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망국의 씨앗(3)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13화-망국의 씨앗(3)
라노르의 집을 나온 날, 지크는 말을 빌려 집으로 향했다. 이틀 밤을 새고 달려 집에 돌아온 지크가 미친 듯이 정문을 흔들었다. “람세스! 람세스!”
“도련님!”
잠옷 바람으로 달려온 람세스가 문을 열어 주었다. “갑자기 한밤중에 왜 오신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네? 도련님!”
지크는 람세스를 제치고 뒤뜰로 향했다. 초라한 뒤뜰에 아버지의 무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크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더 옆에 있어 드렸어야 했는데.” 그가 아버지의 무덤에 난 풀꽃을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절 용서해 주세요. 세루크와 앙리를 지켜 주세요.”
람세스가 지크의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지크는 한참을 흐느끼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휴가를 더 내야겠어요.”
“세루크와 앙리 도련님을 찾으셨어요?”
“찾았어요. 진국으로 밀항할 거에요.”
“네?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에요. 제가 동생들을 무사히 진국에 보내줘야겠어요. 휴가를 더 내야겠어요.”
“도련님도 가시겠다는 건가요?”
“전 못 가요. 왕자님의 유지를 지켜야 하니까요.”
람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바쁘게 돌아다닌 거군요. 저는 진짜 한량이나 되시려나 했습니다.”
“앞으로 한 10년은 한량질 열심히 할 거예요. 다 유지를 지키려고 하는 거니까 더 이상은 묻지 마요. 이건 세루크하고 앙리한테도 말 못했으니까.”
지크가 그제서야 하품을 했다. “힘들어 죽겠네. 내일 휴가원 연장신청서 내러 가야 되는데. 그냥 지방군 그만 둬 버릴까.”
“안 됩니다! 그래도 군에 자리를 지키고 계셔야 나중에 다시 중앙으로 가시죠.”
“언젠가는 가야죠.”
람세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크가 아버지의 무덤을 보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꼭 아발론으로 갈 거예요. 돌아가신 왕자님을 위해서.”
람세스가 하하 웃었다. “다행이네요. 디트리히 님하고 한 판 하시겠다 하고 걱정했는데.”
“네?”
람세스가 웃었다. “디트리히 님이 오셨어요.”
“디트리히가? 갑자기 왜요?”
저 뒤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왜긴 자식아!”
면바지만 입은 디트리히가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깝치다가 잘렸다!”
“디트리히!”
지크와 디트리히가 서로 얼싸안았다. “이 새끼!”
“이게 스승님한테!”
“휴가 냈냐? 요즘 수도방위군이 아주 꿀빠네? 소령 달았다며.”
“관뒀다 이 새끼야.”
지크가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왜? 게이 바라도 갔냐?”
“아오. 야! 시바이하고 사귈 뻔 했어.”
지크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야!”
“아 말하자면 길다. 하여튼. 나 군대 그만뒀다.”
“뭐? 너 나하고 약속한 거 잊었어?”
디트리히가 벗은 상체에 난 수백개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채찍 자국이었다. 지크가 인상을 썼다.
“너. 헌병대에 갔었어?”
“야야. 말하려면 밤새야 돼!”
디트리히가 웃었다. “하여튼 반갑다. 술이나 한 잔 하자!”
지크는 디트리히와 만난 후 처음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브리태니커에 입학하기 위해 혹독하게 수련하고, 입학한 후 정신없이 공부에 몰두했고, 임관하고 나서는 온갖 일에 휘말려 정신 없었던 지크의 고단한 인생은 그때서야 짧은 휴식을 맞았다.
“근데.”
뜨거운 여름 태양을 피해 차양이 쳐진 탱고 바 테이블에 앉은 지크가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안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디트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수도방위군에 있을 때까지는 잡히진 않았었어.”
“지금은 모르겠지?”
“그치.”
