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수호자의 귀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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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수호자의 귀환(6)
타닥, 타닥.
나직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저 고개 너머를 쳐다보았다.
"온다."
한 무리의 검은 머리 사람들이 지붕에 금박을 씌우고 하얗게 칠한 화려한 마차를 향해 절을 했다.
마차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군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마차 아래 계단을 깔았다. 흰 마차의 문이 열렸다. 흰 군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폐하."
왕과 마주한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나온 사람은 지크였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사람들이 일어났다. 지크가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쳐다보았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가 씩 웃었다.
"인사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군."
태수가 고개를 조아렸다. "워낙 들고 남이 많은 동네라..."
"알고 있소."
보겐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국 혼혈이었다. 가난한 곳을 찾아 이민자들이 흘러든 탓이다. 지크도 부모가 진국 혼혈이라 검은 머리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셨사옵니까."
지크가 웃으며 말했다. "그저 예전에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으러 왔을 뿐이오."
태수가 난색을 표했다. "황공하옵니다만, 말씀하신 부인들은 모두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지크가 실망감에 눈썹을 꿈쩍였다. "연금을 받은 기록이 있을 거요. 내 연금을 드렸으니까. 라프와 아크의 어머니들 말이오."
아주 오래 전, 군대에 끌려갔던 그와 두 친구들이었다. 라프와 아크는 전장에서 죽었고, 지크는 양아버지 아케메네스를 구한 공로로 무공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노역에서 도망가서 연금을 잃게 되었고, 그걸 라프와 아크의 어머니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지크 때문에 세금을 더 내야 한다며 불평하던 어머니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그는 출세하면 그 때 신세진 것을 꼭 갚아줄 생각을 했었다.
"결국 못 찾았다는 거군."
"예..." 태수가 송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보통 그런 처지의 과부들은... 도망을 가기 마련인지라."
"시간을 들여서라도 찾으시오. 내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빚이 있소."
"알겠사옵니다."
지크가 초췌한 얼굴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여기도 저수지가 많이 더럽소?"
"예."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이 너무 많이 슬어서... 농사를 짓기가 힘이 드옵니다."
"아직도 산에서 캔 것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소?"
"본래도 화전민과 사냥꾼들이 많았는데, 해가 갈 수록 많아지고 있사온지라..."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빠른 시간 안에 파이프를 고치겠소. 물 때문에 농사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날 믿으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지크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천이 넘는 사람들이 지크를 보러 왔지만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도 여기 출신이오."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하옵니다."
지크가 쓰게 웃었다. "다행이오. 내가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소. 진국을 정복하여 다시는 전쟁으로 힘들지 않게 하겠소."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지크는 우울한 기분으로 아발론 궁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오스카르 왕 때부터 해 왔던 일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고통받는 인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폐하. 잘 다녀오셨습니까?"
지크의 기분이 좋을 거라 예상했던 람세스가 눈을 내리깔며 그를 맞았다. 지크가 애써 웃었다.
"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세레니아와 스트라울은 우사이막스의 일로 바쁘겠지?"
"네... 그렇겠지요."
"디트리히는 사형수라 면책하기 전에는 일을 시킬 수가 없고. 총리님은 안 그래도 다른 일로 너무 바쁘고. 탕리 원수도 그렇고."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저수지를 당장 고쳐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오. 누구 시킬 사람이 없겠소?"
람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디트리히를 감옥에서 꺼내시지요."
"하."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거군. 법정관님을 부르시오."
디트리히는 자기의 부하들이 모두 죽어 나가도록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탕리는 그가 자기의 부하들을 구하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한 부하들이 마침내 항복한 날, 디트리히는 그들에게 손편지를 썼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였다.
"단장님."
기사단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하들의 죽음이 멈추자, 디트리히는 그제서야 잠을 편히 잘 수 있었다. 지크와 자기의 연극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다. 탕리가 작전의 내용을 알면 얼마나 화를 낼까 생각하니 마음의 파도가 조금 가라앉았다.
"디트리히!"
쿵쾅거리는 발소리다. 또 탕리다. 탕리는 디트리히를 죽이지 못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법의 지엄함을 세우고 싶어서, 또 그의 정적을 도와주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게 없는 놈이로군."
디트리히는 말을 안 하려고 아예 돌아누웠다. 입을 열면 당신은 내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거라고 뱉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폐하께서 너의 처형을 유예하셨다!"
탕리가 이를 갈았다.
"너와 팔콘기사단에게 저수지를 닦고 보수하는 일을 맡기셨다. 너희들에게 딱 맞는 노역이 아니겠느냐! 네가 폐하와 오랜 친구라는 게 정말 분하구나."
"......" 디트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당장 히스토리아 산맥으로 꺼져라! 난...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탕리가 씩씩거렸다. "넌 정말이지 대책 없는 놈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군령보다 한낱 동정심이 우선이라니. 넌 군인이 될 자격이 없다!"
디트리히가 무표정한 얼굴로 창살 앞에 섰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냐?"
"열어 주시죠."
"...!"
탕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디트리히의 생각이 변했다.
- 죽을 때까지, 이게 작전이었다는 건 말하면 안 되겠군. 진짜 날 죽일 지도 몰라.
탕리가 사라졌다. 군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말없이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초커가 주변에 있지?"
"네."
