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expressor 님의 서재입니다.

악마 만들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expressor
작품등록일 :
2018.04.09 19:06
최근연재일 :
2018.05.17 21:07
연재수 :
77 회
조회수 :
33,421
추천수 :
65
글자수 :
471,948

작성
18.05.09 16:27
조회
386
추천
0
글자
20쪽

14화. 반각성 - 4, After

DUMMY

론니악을 빠져나오자마자 올려다 본 하늘은 언제 나와 같은 검붉은 색을 하고 있었다.

그 혼탁한 어둠이 마치 지금의 내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 해.......


“하아.......”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아, 조심하세요. 그거 떨어져서 깨졌다가는 큰 일이 날 테니까.”


그 큰일은 내게 일어날 일을 얘기하는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저렇게 무심한 눈으로 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원체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 그보다 이 병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좁은 곳에서 방출을 쓰지 말았어야지.

진짜 얼떨결에 시도한 상쇄가 성공해서 다행이지, 만약 실패해서 어디라도 부딪혀 터져버렸으면 분명 지금쯤 나와 리아에스테는 데모테르님의 약의 실험체가 되어 반쯤은 죽어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데?”


여기선 내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무게 실은 목소리로 알려 둘 필요가.......


“그 안에서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하지만 내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는 듯 리아에스테는 반대로 이상한 걸 물어올 뿐이다.


“.......”


설마....... 하고 일부러 조금 기다려 보았건만 리아에스테는 여전히 그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꿈뻑꿈뻑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결론은 내 질문에는 대답 할 생각이 없다 이거지.

그래, 내가졌다.


“그냥. 별거 아닌 얘기를.......”


“입이라도 맞추신 건가요?”


순간 다리가 휘청하며 유리병을 떨어트릴 뻔 하다가 바로 잡았다.


“가,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어이없음을 넘어, 당황스러움을 넘어 경악하고 말았다.


“예? 세르피리아님께서 남자들이 둘이서 오래 있으면 무조건 성.......”


“아, 아냐! 그거 전부 헛소리! 분명 세르피리아님이 널 속이신거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생각지도 못한 이 대화의 흐름에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물론 책에서 귀족들 간에는 일부 동성 간의 성행위가 일어나곤 했다는 말을 읽어본 적은 있으나....... 으윽, 그 모습을 잠깐 상상해버린 것만으로 속이 매스꺼워져 버렸다.


“세르피리아님께서요? 훗,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가요 그게?

쾌락에 몸을 맡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좀 더 솔직해 지는 게.......”


“아, 아니 그러니까 진짜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그럼 손 정도만 잡았다는 걸로 넘어가 드리죠.”


아아, 이젠 화도 안 난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고 포기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중에 세르피리아님을 만나 뵈면 그때 한번 이 사태에 대해 진중하게 상담을.......


“뭐하세요? 빨리 들어오세요.”


버, 벌써? 하고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리아에스테는 탑의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누구의 탑인가 살펴본 그 문 옆의 상징은.......


“.......”


나한테 이 병을 들어달라고 했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던 것을.

리아에스테가 약을 옮겨 달라고 한 곳이 라니악이라는 걸 말이다.

그 뒤를 따라 걷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안 들어오세요?”


라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무슨 염치로.......


“미안, 난 여기까지.”


“예?”


“가, 갑자기 다른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렇게 사과를 하고 약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마주친 리아에스테의 눈.


“.......”


아무 말 없이 날 노려보고 있는 그 눈에 움찔하며 유리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손이 멈췄다.

이 선택에 있어 여기서 겁먹고 할 자시고도 없는 것이건만....... 그래, 마음을 굳게 먹자.

라니악에 들어가는 건.

리아세스테를 다시 만나는 건.

모든 복수가 끝난 뒤에 하기로 했으니까.......


“.......알았어요.”


그 짧은 시간동안의 망설임이 끝에 다해가는 순간, 리아에스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누그러워져 있어....... 포기해 주는 건가?


“보상이 필요하다 이거군요.”


그 말의 의도를 내가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목 뒤로 향하는 리아에스테의 양 팔.

무언가 꼼지락 꼼지락 하는 듯하더니.......


