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사랑과 충성(7)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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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사랑과 충성(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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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니아는 혹독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언니의 쓰리 사이즈를 맞춰 내기 위해서였다. 근육을 없애려고 웬만하면 마차를 타고, 집안에서도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 가졌다.
한편, 에네레실은 지크의 집을 나와 원룸을 얻었다. 지크가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말로는 일을 찾기 쉬운 곳에 살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지크와 디트리히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세레니아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자, 세레니아는 카라카스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세레니아.”
편한 옷차림으로 문을 연 카라카스가 피식 웃었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군? 난 자네 상사야.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일은 자제해 주길 바라네.”
“대령님이야말로, 미혼 여자 장교한테 마약을 먹이는 짓은 자제해 주시죠.”
세레니아가 쏘아붙였다. “왕자님께 이야기할 기회가 온다면 마약을 불법화하라고 얘기할 거예요.”
“오스카르 왕자는 곧 죽을 건데?”
“걔 말고, 구천 왕자 말이에요.”
카라카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들어와!”
화려한 흰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세레니아가 카라카스의 집 안에 발을 들였다. 그녀를 본 시종들이 인상을 썼다. 세레니아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응접실에 앉았다.
“......”
카라카스가 말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마주보았다. 세레니아의 갸름한 턱은 미동도 없었다.
“결정했나?”
“결정했어요.”
카라카스가 웃었다. “이쪽이야, 저쪽이야?”
세레니아도 웃었다. “이쪽이에요.”
카라카스가 눈길을 들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어쩔 거지?”
“먼저 그쪽이 날 어떻게 도와줄 건지 들어야겠어요. 또, 난 언니를 죽일 생각은 없어요. 그냥 언니를 어딘가로 쫓아버리는 걸로 해요. 이베리아 반도라던가, 뭐 인적 드문 섬 같은 곳으로 말이에요.”
“세레니아.”
카라카스가 세레니아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뭐 예상은 했지만, 실망스럽군.”
“하!”
세레니아가 웃으며 팔짱을 꼈다. “역적놈인 당신한테 들을 말은 아니에요.”
“뭐! 그렇지?”
카라카스가 검게 탄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에네레실이 원룸을 얻었다고 하더군. 네가 제안한 건가?”
“맞아요.”
“잘했어. 디트리히의 다음 지령은 뭐지?”
“아직 못 받았어요.”
“네가 나와 접촉하는 건 알았을 것 아니야.”
“그냥 더 친해지라던데요.”
“흠.”
카라카스가 웃었다. “좋아. 이렇게 계속 친하게 지내자고. 그러다가, 상대가 원하는 걸 말하면 그걸 나한테 알려주면 돼. 그럼 그 순간!”
카라카스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날 밤, 너는 에네레실이 되는 거야. 네 언니는 실종된 세레니아가 되는 거고. 오케이?”
세레니아가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너는 디트리히와 결혼할 거야. 결혼식 날, 나는 너에게 대가를 받을 거고. 왕자의 목숨으로 말이야.”
“좋아요.”
“세레니아. 말해 두겠는데.”
카라카스가 회갈색 눈동자를 빛냈다. “나와 디트리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생각은 마. 나는 프로고, 디트리히도 마찬가지야. 알아듣겠지?”
“줄타기는 필요 없어요. 나는 원하는 것을 얻고, 당신도 원하는 것을 가져가요. 그럼 되는 거예요. 방해물은 모조리 죽여 버리자구요.”
“좋아.”
카라카스가 일어섰다. 그가 벽장에서 와인을 꺼내왔다. 세레니아가 인상을 썼다.
“또 그거예요?”
“이번에는 안 탔어.”
“못 믿겠어요.”
카라카스가 웃었다. “디트리히를 안심시키려면, 나하고 충분히 친해져야 되지 않겠어? 이대로 그냥 집을 걸어 나가면 디트리히가 캐묻지 않겠느냐고.”
“술을 먹어야 친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야 빨리 친해지지.”
카라카스가 와인잔에 술을 따랐다. “디트리히를 속일 만큼은 친해야 돼, 우리는.”
