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권위와 긍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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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권위와 긍지(7)
아케메네스 장군의 사표가 지크의 손에 들려온 날, 드라마스 대원수는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했다.
지크는 밤 늦게까지 드라마스 대원수와 술잔을 주고받는 영광을 얻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원수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영광이었지만, 세루크와 한 판 싸우고 난 지금은 드라마스나 베르단디 같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좀 짜증스러워졌다.
드라마스의 집무실을 밝힌 등불이 바람결에 일렁였다. 드라마스가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검사들이 대령님께 심하게 하진 않았고?”
지크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다치진 않으셨습니다.”
“너는 많이 다쳤나?”
“괜찮습니다.”
드라마스가 채찍 자국이 난 지크의 턱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개새끼들.”
드라마스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다 내 탓이다. 기회가 왔을 때 누나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마음이 약해서 때를 놓쳤다.”
“아버지는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저도 모릅니다.”
드라마스가 흥 하고 웃었다. “모른다?”
지크가 턱을 악물었다. “정말 모릅니다.”
“세루크하고 앙리만 같이 갔나?”
“네.”
“세루크 그 녀석이 칼을 잘 쓴다고는 들었지만 앙리는 어린애 아니냐.” 드라마스가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치시면 안 되는데.”
“대원수님은...”
지크가 술김에 물었다. “대원수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드라마스 대원수가 지크를 똑바로 보았다. “네 아버지가 내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서 괜찮다. 내가 스승을 팔아서 대원수 자리를 보존했구나.”
“아버지의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군은 대령님이 사표를 내서 잠잠해졌지만 행정 쪽은 다르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을 놈들은 안 믿는구나.”
드라마스가 이를 갈았다. “특히 무와틸리 같은 벽창호들은 들은 척도 안 하더구나. 베르단디 누나를 죽이고 싶다. 그 미친년이 자기 욕심 채우려고 나라를 두 조각 냈다. 행정부와 군부가 완전히 등을 돌렸어.”
지크가 버럭 화를 냈다. “바우돌리노 재상님은 왜 아랫사람 관리도 못하는 겁니까? 왜 장관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거죠?”
“아랫사람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냐? 네가 나중에 어디 한번 해 봐라.”
지크는 오렌 중위를 떠올렸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크.”
“네.”
“내가 오렌 중위를 죽여서 날 원망했지?”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넌 군에 충성을 다하더구나. 넌 대단한 놈이다. 인정한다. 대령님이 사람 하나는 잘 본다니까.”
“중위님이 죽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으니까요.”
“그 훈장 아직도 갖고 있나? 보여줘.”
지크가 오렌 중위의 3급 무공훈장을 정복 앞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드라마스가 오렌의 훈장을 어루만졌다.
“오렌 같은 충신을 죽이다니. 내가 죄인이다!”
드라마스가 눈물을 흘렸다.
“난 태자 자격이 없다. 보겐자 산에서 브리태니커의 새싹들이 일곱이나 죽었다. 황실 친위대도 산산조각이 났다. 난 대원수 자리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태자가 되겠느냐?”
“왕자님!”
지크가 외쳤다. “설마 베르단디 공주에게 태자 자리를 주실 작정입니까?”
“그럴 리가 있냐?”
드라마스가 이를 갈았다. 드라마스의 이빨이 불빛에 빛났다.
“베르단디 그 년이 왕이 되면 앞뒤 없이 군대를 몰아 전면전에 들어갈 것이다. 진 제국은 우리나라보다 강해. 우리나라는 베르단디의 대에 망할 것이다.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본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방법이 있다.”
드라마스가 지크를 바라보았다. “무슨 방법이요?”
“알고 싶으냐?”
지크가 세루크와 싸웠던 일도 잊고 드라마스의 손을 잡았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넌 네 자리로 돌아가라. 전략 체계도를 계속 짜야지. 그것도 중요한 일이야.”
드라마스가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엄하게 말했다.
“이것은 국사다. 지크. 내가 디트리히와 아케메네스 같은 충직한 군인들을 국사에 개입시킨 것을 얼마나 깊이 후회하는 줄 아느냐. 내가 그들의 충심을 정치 싸움에 희생시켰다. 이제 어떤 브리태니커 졸업생이 군에 들어와 조국에 충성하겠느냐. 다 내 탓이다.”
“왕자님.”
“너희는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정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다시는 군대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 내가 베르단디에게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라마스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다시는 아케메네스 대령님을 못 보겠지. 대령님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진 제국으로 망명하고 싶어 하시면 나한테 말해라. 도와주마.”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냥 해 본 말이다. 내가 베르단디의 손에서 대령님을 지켜줄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냥 흘려들어라.”
지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포기를 하겠느냐? 내가 포기하고 싶다고 포기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왕자의 자리가, 대원수의 자리가 너무나 버겁구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드라마스가 주먹으로 탁자를 몇 번이고 내리쳤다.
“아케메네스 대령님 없이 베르단디를 당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해야지. 해내고 말겠다.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은 국사다!”
지크가 외쳤다. “제가 군을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넌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라. 베르단디의 정치 놀음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최대한 너희들을 지켜 주마. 내 약속하마. 너희들에게는 절대 피해가 없게 하겠다.”
“왕자님.”
“대신 부탁이 있다.”
드라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지크를 일으켰다.
“너에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지.”
“네.”