디트리히가 술을 들이켰다. “탈영병 신세니까.”
디트리히는 아발론의 감옥에서 풀려난 후 딥스로트에 돌아가지 않았다. 링구부는 그를 잡으려고 헌병대와 자객들을 동원했다. 디트리히와 초크스칼라는 히스토리아 산까지 도망쳤다가 산길을 타고 자카룸의 지크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몇 년 전 지크와 똑같은 처지였다.
“시바이, 그 새끼가 간첩이었구만.”
“돈도 무지하게 많이 받았대.”
지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올란도 장군이 아니라 링구부 장군이 간첩이란 말이지?”
“내 눈치로는 확실해. 올란도는 충성스러운 자였어. 링구부는 운하 설계도를 베르단디한테 갖다 준 놈이잖아. 한 잔 더요.”
디트리히가 술을 더 시키며 말했다. “톨스토아 원수가 완전히 속은 거지.”
“근데 시바이는 왜 끝까지 링구부 편에 섰을까.”
“판이 기울었다는 판단이 섰겠지.” 디트리히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진국이 이길 거 같으니까 그런 거야.”
지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질 것 같아.”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근데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
“왕자님의 유지를 지키려고.”
“유지가 뭔데?”
지크가 살짝 웃었다. “유지를 이을 때가 되면 말해 줄게.”
“왕자님이 왜 너한테 유지를 주셨어?”
지크가 다시 웃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디트리히가 술을 들이켰다. “세루크하고 앙리는 안 왔어?”
“만났어.”
“왜 집에 없어?”
“따로 살겠대.”
“왜?”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하하 웃었다. “자카룸에 있으면서 일이 많았구만! 애들은 지금 어딨어? 보고 싶다.”
“페라보라 마을에. 내 친구 아들하고 같이 있어. 친구 아들이 좀 아파서 아는 의사 선생님한테 맡겨두고 왔는데, 그 애들도 그 선생님이랑 같이 있어.”
“라노르 선생님?”
“어.”
“친구 아들이 많이 아픈가 보네.”
지크의 얼굴이 흐려졌다. “응. 꼭 나아야 할 텐데.”
며칠 후, 지크의 집에 세루크와 앙리가 찾아왔다. 람세스와 디트리히를 발견한 앙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집사님!”
“아이고!”
앙리를 본 람세스가 눈물을 흘렸다. “도련님!”
앙리와 람세스가 서로 얼싸안았다. 디트리히가 조용히 다가와 세루크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다.”
세루크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네요.”
디트리히가 조금 당황했다. 그가 일부러 활짝 웃었다. “브리태니커 못 가서 서운하겠다. 열심히 했는데. 그치?”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갈 필요 없어요.”
“그래. 야! 이 자식이 남자가 다 됐네. 응?”
디트리히가 세루크의 넓은 어깨를 툭툭 쳤다. 앙리가 그의 품에 안겼다. 디트리히가 앙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앙리! 귀여운 것.”
“스승님!”
앙리가 디트리히의 가슴에 통통한 볼을 부볐다. 그가 앙리를 번쩍 안고 지크에게 다가갔다. “너는 인사 안 해?”
지크가 살짝 웃었다. “며칠 전에 봤는데 뭐. 가자. 얘들아.”
다섯은 지크의 집 뒤뜰로 걸었다. 세루크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듯 물었다.
“무덤은 가까워?”
“바로 여기야.”
건물의 벽면을 돌자 바로 아케메네스의 무덤이 나타났다. 앙리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앙리가 아케메네스의 무덤에 엎드려 흐느꼈다. “아빠! 아빠!”
세루크도 양아버지의 무덤에 달려갔다. 그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빠!”
앙리와 세루크가 서럽게 흐느꼈다. 지크도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지크가 두 동생을 향해 다가가다가 멈췄다.
디트리히가 그런 지크를 흘긋 보았다. 지크가 서럽게 울며 얼굴을 가렸다. 그가 지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진정해.”