세레니아가 턱을 당겼다. 하늘하늘한 이브닝 드레스 아래로 숨을 들이쉬었다. 카라카스가 잔을 들었다. “자. 건배.”
카라카스는 만취한 세레니아를 마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세레니아가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자, 우사이막스 중령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니아 중령.”
우사이막스가 인상을 썼다. “약이라도 한 건가? 안색이 그게 뭐야?”
“무슨 상관이야.”
세레니아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꺼져!”
그녀는 그대로 잠에 곯아 떨어졌다. 혹독한 다이어트를 한 몸으로 약에 취해 춤을 춰서 체력이 바닥이었다. 우사이막스가 고개를 저었다. “약을 하다니. 정신도 똑바로 못 차리는군. 다시는 작전대상 앞에서 약에 취하지 마.”
곤히 잠든 세레니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사이막스가 혀를 차며 창문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세레니아는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입이 마르고 속이 쓰렸다. 눈앞이 핑핑 돌고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세레니아는 손을 씻으려고 받아 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시다가 그대로 토해 버렸다. 지난번보다 많이 마셔서 그런지, 부작용이 훨씬 더 심했다.
세레니아가 욱, 욱 하고 토악질을 하며 배를 그러쥐었다. 위가 타는 듯이 아팠다. 그녀가 고통에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쿠당탕, 하고 토사물이 섞인 물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무슨 엄청난 돈을 벌려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한참을 울다가 하늘을 보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세레니아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오늘은 월요일, 출근했어야 하는 날이다. 그녀가 다급히 주전자를 찾았다. 다행이다. 물이 남아있다.
세레니아가 물을 아껴가며 얼굴과 손을 씻고 군복을 입었다. 샤워는 일단 가서 하자. 더러운 머리를 묶고 집을 뛰쳐나가니 벌써 옆집 가판대에 빵이 가득이다. 점심때가 다 되었다는 뜻이다.
- 이런 X발!
세레니아가 속으로 쌍욕을 하며 마구 뛰었다. 그녀의 군화 아래 흙먼지가 일었다. 에네레실을 만나러 가려고 2주일이나 휴가를 낸 것도 눈치 보이는데 복귀 날 지각이라니, 잘려도 할 말이 없다.
그녀가 헉헉대며 전략작전부 본부에 도착했다. 거지꼴이 되어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기니 동료들이 그녀를 흘겨본다. 그녀가 일단 상사의 사무실부터 노크했다.
“충성! 세레니아 중령입니다.”
“세레니아.”
상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배탈이 나서 늦었습니다.”
“배탈?”
상사가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나? 어!”
“죄송합니다!”
세레니아는 고개를 숙이고 30분 간 상사의 잔소리를 들었다. 상사가 온갖 쌍욕이며 자기 예전 전투 경험이며 왕자님의 명예와 나라의 명예와 전략작전부의 명예와 자기의 명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제 그만하시죠 하는 소리가 나올 때쯤, 상사가 이야기를 멈췄다.
“나가!”
“예!”
세레니아가 경례를 하고 나왔다. 동료들의 눈초리가 여전히 따가웠다. 그녀는 일단 샤워부터 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시는 약을 하지 말아야지, 절대로. 세레니아가 다짐 또 다짐하며 책상에 앉았다. 벌써 오후 두 시다. 맙소사.
“세레니아 중령님!”
부하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경례를 했다. “결재하실 서류입니다.”
“이렇게 많다고?!”
세레니아가 외쳤다. “대결해!”
“대령님이 허락지 않으시겠답니다. 모두 직접 결재 받으시랍니다.”
“아효.”
세레니아가 한숨을 쉬며 서류를 폈다.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보내니 벌써 저녁 9시다. 그녀가 허리를 짚으며 일어섰다. 다이어트를 하느라고 힘이 없었다.
감자튀김 딱 하나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세레니아가 울적한 기분으로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토사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 왔군.”
우사이막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사람 꼴이네.”
“어젠요?”
“어젠 그냥 개돼지였지.”
세레니아가 힘없이 웃었다.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카라카스하고 사귀나?”
“왜요?”
“근데 왜 다이어트를 해? 너 벌써 양귀비 중독됐어?”