“저는 바닥이 푹신한 쪽이 좋습니다만.”


그러다 다시 목 뒤에서 양팔을 들어 올리자, 그 손에 잡혀있는 건 두 개의 긴 끈.

그리고 그 끈이 이어져 있는 곳은.......


“당장의 보상이 없이는 안 되겠다 하시니.”


항상 옷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던 그.......


“미, 미안! 내가, 내가 잘못했어!”


.

.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버린 문.

하늘이 보이지 않는 탑의 공동 속에서 나는 홀로 괴로워했다.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이 가득 차, 무거워진 몸을 버티지 못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위태위태 하다.


이 가득 찬 머릿속 생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나 리아세스테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물론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우연히라도 그 잠들어있는 얼굴만이라도 봤다가는........

억지로 짜맞춰 세워놓은 의지가. 목표가. 모두 무너져 버릴까 두렵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봐 버리고 만 리아에스테의 나체.

어렸을 때부터 여성은 보호하고 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리고 그 덕분이랄까? 이곳에 오고 나서도 인간계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살색의 향연을 잘 참아낼 수 있었고 말이다.

어머니께 감사드릴 뿐이다.

그 모든 유혹에 다 넘어갔으면 이미 난 정기를 다 빨려 뼈 밖에 안남아 있었겠지.

하지만........ 리아에스테의 나체를 봤을 때는 눈이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눌러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래, 이전에 리아세스테에게서 자신을 제외한 세르피리아님의 수계자들은 모두 2차 각성을 하여 이성을 유혹하는 기운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분명 그거일 테지.


“로제에스테님? 무슨 문제라도?”


하고 돌아선 리아에스테의 무심한 눈빛에 애가 타고 만다.

자꾸만 그 몸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밑으로 끌어내렸다.

정신 차리자. 나라면 할 수 있다.

다른 악마들은 만나지 않도록 조심히 유리병만을 내려놓고 재빨리 빠져나오는 거다.


“아, 아냐. 아무것도.”


“........”


휙 하고 돌아서 걸음을 계속하는 리아에스테.

자꾸만 그 뒷모습에 빼앗기는 시선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포기.

아아, 안되지 안 돼. 정신 차리자.


“여기요.”


그렇게 번뇌를 계속하며 계단을 올라 도착한 2층.

그 계단이 끝나는 곳 바로 건너편의 문 앞에서 리아에스테는 걸음을 멈췄다.

조심스레 좌우를 살펴보았지만 다행이도 다른 악마는 없는 듯하다.


“여기 내려놓으면 돼?”


그러고 보니 라니악에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마지막 기억이 루나에스테와의 결투 후 였으니까.

그때는 정말 갑작스레 내게 관심을 가진 세르피리아님의 다른 수계자들 때문에 버틸 수가 없어 그대로 뛰쳐나갔었는데.

안 좋은 추억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뇨, 이 안으로요.”


하고 리아에스테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전혀 눈치 채질 못했다.


“........”


내가 로제니악의 방을 되찾기 전까지 쓰던 방이었다는 것을.


“로제에스테님?”


리아세스테의 방이었다는 것을.


.

.

.


하마터면 안아 든 유리병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한 것을 필사적으로 남아있는 이성을 모두 끌어 모아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의 모든 이성과 사고는 이미 다 산화해 버린 지 오래.


“세스티, 약 받아왔어.”


그리고 그 마저도 리아에스테가 내 품에서 유리병을 잡아들어 가져가자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렸다.


“아! 감사합니다. 에스테님.”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운 건 눈앞에 있음에도 믿기 힘든 평소 그대로의 리아세스테의 얼굴과


“오랜만이죠? 로제에스테님.”


인간계에서 있던 일이. 미동조차 없이 쓰러져 있던 그 모습이 모두 꿈이었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같이 날 반겨주는 미소.


“흐음, 잘은 모르겠지만........ 저희 에스테님을 도와 약을 옮겨 주신 것 맞나요? 감사드려요.”


대답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찾아 뵀어야 했는데 말이죠. 저도 정신이 든지 얼마 안됐고 아직 이렇게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서....... 아,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저쪽에 앉으세요. 에스테님도요.”