지크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얘들아. 인제 그만 울어. 들어가서 밥 먹자.”
세루크가 앙리를 일으켰다. “울지 마. 그만 해.”
앙리가 풀잎을 쥐어뜯었다. “아빠!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빠가 너무 불쌍해.”
“아빠는 어차피 돌아가실 몸이었어. 갈 곳에 가신 거야.”
세루크가 앙리를 다독였다. “아빤 이제 편안하셔.”
“형.”
앙리가 세루크를 껴안았다. 건장한 세루크가 앙리를 번쩍 안았다. “그만 울어. 이제 집에 가자.”
“뭐?”
디트리히가 깜짝 놀랐다. “아니 좀 자다 가.”
“됐어요. 바로 갈게요.”
람세스가 만류했다. “얘들아!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밥은 먹고 가야지. 얘기도 들어봐야 되고!”
“잘 지내니까 걱정 마세요.”
세루크가 디트리히와 람세스 앞에 섰다. “비켜 주실래요? 집에 가야 해요. 선생님이 기다려요.”
지크가 다시 흐느꼈다. “비켜 줘! 가라고 해.”
디트리히와 람세스가 마주보았다. 지크가 손을 저었다. “됐어. 비켜 줘. 그냥 가라고 해.”
둘이 말없이 비켜섰다. 어느새 눈물이 다 마른 세루크가 앙리를 안고 건조하게 인사했다. “잘 지내요! 스승님. 집사님. 형도.”
앙리가 흑흑 울며 말했다. “형! 잘 지내!”
“앙리!”
지크가 앙리의 손을 잡았다. “하루만 있다 가라!”
앙리가 눈물 젖은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의 가슴이 찢어졌다. “하루만?”
“하루만 있다 가. 응?”
지크가 세루크의 어깨를 애타게 잡았다. “하루만 있다 가. 딱 하루만.”
“안 돼.”
“하루 가지고 그래. 내일 말을 사다 줄게. 그럼 제 시간에 갈 수 있잖아.”
“이제 와서-”
세루크가 말을 삼켰다. “가야 돼.”
“세루크!”
디트리히가 화를 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길래 그래? 1년 6개월만에 형을 만났잖아! 하루만 있다 가!”
“안 돼요. 안 그러면 잘려요.”
“그럼 다른 직장 잡아! 이런 일도 이해 못해주는 직장이면 다니지 마!”
“형.”
앙리가 애원했다. “하룻밤만 자자. 응? 다시는 못 보잖아.”
앙리가 세루크의 단단한 목을 붙잡았다. “형이 너무 불쌍해.”
세루크가 앙리의 볼을 매만졌다. “그럼 딱 하루만이야.”
“알았어.”
지크가 세루크의 등을 껴안았다. “세루크! 고맙다. 저녁은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없어?”
그의 등에 지크의 온기가 느껴졌다. 무뚝뚝한 세루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가 고개를 저어 눈물을 말려 냈다. “딱 하루만 있을 거야.” 그가 계속 말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야.”
다섯은 뚱한 분위기로 저녁을 먹었다. 디트리히와 람세스는 세루크와 앙리에게 계속 이것저것 캐물었고, 세루크는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이기만 했다. 지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외식을 하기엔 민망했다.
세루크는 저녁을 먹자마자 앙리를 데리고 칼같이 방으로 올라갔다. 보다 못한 지크가 그를 따랐다.
“정말 내일 갈 거야?”
지크가 매달렸다. “일주일만 더 있으면 안 돼?”
“안 돼.” 세루크가 차갑게 거절했다. “한 달 후에 딥스로트에 배가 있어. 시간을 맞추려면 바로 가야 해.”
“정말?”
“그래. 아버지하고 형을 마지막으로 보려고 온 거야.”
세루크가 강경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갈게. 배웅할 필요 없어. 아침도 안 먹고 갈 거야.”