세레니아가 힘없이 하, 하고 웃었다. “청소 좀 할게요. 더러워서 못 보겠으니까.”
세레니아가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더러운 냄새가 나는 걸레를 빨아서 두 번이나 다시 닦았다. 창문을 열려고 하자 우사이막스가 제지했다.
“열지 마. 나 가고 열어.”
“알았어요! 어우 답답해.”
세레니아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카라카스하고 사귀냐고 물어봤어요?”
“그래.”
“그냥 노는 사이에요.”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안 하나?”
“안 해요. 전혀.”
“카라카스가 너한테 접근하는 목적이 뭐야?”
“뻔하죠. 나를 타고 디트리히한테 접근하려는 거겠죠.”
“그 놈이 그렇게 말했어?”
“아무 말도 안 한다니까요.”
우사이막스가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약 하지 마. 한 번만 더 약을 하면 널 정보부에서 빼겠어.”
“그 새끼가 하자는데 어떻게 해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하지 마. 그 놈이 약을 먹이는 이유를 몰라? 널 완전히 갖고 놀기 위해서야.”
“알았어요. 이제 안 할게요.”
우사이막스가 뺨을 문질렀다. “네가 약을 한다는 걸 알면 디트리히가 당장 널 잘라버릴 거다. 이번이 두 번째지? 이제 끊어. 우리 쪽은 너한테 약 못 주니까, 알아서 해.”
세레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번 지령은 뭐예요?”
“카라카스의 집 구조를 샅샅이 파악해. 카라카스의 중요한 문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해.”
“중요한 문서가 뭔데요?”
“넌 카라카스가 중요한 문서를 어디 숨겨두는지만 알아다 주면 돼.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럼 이번에는 아예 자고 와야겠네.”
세레니아가 피식 웃었다. 우사이막스가 그런 세레니아를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건 못하겠다는 건가?”
“왜 못해요.”
세레니아가 하하 웃었다. “그까짓 것!”
우사이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왕자님의 검이야. 나라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
“생각해 보니 곧 생리 시작이네! 다음 주에 잘게요. 한 주 늦어져도 되죠?”
우사이막스가 인상을 썼다. “마음대로 해.”
에네레실이 딥스로트 쪽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 날, 지크와 디트리히는 에네레실을 찾아갔다.
“누나. 가 봤자 세레니아하고 같이 살지도 못하잖아. 굳이 딥스로트로 갈 이유가 없어.”
“거기 가면 위험할지도 몰라. 여기서 우리랑 같이 세레니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나아.”
둘은 간곡하게 에네레실을 설득했다. 하지만 에네레실은 완강했다.
<난 동생을 따라 여기로 온 거야. 동생이 딥스로트에서 살 줄 알았으면 나도 거기서 살았을 거야.>
“가도 세레니아는 못 만나. 누나. 세레니아 금방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응?”
<너희들, 어떻게 그 애한테 그렇게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어? 그 애 마음 약한 거 몰라?>
에네레실이 수첩에 글씨를 갈겨썼다. <난 그 애 옆에 있어야겠어.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서 그렇게 힘든 비밀업무 하면서 얼마나 힘들겠어?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 해!>
“한 달만 기다려.”
에네레실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둘을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디트리히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지금 당장 세레니아를 아발론으로 데려올게.”
<그러지 마! 내가 가면 돼.>
“누나를 어떻게 보내!”
에네레실이 디트리히를 쳐다봤다. <난 결혼할 생각 없어.>
“누나! 왕자님 말씀이야.”
<난 동생을 따라가야겠어. 더 이상 나하고 세레니아 사이에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디트리히, 넌 좋은 애지만 나하고는 안 어울려. 아발론의 여자들 중에 좋은 사람 만나.>
“누나.”
디트리히가 매달렸다. “누나, 가지 마.”
지크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누나, 도대체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 생각도 없어. 이제 난 결혼도 못하게 되었으니, 동생이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동생 옆에서 살고 싶어. 그것뿐이야.>
지크가 에네레실의 수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나.”
<지크, 디트리히, 잘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세레니아를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그 애한테 빚이 있어. 더 이상 나 때문에 그 애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에네레실이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이만 나가 줄래? 짐을 마저 싸야 하니까.>
며칠 후, 세레니아는 카라카스의 집을 다시 찾았다. 세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이젠 위화감도 없었다.