흘깃 날 쳐다보고 맞은 편 의자에 앉는 리아에스테를 보고서야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어 그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어라, 그 날개. 2차 각성이라도 하신 건가요?”


마주친 그 눈에 뒤늦게 리아세스테가 내게 무언가를 물어 본 거라는 걸 깨닫고 일단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축하드려요! 이제 다음 차례는 저 이려나요?”


하며 지어보인 그 미소. 그 미소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평소와는 달리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옥죄여오는 이 숨 막히는 죄책감의 단두대를.

그 칼날을 묶어 맨 밧줄을 한시라도 빨리 끊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뿐.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데........ 역시 인간계 체험을 다녀 온 경험이 크셨던 걸까요?”


드디어. 드디어 나온 그 화두에 답답할 정도로 간절했던 가슴이 조금 풀리고 그 자리만큼 도피심이 차올라....... 이제 나는 리아세스테가 나를 어떻게 해 줬으면 좋을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저도 기억을 되찾으면 바로 2차 각성을 할 수 있으려나요? 후후.”


그 말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뜨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 다시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방금 들은 말의 뜻이 전혀 이해가질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저, 이상하게도 인간계에 갔던 기억이 하나도 나지를 않아서요.”


그 말이.

인간계에서의 기억이 없다는 그 말이.


“사고로 저와 로제에스테님만 따로 떨어져 이동했다는 말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쐐기가 되어 머릿속에 들이 박혔다.


“잘은 모르겠지만 쓰러진 절 로제에스테님께서 구해주셨다고 하던데.......”


아니다.

그게 아니다.


“로제에스테님도 크게 다치셨다 들었어요. 저 때문에 무리하신 건 아니신지.......”


그런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여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죄송하다는 말씀밖에는 못 드리겠네요.”


미안하다 말해야 할 것도 네가 아니라 나다.


“........”


그렇게 다물어 문 어금니가 아려올 때 쯤.

더는 이 모든 것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리아세스테, 그게.......”


“얼핏 기억나는 건 뭔가 즐거웠던 것 같은 느낌뿐인데요....... 로제에스테님?”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아, 아냐.”


아니, 말하기 싫었다.


“또 뭔가 푸른 것을 봤던 것도 같고, 굉장히 부드러운 걸 만져본 것도 같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비겁하게 도망가는 것일 뿐이다.

지금은 이렇게 우연이 내려준 기회로 지나갈 수 있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들춰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말이에요, 로제에스테님.”


리아에스테가 원망스럽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라니악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리아세스테를 만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다시 깨어났다는 걸 몰랐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인간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지만.

이미 봐버린 건.

흐트러져 버린 마음은.

이제 어쩔 수 없다.

저 미소가 다시 사라지는 건....... 이제 생각하기도 싫다.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잘라버리고 말았다.

끊어버리고 말았다.

묻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푸른 것이라고 네가 느낀 건 아마 풀일거야. 너와 내가 인간계로 이동해 온 곳이 푸른 초원의 위였으니까.”


대답하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에는.


“초원.......이요?”


내가 리아세스테를 버리고 마을로 가버린 일과 다시 돌아온 일.

그리고 성기사를 만나서 있던 일은 포함돼지 않을 것이다.


“응, 지옥과는 달리 바닥은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있고 그 위로 푸른빛의 관록초가 잔뜩 자라 있었지. 관록초가 뭐냐면.......”


그 일들은 나와 리아세스테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

내 얘기가 끝나고 나면........

리아세스테도 나도 인간계 체험을 가기 전의 사이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푹신한 느낌이라는 건 양을 만져봤던 기억일 텐데, 다른 수계자들을 찾아가던 길에 들린 농장에서.......”


그렇게 또 다시 억지로 짜 맞춰 세워둔 다시 돌아오게 될 일상은.


그래, 반각성이다.


일부러 피하고 싶은 기억과 감정들만 모두 마음 속 심연에 묻어놓은.


그래,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2차 각성도 피의 각성도 모두 반각성인 이유를.


그 반은


모두 인간계에 흘리고 돌아와 버렸으니까.






13화. 반각성. 끝.



=================


13화. After


=================



“벌써 알아 온 거야? 이야, 대단한 의욕인데?”


