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마왕의 이유식(9)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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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마왕의 이유식(9)
“건배!”
“이야~”
스트라울이 외쳤다. “이게 얼마만이냐!”
“그러게!” 세레니아가 환하게 웃었다. “너무 좋다 야!”
세레니아가 아케메네스 저택의 빚을 탕감해 준 그 날. 지크와 친구들은 아케메네스 저택에서 파티를 열었다. 오스카르 왕도 초대했지만 귀찮다며 오지 않았다. 대신 노바와 모부시, 세루크와 람세스, 그리고 안나가 참석했다.
“안나!”
안나 옆에 앉은 세레니아가 잔을 넘치게 따라 주었다.
“한 잔 마셔 봐. 먹을 만 해!”
안나가 잔을 입에 댔다. 와인의 청량감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 깊숙이 퍼졌다. “어때. 괜찮지!”
“응.”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술인가. 안나가 잔을 죽 비웠다. 지크가 놀라서 눈썹을 꿈쩍였다. “안나, 한잔 더 줄까?”
“응.”
“이야아!” 스트라울이 벌써 한 병을 더 땄다. 세레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좀 있다 따! 뭐 그렇게 급해?”
“어차피 다 먹을 거구만 뭐~”
세루크가 손을 들었다. “맞아요! 여기 더 주세요.”
“아우! 그럼 그럼.”
스트라울이 세루크에게 꼴꼴꼴 하고 술을 따랐다. “여윽시! 사람이 역시 부피가 좀 있어야 술을 잘 먹는다니까. 한 잔 더 드셔.”
“아우. 술 잘 먹는 사람 있어서 다행이다!”
세루크와 스트라울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말을 못 하는 에네레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웃어대기 바빴다. 세레니아는 안나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계속 이야기를 해 댔다.
“세레니아가 고맙네.” 지크가 코를 문질렀다. “역시 옛날 친구들이 좋아.”
“그러게.” 디트리히가 파스타를 집어먹으며 동의했다. 옆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노바와 모부시가 또 싸우고 있었다.
디트리히가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다. 모부시가 자리를 피해 버렸다. 노바가 씩씩대며 찬물을 들이켰다. “참 나. 노바 장군은 왜 이렇게 모부시를 싫어해? 니가 중간에서 잘 좀 해 봐라.”
지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목을 긁었다. “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자기보다 모부시가 승진도 빠르니까.”
“어유! 다들 너무 승진 승진 하고 아주 노래를 불러. 아니 승진할라고 군대 왔냐고.”
“군대에서 성공이 승진이니까 뭐.”
“그런 차원에서 지크 병장님이 승자네?”
“자식이 뭐가 또 승자냐.”
“승자 맞지! 왕자까지 승진했구만.”
디트리히가 술잔을 기울이며 슬쩍 물었다. “태자 자리까지 승진하는 거 아니냐?”
지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흠.”
- 태자가 될 사람이 자기 하나 뿐인데.
디트리히가 손으로 머리를 빗으며 생각했다. 지크가 태자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결국 이아이누나 톨스토아 사이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터였다. 그걸 지크가 모르고 아발론으로 돌아왔을 리가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근데 초커는 어디다 버려두고 왔어?”
“미안해, 오다가 헤어졌어. 너무 급하게 오느라.”
“그래.” 디트리히가 화난 표정을 감추려고 머리를 연신 쓸어넘겼다. “어쩔 수 없지 뭐. 진국에서 잘 살고 있겠지.”
“정말 미안해. 네 소중한 친구였는데.”
“어쩔 수 없지.”
디트리히가 쓴 입맛을 다시며 술을 죽 들이켰다. 기회가 되면 진국에 가서 초커를 찾아내야겠다. 내가 부르면 분명 어디선가 달려오겠지.
“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세루크가 저만치서 손뼉을 쳤다. 지크와 디트리히가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섰다. “무슨 일이야?”
“아니 내가.”
스트라울이 벌개진 얼굴을 손 없는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세레니아하고 얘를 찾으러 갔는데 거기서 갓난애 봤단 얘기.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어! 안나하고 똑같이 생겼더라구. 여자애였는데.”
세레니아가 스트라울을 보며 눈짓을 했다. 스트라울이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안나가 일어섰다.
“그게 무슨 얘기야?”
“아니 아니.”
스트라울이 손을 저었다. “그냥 애가 너하고 비슷하게 생겼더라구.”
“구천하고도 닮았어?”
“아니야.”
“어디서 만났는데?”
“아니 저기, 지크가 옛날에 세루크하고 같이 살던 집에서.”
“진짜 신기하네.”
세루크가 흠흠 하고 웃었다. “누가 거기다 어린애를 버리고 깄을까?”
“아 그러니까.”
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기가 어딘데?”