"기사단을 불러야겠다." 그가 피곤한 얼굴로 명령했다. "모두 수세미 들고 모이라 해라. 설겆이를 해야 되니까."
그 시각, 백비는 누구나 기뻐할 만한 소식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는 중이었다. 오늘 그가 찾아갈 첫 번째 손님은 왕손록이었다.
"사도 대인!" 백비가 고개를 조아렸다. "사도 대인을 뵈옵나이다."
"......"
왕손록이 냉소적인 얼굴로 그를 맞았다. "요즘도 바쁘시군! 범대인은 잘 지내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백비가 손을 저었다. "제가 왜 범려를 만나옵니까."
"모르는 척 마시오!" 왕손록이 버럭 화를 냈다. 백비가 입을 다물었다.
"...톨스토아는 잘 되고 있소?"
"예." 백비가 비굴하게 웃었다. "사도 대인의 예상이 맞았사옵니다."
"무슨?"
백비가 눈을 빛냈다. "범려를 어찌해 보려고 지크가 일부러 보낸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자기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옵니다."
왕손록이 눈썹을 꿈틀댔다. "정황이 나왔소?"
"나왔사옵니다. 톨스토아가 납치된 마을에 마약이 나올 거라는 정황을 퍼뜨린 놈들의 정체가 드러났사옵니다. 팔콘기사단이었사옵니다."
"팔콘기사단이 카르텔을 불렀다?" 왕손록이 피식 웃었다. "아주 얕은 수로군. 톨스토아를 우리 대 진국에 빨대로 꽂아 보시겠다?"
"그게 지크의 계획인 듯합니다. 톨스토아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을까요?"
"음..." 왕손록이 곰곰히 생각했다. "톨스토아가 완전히 귀순할 가능성이 얼마요?"
백비가 고개를 저었다. "반 정도이옵니다. 확실하진 않사옵니다. 의외로 강직한 구석이 있었사옵니다."
"범려는 이 사실을 당연히 알겠지?"
"모르옵니다." 사실이었다. 백비는 범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왕손록의 부하이지 범려의 부하가 아니었다. 범려의 위세가 강력할수록, 왕손록을 자기를 더 절박하게 원할 것이다.
"그랬겠지!" 왕손록이 웃었다. "범려가 이걸 알았다면 그대가 나한테 말했겠소. 범려가 혼자서 톨스토아를 가지고 놀려고 했겠지. 그대는 범려의 허수아비 아니오."
"사도 대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째서 저를 의심하시옵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백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부인했다. 수긍을 할 수야 없었으니까.
"됐소!" 왕손록이 탁자를 탁 치며 일어섰다.
"이 일은 범려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오. 날 속일 생각은 마시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왕손록이 눈썹을 꿈쩍였다. "상국과 차 한잔 할 때가 온 것 같군. 대인이 중재를 서 주면 좋겠는데."
- 그럴 줄 알았다.
"예이!" 백비가 허리를 굽혔다.
주지서는 톨스토아가 귀순한 목적을 듣고 혀를 찼다.
"역적질을 한 것도 모자라서 세작질까지 하려고?"
"틀림없습니다."
"흠." 주지서가 얇디 얇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쓸었다. "그렇군. 그래서 사도께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시오?"
"톨스토아를 역이용하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주지서가 차 한 방울이 묻은 손을 털었다. "폐하께 말씀 안하시고 혼자 해보시려고?"
왕손록이 고개를 기울였다. "적시를 도모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말해 봤자입니다. 일단 목표를 달성하고 보고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지서가 흥 하고 웃었다. "범대인에게 맡길 게 분명하니 그러시겠지."
"......"
왕손록이 말없이 차만 마셨다. 구천은 세작과 마약의 일을 모조리 범려에게 일임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왕손록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될 뿐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기를 지키고 있었다.
"하하하! 알겠소! 무슨 뜻인지." 주지서가 일어섰다. "뭐 알아서 잘 하실 거라 믿겠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시오."
그 정도 대답이면 됐다. 왕손록이 일어섰다. "알겠사옵니다, 상국 어른."
주지서가 백비를 흘긋 보고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주지서는 백비에게 뇌물을 먹이는 중이었다. 백비가 왕손록이 보란 듯 고개를 숙였다.
"갑시다."
왕손록이 벌떡 일어섰다. 백비가 그림자처럼 왕손록을 따라 나섰다.
한편, 대장군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범려는 바보가 아니었다. 왕손록과 주지서가 어떤 타입인지는 진작에 꿰고 있었고, 그의 머리는 그들 모두를 갖고 놀고도 남았다.
오늘 아침, 백비가 왕손록과 주지서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것만 봐도 알았다. 그는 우사이막스 건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등에 칼이 꽂힐 터였다.
그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구천이 쉬고 있는 내궁으로 갔다. 일부러 연극을 할 양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옷을 입은 채였다.
"어허! 범대인."
구천이 소복 바람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어서!"
"소신이 부덕하니 물러나기를 청하옵니다."
"물러나다니?"
범려가 두 손을 모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구천이 당황했다. "이러지 마시오. 도대체 누가 범대인에게 상처를 줬소?"
"소신은 부덕하여 대장군이 될 자격이 없사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신하들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오히려 쪼개 놓으니 제가 있어 무엇 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
범려가 말을 아꼈다. 구천은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 대노한 구천이 외쳤다.
"당장 상국과 사도 대인을 부르라! 오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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