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 보이는 레이셀님.

그 반응에 오히려 이쪽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라고 대충 둘러대며 가져온 약병을 내밀었다.


“오, 이 약이.......”


받아 든 약병을 신기한 것이라도 되는 양 눈앞에 들고 흔들어 보이는 레이셀님.


“단순한 기억 회복약 이라고 하더라구요. 물론 그 강도와 지속시간을 조정한.”


라는 내 말은 듣기나 하신건지 레이셀님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약병만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한마디 하려 입을 연 순간, 먼저 들려온 레이셀님의 목소리.


“호오, 혈소추출연성을 약으로 만든 것....... 이라는 건가?”


“혈소.......추출연성.......이요?”


처음 듣는 단어다.

내 의아한 표정을 흘깃 올려다 본 레이셀님은 피식하고 웃으시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인간 마법사들의 기술이지.

피에서 기억을 읽어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소량의 피에서도 많은 기억을 읽을 수 있게 해줘서 꽤나 유용한 기술이야.

어쨌든 그 원리로 네 피에 담긴 기억을 깨워 잠시 동안 피가 각성한 것처럼 만들어 준다.......라는 거겠지. 하지만 이거.......”


뭐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여차여차한 원리로 이 약이 내 피를 각성시키는 것이다. 라는 알고 싶지도 않은 얘기인 듯하다.


“지속시간을 조정했다. 라는 건 그 각성을 계속 지속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하고 고개 들어 묻는 레이셀님.

하지만 알고 있는 내용이다.

테르에스테가 그 정도도 생각 안했을 리가 없지.


“지속시간을 늘리려면 약을 더 진하게 만들어야 하는데요, 그랬다간 제 피에 담긴 기억이란 게.......”


“폭주해서 이성을 잃는다. 이거지?”


뭐야, 알고 있었으면서 왜 물어본 거야?

어쨌든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하긴, 전해져오는 얘기대로라면 네 피는 인간의 역사만큼의 기억을 갖고 있을 테니까.”


라며 레이셀님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씀을 하시며 고개를 끄덕끄덕.


“음? 그러고 보니 네 날개.”


날개? 그 물음에 나도 당황해 살짝 놀아보니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마법이 풀려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가 아니라 놀라신 이유는 그게 아니겠지.


“이건 리아세스테가.......”


.

.

.


맨 살이 되어버린 등 위를 리아세스테의 손이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그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아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


“.......”


기대 듯 등 뒤에 밀착해 붙은 리아세스테의 숨이.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간질이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리, 리아세스테?”


억지로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뱉어낸 목소리는 가쁜 숨에 막혀.......


“아, 앗 따거!”


“로제에스테님! 움직이시면 안 된다 말씀 드렸잖아요! 또 선이 빗나갈 뻔 했다 구요!”


“미, 미안.”


하지만 알고 있더라도....... 말이 좋아 마법진을 등에 그린 다는 것이지 결국 손톱으로 살을 긁어 파내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이제까지 억지로 참아낸 것도 용한 것이다 라고 따져들려다가.......


“정말, 가장 좋은 건 로제에스테님이 빨리 마법을 배우시는 건데 말이죠.”


라는 말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너무 억울하기에.......


“하지만 마법이란 게 배우고 싶다고 바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따져 물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등 뒤에 마법진을 그려드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리아세스테와의 얘기 중에 나오게 된 등 뒤의 날개 이야기.

솔직히 불편할 뿐이라는 내 말에 리아세스테가 마법으로 숨겨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그리고 이어진 ‘해 드릴까요?’ 라는 물음.

아아,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아프고 짜증나는 일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부탁할게!’ 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앗 따거!”


“정말, 또....... 그래도 다 됐어요!”


하고 등을 찰싹 하고 때리는 손길에 진절머리를 치며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 잠깐만요! 시동은 해야지요!”


라는 말에 돌아 본 등 뒤로는 아직도 날개가 그대로.


“잘 기억해 두세요. 시동어는 ‘셀’.”


순간, 등 뒤가 허전해 진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몸이 균형을 잃고 갸우뚱.