세레니아가 안나 옆에 바짝 다가섰다. “안나! 술이 비었네. 언제 다 마셨어!”
그녀가 안나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마셔라! 마셔라!” 사람들이 안나에게 외쳐 댔다. 안나가 술잔을 들었다.
“좋아!” 안나가 술잔을 죽 들이켰다. “오오~”
“음음.”
에네레실이 손을 저었다. 너무 많이 주지 말라는 거였다. 안나가 외쳤다. “괜찮아. 더 줘!”
“음음.”
“됐어. 됐어.”
안나가 탁자에서 술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사람들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붓고 다녔다. 화이트와인이 레드와인에 섞여 탁해졌다. 지크가 당황했다.
“안나. 왜 그래. 레드로 줘야지.”
“됐어 야. 어차피 들어가면 똑같애!”
세레니아가 일부러 크게 웃으며 술을 원샷했다. 안나도 함께 술을 원샷했다. 지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안나.”
“왜 그래? 내가 너보다 센 거 몰라?”
안나가 하하 웃었다. 눈가에 히스테릭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지크가 안나의 팔을 잡고 허둥거렸다. “안나, 들어가자...”
“왜 그래 너? 다들 오랜만인데!”
안나가 지크의 팔을 뿌리쳤다. “자. 다들 마시자!” 디트리히가 지크의 어깨를 잡았다. “그냥 두자. 기분 좋아하게.”
“어... 응.”
지크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디트리히가 안나의 옆에 섰다. “다시 보니까 반갑다! 안나.”
“그러게. 지난번엔 내가 놔 줘서 겨우 살았지?”
“뭐? 참 나. 그래 놔 준 걸로 하자!”
둘이 하하 웃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자리는 다시 떠들썩해졌다. “누나하곤 잘 지내?”
“응.”
“그래. 누나 요새 좀 살이 올랐더라? 네가 잘 해주나 봐.”
“뭐... 어. 그렇지.”
디트리히는 굳이 누나가 임신했단 얘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안나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어으음!” 갑자기 저 뒤에 앉아 있던 에네레실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옆에서 떠들어 대던 세루크도 놀랐다.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퍼?”
“왜 그래. 누나!”
“으음...”
“배 아파? 왜 그래.”
“음음.” 에네레실이 배를 문질렀다. 디트리히가 배에 귀를 가져갔다. “어? 찬다!”
“진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그녀의 배에 귀며 손을 갖다 댔다. “어. 찬다. 진짜 차네!”
“우와! 신기하다!”
사람들이 다시 웃어젖혔다. 뒤에 남겨진 안나가 멍하니 에네레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술을 안 먹었구나.”
안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안나를 지켜보던 지크가 천천히 일어섰다.
“안나,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갈래?”
“음음.” 안나가 신음소리를 냈다. “왜 그래, 안나.”
“음음.” 안나가 지크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음음.”
“안나.”
- 왜 벙어리 흉내를 내지?
지크가 입술을 떨었다. 큰일이다. 여기 데리고 온 건 실수였을지도 몰라.
안나가 환하게 웃었다. “아니야. 그냥 해 봤어.”
“놀랐잖아.”
“언니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지크의 얼굴이 망연자실해졌다. “안나.”
“나, 갈게.”
안나가 휙 뒤돌았다. 하얀 드레스자락이 펄럭였다. 지크가 외쳤다. “안나, 같이 가!”
“잠깐만!”
세레니아가 지크를 막아섰다. “혼자 있게 둬.”
“말도 안 되는-”
“시간을 좀 줘. 지크.”
세레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죄지 말구.”
“......”
지크가 안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디트리히가 지크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냥 혼자 있게 해 줘. 설마 어디 가겠어.”
“그래.” 세루크도 나섰다. “형도 좀 쉬어야지.”
지크가 손을 내렸다. 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럴까?”
“야. 그래 그래!”
세레니아가 그를 자리에 앉혔다. “너도 좀 마시고 긴장 풀어. 너도 살아야지. 안나는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맨날 옆에서 지켜보잖아.”
지크가 거칠어진 얼굴을 쓸었다. “그렇겠지? 오늘은 그냥 혼자 있게 두는 게 낫겠지?”
“그렇다니까.”
세레니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 믿고. 응?”
“그래. 안나 때문에 너도 고생 많잖아. 솔직히.”
스트라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 나이 먹었으면 어느 정도는 혼자 이겨내야지. 니가 무슨 고생이냐? 야. 오늘은 너도 받아주지 마.”
지크가 어두워진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안나는 사라지고 없다. “걱정하지 마. 경비병들 다 있어. 자. 마셔. 마셔!”
“그래. 알았어.” 지크가 꿀꺽 하고 술을 들이켰다. 기분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
헉, 헉.