“들어와.”
카라카스가 편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세레니아를 반갑게 맞았다. 둘은 늘 앉는 유리 탁자에 앉았다. 카라카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세레니아가 약병을 보며 인상을 썼다.
“널 도와주는 약.”
“무슨 뜻이에요?”
“그 약을 먹으면 식도가 타들어갈 거야. 말을 못하게 되지.”
“......”
세레니아가 말을 잃었다. “그게 무슨...”
“너, 언니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카라카스가 웃었다. “그럼 약이 필요하지. 안 그래?”
세레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설마 여기까진 생각 못했다고 말하지 마. 실망할 거다.”
세레니아가 얌전히 약병을 품에 집어넣었다.
“언제쯤 에네레실의 시체를 가져올 생각인가?”
“언니가 딥스로트로 집을 옮겼어요.”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가져올 거예요.”
“명심해. 에네레실의 시체를 가져와야 해.”
“왜 꼭 그래야 하죠?”
“그래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실하니까. 난 디트리히에게 속고 싶지 않으니까.”
카라카스가 회갈색 눈을 치켜떴다. “에네레실의 시체를 가져오지 않으면, 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무조건 죽일 거다. 그게 너든, 네 언니든 간에.”
“이거 봐요! 나는 말을 하고 언니는 말을 못해요. 언니가 날 죽이고 나로 위장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게 아니고!”
카라카스가 탁자를 쾅, 하고 쳤다. “네가 언니를 죽인 것처럼 위장하고 나를 갖고 노는 게 싫다 이거야. 알겠어?”
“왜 꼭 언니를 죽여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이 판에서 치워 버리면 그만이잖아! 어디 가둬 놓으면 되잖아!”
“언니를 죽여야 널 믿을 거다.”
카라카스가 짓씹는 어조로 말했다. “언니의 시체를 가져오지 않으면, 네가 디트리히에게 등을 돌렸다는 걸 믿지 않겠어.”
“아직도 날 믿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바보로 보여?”
카라카스가 하하 웃었다. “날 가지고 놀 생각은 마라. 네가 나를 디트리히에게 바치고 디트리히의 사랑을 구걸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그렇게 자존심 없는 여자로 보여!”
“디트리히 말 한 마디에 그 잘나가는 사업 접고 이리로 튀어 올라온 걸 보고도 모를 줄 알아?”
카라카스가 하하 웃었다. “너, 센 척 하지 마라. 순진한 거 얼굴에 다 써 있어!”
“이 개새끼가!”
세레니아가 벌떡 일어섰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널 쳐 죽이고 왕자한테 상금이나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어! 이 X발!”
“네가 돈이 필요해서 올라왔어?”
카라카스가 낄낄거렸다. “넌 이미 선을 넘었다! 나를 만나서 약을 하고, 에네레실을 무리해서 딥스로트까지 끌고 온 걸로 디트리히는 이미 널 의심하기 시작했을 거다.”
“웃기지 마!”
“그러니까 빨리 실행하란 말이야!”
카라카스가 을러댔다. “디트리히가 눈치 채기 전에. 빨리 언니를 죽여! 바꿔치기를 하라고! 그래야 네가 에네레실의 생활에 적응할 시간이 늘 것 아니야!”
“언니를 죽일 순 없어!”
“하! 잘 들어라, 이 멍청한 년!”
카라카스가 벌떡 일어섰다. “여기서 너와 에네레실은 완전히 혼자다. 지크도, 디트리히도 이 먼 곳까지 너를 구하러 달려와줄 수 없단 말이야!”
“뭐야?”
“여기서 나와의 이야기를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그러면 내가 네 알았습니다라고 할 줄 알아!”
카라카스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너도, 에네레실도 다 죽여서 디트리히의 마음을 찢어놓을 거다. 그러면 디트리히가 실수를 하겠지. 그게 그 놈이 죽는 날이다!”
“뭐?”
세레니아가 외쳤다. “네 맘대로 그게 될 줄 알아!”