오, 설마....... 하고 거울에 비춰 본 등 뒤로 남은 것은 알 수 없는 문장이 잔뜩 적힌 원형진 뿐.

거짓말처럼 날개는 모습을 감춰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해제어는 ‘다르’ 에요.”


이번에도 리아세스테의 말과 함께 갑자기 등 뒤가 묵직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된 것 같네요. 이번엔 한 번 직접 해 보세요.”


왠지 내가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든다만...... 뭐, 밑져야 본전인 거니까.


“.......셀.”


조심스레 꺼낸 목소리.

그리고 입을 다뭄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날개.


.

.

.


“호오, 하지만 날개는 꺼내 놓는 게 좋을 텐데? 항상 신경 쓰지 않으면 정작 위험할 때 날개가 있다는 걸 기억도 못하는 사례가 많거든.”


일단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는 했으나, 이 날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정말 먼지 한 톨만큼도 없는데다가....... 가는 곳마다 날개에 대해 물어 들 볼 게 귀찮아서라도 해제어를 말할 마음은 절대 없다.

그런 이유로 벌써 해제어가 뭔지도 까먹어 버렸고 말이다.


“수업은....... 언제쯤부터 하실 생각이시죠?”


“흠, 아직은 때가 아니니 당분간은 쉬고 있도록.”


“.......네?”


순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시간이 없다면서. 그렇게 보채는 것처럼 하더니 이제 와서 때가 아니라고?


“아직은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역시나 같은 의미로 어이가 없어 반쯤 넋을 놓고 말았다.

구해오라는 약까지 가져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레이셀님?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씀이.......”


“네 눈. 인간들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도 같달까?”


.......눈?



“ 그 눈이 바뀌면. 수업은 그때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악마 만들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공모전 연재 종료! 공모전 후기 및 향후 계획입니다. 18.05.17 376 0 -
공지 공모전의 끝이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흑흑) 18.05.11 351 0 -
77 16화. 파괴된 우리 - 8, After 18.05.17 353 0 21쪽
76 16화. 파괴된 우리 - 7 18.05.17 345 0 18쪽
75 16화. 파괴된 우리 - 6 18.05.16 526 0 18쪽
74 16화. 파괴된 우리 - 5 18.05.16 602 0 14쪽
73 16화. 파괴된 우리 - 4 18.05.15 341 0 15쪽
72 16화. 파괴된 우리 - 3 18.05.15 328 0 14쪽
71 16화. 파괴된 우리 - 2 18.05.14 472 0 12쪽
70 16화. 파괴된 우리 - 1 18.05.14 337 0 8쪽
69 15화. 시작의 언덕 - 7, After 18.05.13 340 0 28쪽
68 15화. 시작의 언덕 - 6 18.05.12 325 0 10쪽
67 15화. 시작의 언덕 - 5 18.05.12 667 0 10쪽
66 15화. 시작의 언덕 - 4 18.05.11 398 0 15쪽
65 15화. 시작의 언덕 - 3 18.05.11 338 0 12쪽
64 15화. 시작의 언덕 - 2 18.05.10 342 0 8쪽
63 15화. 시작의 언덕 - 1 18.05.10 344 0 10쪽
» 14화. 반각성 - 4, After 18.05.09 387 0 20쪽
61 14화. 반각성 - 3 18.05.09 361 0 15쪽
60 14화. 반각성 - 2 18.05.08 357 0 11쪽
59 14화. 반각성 - 1 18.05.08 372 0 8쪽
58 용어 및 등장인물 설정 18.05.07 342 0 23쪽
57 외전. 켈론스의 기록 18.05.07 373 0 12쪽
56 13화. 영웅의 피 - 3, After 18.05.06 345 0 13쪽
55 13화. 영웅의 피 - 2 18.05.06 360 0 15쪽
54 13화. 영웅의 피 - 1 18.05.05 362 0 11쪽
53 12화. 인간계 체험 下 - 5, After 18.05.05 357 0 11쪽
52 12화. 인간계 체험 下 - 4 18.05.04 361 0 9쪽
51 12화. 인간계 체험 下 - 3 18.05.04 351 0 8쪽
50 12화. 인간계 체험 下 - 2 18.05.03 369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