안나가 네 발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흰 드레스는 무릎 아래로 찢어 버렸고, 부드러운 구두는 여기저기 긁혀 레이스가 너덜거렸다.
- 안나.
컴컴한 산중에 안나를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아악!” 안나가 주저앉았다.
- 일어나라. 일어나!
산이 외쳤다.
- 어서 일어나라!
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산이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 이 쪽으로!
안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 여기. 여기 뒤로!
안나가 바위 뒤로 돌아갔다.
“아악!”
- 뛰어내려라!
바위 뒤는 절벽이었다. 푸드득, 하고 흙이 끝없는 어둠으로 떨어져 내렸다. 안나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 빨리!
“안 돼-”
툭, 하고 무언가가 안나를 밀쳤다. 안나의 몸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머! 여기서 누가 자네?”
“음...”
안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을 겨우 떴다. 눈앞에 파란 무언가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초점을 맞추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아...”
안나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문질렀다. “여긴...”
“어디긴요!” 여자가 피식 웃었다. “우리 집 앞이죠.”
“네?”
안나가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켰다. 부엽토 냄새가 안나의 코끝을 찔렀다.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 뒤에는 나무로 만든 문이 끼릭거렸다.
“정신 차렸어요?”
푸른색 단발머리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안나를 쳐다봤다. “그럼 집에 가요.”
“저, 저기요!”
안나가 다급히 여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 저기요.”
“네? 왜요.”
“저기, 그 애기...”
여자가 포대기로 등에 둘러맨 애기를 흘긋 쳐다봤다. “애기요? 왜요.”
“아니, 저기...”
안나가 눈물을 닦았다. “저기, 그 애기 혹시 그쪽 애에요?”
“아뇨.”
여자가 턱 끝으로 자기 집 문 앞을 가리켰다. 안나가 문에 적힌 팻말을 읽었다. <보겐자 하늘탁아소>.
“그냥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안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여자가 안은 아이가 안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었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티라니아에요.”
“전 안나라고 해요.”
안나가 더러운 손으로 옷깃을 쥐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일하고 싶어요?”
“네.”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하게 해 주세요.”
“흠...”
티라니아가 안나의 위아래를 훑어 봤다. “딱 봐도 못 사는 집 여자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요? 도망이라도 나왔나 보죠?”
“네... 네.”
“왜요?”
갑자기 안나가 울컥했다. “그게...”
“괜찮아요. 말해 봐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저기, 사실은 남편이...” 안나가 더러운 얼굴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남편이 애를 죽였어요. 갓난애를요.”
“네? 뭐 떨어뜨리기라도 했어요?”
“아뇨... 일부러 죽인 거에요.”
“하. 뭐라구요?”
티라니아가 인상을 썼다. “또라이 새끼네 진짜. 그래서 도망 나온 거예요?”
“네...”
“잘했어요! 그런 놈하곤 못 살지.”
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 일할 수 있어요. 진국에서도 베이비 시터를 했었어요.”
“진국에서요?”
“네.”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5년 했었어요. 저, 경력 있어요. 믿어 주세요. 잘 할 자신 있어요.”
“음.” 티라니아가 흙투성이인 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요 그럼!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 됐네요. 일단 일해 보도록 해요.”
후, 하고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티라니아가 웃었다. 뒤에 업힌 아이도 방긋 웃었다. “저기, 아이 이름이 뭐에요? 제가 안아도 될까요?”
“음... 그러세요!”
티라니아가 선뜻 포대기를 풀어 주었다. 안나가 능숙한 손길로 아이를 등에 얹고 포대기를 감았다. 티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경력 있네요.”
“네. 이 애... 혹시 이름이 뭐에요?”
티라니아가 빨랫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옐로이즈요.”
“옐로이즈.”
안나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등에 업인 옐로이즈가 꺄륵 하고 웃었다.
“옐로이즈. 옐로이즈구나.”
“특이하죠? 아빠가 옐로이즈라고 하고 갔어요. 세상에 지금까지 안 찾으러 오지 뭐에요? 돈은 많이 줬지만.”
“많이 줬어요?”
“네. 그래서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예상은 했는데...”
“아빠 이름이 뭐에요? 어떻게 생겼어요?”
“이름은 모르겠고요. 뭐... 커다란 검은 말 데리고, 칼도 커다란 걸 차고 있긴 하더라고요. 군인이겠죠 아마? 말이 엄청 크더라고요. 태어나서 그렇게 큰 건 처음 봤어요.”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랬어. 안나가 비오듯 눈물을 쏟았다. 그랬구나. 내 애가 죽지 않았구나.
티라니아가 흐느끼는 안나의 가슴께를 보았다. 젖어 있었다. 모유가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에그. 불쌍해라.”
티라니아가 손짓을 했다. “들어와요! 안에서 빨래 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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