“하지만 네가 언니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카라카스가 비웃었다. “이미 에네레실은 딥스로트에 왔다. 내 손바닥 안에 있단 말이야! 네가 네 언니를 데리고 딥스로트를 산채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세레니아가 이를 갈았다. “너, 처음부터 언니를-”
“이제 길은 하나뿐이다, 세레니아!”
카라카스가 세레니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언니를 정말 살리고 싶다면 나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라. 그러면 언니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다!”
“너...”
세레니아가 눈물을 흘렸다. “넌 인간도 아니야.”
“국사를 하면서 인간성이 필요하나? 난 폐하의 충신이다. 이다볼 식으로 말하면, 구천 왕자님의 검이지!”
카라카스가 눈을 치떴다. “어쩔 테냐! 나한테 협조할 테냐, 아니면 언니의 시체를 갖고 아발론으로 돌아갈 테냐!”
세레니아가 카라카스를 노려보았다. 카라카스가 쾅, 하고 싸구려 찻잔을 놓았다. 콸콸콸콸콸, 하고 약을 탄 술이 담겼다.
“마셔!”
에네레실은 좁디 좁은 딥스로트의 새 집에 적응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커튼도 바꿔 보고, 침대 시트도 갈아 보고, 세레니아가 준 조각상을 여기 놓고 저기 놓고 하면서 정을 붙여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네레실은 혼자 앉아 카레를 먹으며 세레니아가 자길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음?”
에네레실이 문으로 달렸다. “음음!”
문 뒤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언니.”
에네레실이 반가워하며 문을 열었다. 살이 쪽 빠지고 머리가 어깨까지 자란 세레니아가 나타났다. “음!”
에네레실이 동생을 껴안았다. “언니.”
세레니아도 언니를 꼭 안았다. “잘 있었어?”
에네레실이 동생을 잡아끌었다. 동생에게 카레를 담아주었다. 세레니아가 허겁지겁 카레를 먹었다.
<저녁 아직도 안 먹었어?>
에네레실이 수화를 했다. <왜 그렇게 말랐어. 요새 운동 안 해?>
“못 했어, 언니.”
세레니아가 목소리를 떨었다. “못 했어. 먹지도, 자지도 못 했어.”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일 그만두면 안 돼?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해야 하는 일이면, 그냥 나사렛으로 돌아가자.>
동생이 고개를 저었다. “못 해. 너무 늦었어!”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늦었어. 이젠.”
세레니아가 서럽게 울었다. 움푹 꺼진 눈 밑을 타고 눈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그녀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때렸다.
<울지 마!>
에네레실이 동생의 머리를 감쌌다. “음음. 음.”
“언니!”
세레니아가 흐느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멍청했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음음.”
에네레실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군인이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였어. 군인으로 돌아온 건 잘한 거야.>
“아니야!”
세레니아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아니야. 그건 내 최악의 실수였어. 언니. 미안해...”
“음음.” 에네레실이 함께 울었다. “음음.”
에네레실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가 새로 산 옷을 가져왔다. 새로 산 신발도, 마사지 서적도 가져왔다. “음음.”
“이게 뭐야?”
언니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음.”
“언니.”
세레니아가 경악했다. “설마?”
에네레실이 새로 산 신발은 모두 세레니아의 발에 맞는 크기였다. 세레니아가 눈물을 터뜨렸다. “언니!”
“음.”
에네레실이 세레니아에게 마사지 서적을 쥐어주며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넌 잘 할 거야, 세레니아. 무슨 작전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성공하길 바래.>
“언니.”
세레니아가 바닥에 엎어졌다. 동생의 어깨가 격렬하게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했다. 에네레실이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후, 눈 밑이 퍼래진 세레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눈치 챈 거야... 왜 여기 온 거야!”
<다 눈치챈 건 아냐. 하지만, 네가 내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어.>
“그런 줄 알면서 왜 왔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넌 똑똑한 애니까. 디트리히도 똑똑한 애니까. 너희들은 성공할 거야. 꼭 잘 되길 바래.>
에네레실이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그녀가 수화를 했다.
<난 여기까지 온 거, 후회 안 해.>
“언니.”
<그러니까, 너도 후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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