지크가 눈물을 삼켰다. “꼭 그 배를 타야 하니?”
“라노르 선생님이 꼭 타야 한다고 했어.”
“왜?”
“곧 전면전이 있을 거랬어. 전면전이 터지면 못 가.”
세루크가 침을 삼켰다. “이건 진짜 비밀이야. 세 달 후에 침공이 있을 거랬어.”
지크가 입을 벌렸다. “라노르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진국의 게릴라들이 말해 줬대. 페라보라 마을은 이미 게릴라들이 접수했어.”
세루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페라보라 태수가 게릴라들에게 넘어갔다고.”
지크가 이를 악물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어쩔 수 없어. 페라보라 지방군은 너무 약해서 게릴라들을 못 이겨. 형네 자카룸도 못 이길 거야. 군에서 나와. 이다볼 군에 있으면 다 죽어. 진국이 이를 갈고 있대.”
세루크가 지크의 손을 잡았다. “형. 군인을 그만둬.”
지크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다 우리가 약해서 그래.”
“아버지 같은 소리 하지 마. 아버지는 평생 그런 생각 때문에 힘들어했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버지가 약한 게 아니고 나라가 약한 게 문제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크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세루크.”
앙리의 커다란 눈이 그렁거렸다. 지크가 앙리를 껴안았다. “얘는 수영도 못하는데, 배가 가라앉으면 어떻게 해!”
세루크가 차갑게 말했다. “그럴 일 없어.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면 지금 당장 돌아갈 거야!”
“그 배는 제대로 된 배가 맞아? 너희를 팔아넘기면 어떻게 해!”
“라노르 선생님도 같이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아는 경로야. 이미 페라보라 사람들은 많이 갔어.”
“많이 갔다고?” 그제서야 오스카르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내가 맡겨 둔 애는 어떻게 하신대?”
“최대한 고쳐 보신대. 출발할 때까지.”
“병은?”
“많이 고쳤어.”
지크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응. 걸을 수는 없을 거래. 그래도 말하고 볼 수는 있대. 할아버지가 엄청 좋아했어.”
“그랬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지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알았어.”
“도대체 그 애는 누구야? 형. 혹시 그 애, 형 아들이야?”
“무슨 소리야.”
“너무 닮았잖아, 형하고.”
세루크가 실눈을 떴다. “안나 누나의 아들은 아니지?”
지크가 침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친구 아들이야.”
세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모든 걸 다 얘기할 수는 없지. 형도 형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이제 형도 우릴 잊어.”
세루크가 지크의 얼굴을 잡았다. “더 이상 우리한테 매이지 마! 그 동안 형이 우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아. 이제 그만하면 됐어. 이제 우릴 더 이상 책임지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지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통곡했다. “어떻게 그래!”
세루크가 지크를 껴안았다. “이제 우릴 잊어. 안나 누나도 잊고. 군생활도 그만하면 오래 했어. 이제부턴 행복하게 살아. 스승님이 옆에 있으니까 형은 걱정 안 할게.”
“너희는 어떻게 하려고! 진국에서 얼마나 힘들겠어.”
“나 스승님께 배웠잖아. 어딜 가서도 먹고 살 수 있어. 앙리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세루크!”
지크가 흐느꼈다. “제발 가지 마라. 부탁해.”
“가야 해. 아버지의 유언이야.”
“우리가 이길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은 없어. 이미 대세는 기울었어. 형의 전략 체계도엔 안 나와 있나 보네.”
“세루크.”
지크가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세루크가 지크를 번쩍 일으켰다. 이제 그는 지크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훨씬 컸다.
“잘 지내, 형! 이제 이별이야.”
세루크가 지크를 꼭 안았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자. 그 때까지 건강해야 해!”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건강해야 한다. 얘들아!”
마음에 드셨다면 추천&선독&댓글 부탁합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