“나에게도 그렇다.”
“네?”
드라마스가 두 손으로 지크의 볼을 붙잡았다.
“자카룸 정글에 내 아들이 산다.”
“네에?”
지크가 깜짝 놀랐다.
“왕자님!”
“내가 실수를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여자에게 아이를 갖게 하고 말았어.”
드라마스가 속삭였다.
“올해 세 살이다. 지크.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만 듣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 폐하와 베르단디가 눈치 챌까 봐 자카룸 정글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애는 흰무늬심충병을 앓아서 걷지도 못한다. 내가 죽으면 나 대신 그 애를 지켜 다오.”
지크가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미안하다!”
드라마스가 눈물을 흘렸다.
“조금 전에 내 입으로 너는 국사에 개입시키지 않겠다 했지만, 아케메네스가 없는 상황에서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드라마스가 지크의 두 손을 붙잡았다.
“약속해 다오. 내가 죽으면 나 대신 그 아이를 보살피겠다고!”
“아이 이름이 뭡니까?”
“아이의 이름은 오스카르다.”
“오스카르.”
지크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오스카르 왕자.
드라마스가 더 놀라운 소리를 했다. “네 어머니가 보겐자 산에서 사냥을 했다지. 내 어머니는 원래 황후 전하의 호위병이었다. 국왕 폐하와 관계하여 나를 낳은 후, 궁에서 도망쳐서 보겐자 산에서 사냥을 하며 숨어 살았다.”
지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네?”
“우리는 형제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 얼굴을 똑바로 봐라. 닮지 않았느냐?”
지크가 아무 말도 못했다. 드라마스가 지크의 앞에 앉았다.
“잘 봐라. 내 얼굴을!”
“왕자님!”
“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연인과 함께 고향인 보겐자 산에 도망쳤다. 나는 고아원에 버려 버리고 연인의 새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황후의 추격병에게 잡혀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 국왕 폐하께서 직접 해 주신 이야기야. 네 어머니가 널 낳고 바로 돌아가셨다고 했지?”
“그런-”
“거짓말이 아니다.”
드라마스가 지크의 어깨를 흔들어 댔다.
“네 마음을 얻으려고 지어내는 게 아니야. 지크! 정말이다.”
“그럼 제가...”
“내 얼굴을 봐. 우린 어머니의 얼굴을 물려받았어. 봐라! 내 어머니의 초상화다! 부왕께서 주신 거다.”
드라마스가 책상에 있던 여자의 초상화를 지크에게 보여주었다. 지크가 벌벌 떨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봐라. 넌 내 형제다. 지크! 잘 봐! 어서!”
지크가 바닥에 엎어졌다.
“지크! 지크!”
드라마스가 지크를 흔들어 댔다. 지크의 정신이 끝없이 멀어졌다. 고문을 당해 약해진 몸을 공격하는 술기운 때문일까,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봤다는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같은 핏줄을 만났기 때문일까.
“지크, 정신 차려라!”
드라마스가 소리쳤다. 지크가 드라마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 어머니의 뺨을 만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엄마.”
지크가 눈물을 흘렸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
팔콘기사단이 해체된 날, 세레니아는 묵묵히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팔콘기사단이 대놓고 신년회에서 항명을 한 상황에서, 단원들의 부관인 그녀가 군에 남아 있을 자격 따위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이 곳을 떠날 명분이 생긴 거였다.
한 때는 검의 길을 걷는 자신에게 긍지를 느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검의 길이라는 것도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기들에게 느꼈던 동지애, 보겐자 산에서의 격렬한 전투도 모두 한 때의 꿈 같았다.
굳이 디트리히에게 인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디트리히 곁에는 세레니아 대신 언니가 있을 테니까. 디트리히는 곧 자길 잊어버릴 터였다. 세레니아도 자유롭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에네레실은 동생이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세레니아는 모아둔 돈을 자루에 담아 침대 위에 놓았다. “언니가 써. 이별 선물이야.”
에네레실은 발을 모으고 서서 치맛자락만 꼭 붙들었다.
짐을 다 싸고 나자 세레니아가 물었다. “언니, 디트리히가 잘해 주는 것 맞지?”
에네레실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손에 든 수첩을 접었다 폈다 했다.
“내가 없어도 디트리히하고 같이 있을 수 있지?”
에네레실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있어. 디트리히는 좋은 애니까 잘해 줄 거야. 난 고향으로 돌아갈게.”
에네레실이 수첩에 글자를 썼다. <널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세레니아가 웃었다. “나도 알아. 어쩔 수 없지. 다 그런 거야.”
에네레실이 동생을 껴안았다. 세레니아도 언니를 안아 주었다.
“사랑해 언니. 잘 지내!”
에네레실이 수화를 했다. <언제 올 거야?>
“안 와.”
에네레실이 눈물을 터뜨렸다. <다시는 안 와?>
“이제 안 올 거야. 자유롭게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에네레실이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었다. 세레니아가 언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언니 잘못이 아니야!”
<미안해!>
“괜찮아. 미안한 거 하나도 없어!”
배낭을 멘 세레니아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세레니아가 그녀의 작은 원룸을 휘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이별이다. 이번엔 아무도 그녀를 붙잡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얼른 이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세레니아가 활짝 웃었다. “안녕, 언니! 디트리히와 지크에게 안부 전해 줘. 베르단디 언니한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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