤다. “두 놈을 잡아 와!”
지크가 베르단디의 무릎을 잡았다. “폐하! 아케메네스는 살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베르단디가 고함을 쳤다. “닥쳐라! 부왕께서 이렇게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 늙은이가 살 수 있겠느냐!”
“폐하!”
지크가 품안에서 베르단디의 교지를 들어 보였다. “폐하의 첫 번째 교지이옵니다. 지켜주시기로 저하고 약속하셨사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깟 종이가 뭐-”
“폐하!”
지크가 외쳤다. “교지를 지켜 주시옵소서. 나라를 다스리시려면 그리 하셔서는 아니되시옵니다!”
“뭐라?”
“교지를 어기시면 아니되시옵니다. 신하들의 신임을 얻으시려면 말씀을 바꾸시면 아니되시옵니다!”
“이 놈이!”
“차라리 저를 죽이시옵소서!”
지크가 베르단디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저를 죽이시고 아케메네스를 살려주소서! 아케메네스의 목숨, 이제 길어야 2년이옵니다. 아버지의 목숨만 살려주소서. 딱 2년만 살려주시옵소서!”
베르단디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칼을 내렸다.
“그래서. 두 놈은 어디 있느냐?”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찾아다 바치겠습니다!”
“당장 찾아라!”
베르단디가 고함을 쳤다.
“율리우스와 아케메네스, 둘 다 찾아야 할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놓쳤담 봐라. 교지고 뭐고 내가 너희들을 싹 다 산채로 불태워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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