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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바람 님의 서재입니다.

마법소녀 유리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유모세
작품등록일 :
2016.05.18 00:04
최근연재일 :
2016.12.28 01:54
연재수 :
55 회
조회수 :
9,746
추천수 :
31
글자수 :
449,261

작성
16.06.29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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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사념체

DUMMY

사념체 사건에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외국 기업 오언 파이낸셜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과 의혹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정황상 맞아떨어지는 부분, 즉 사념체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리하의 일족뿐인데 오언 파이낸셜의 대표와 그 기업의 한국 지사장이 일족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전체 희생자의 절반에 가까운 40퍼센트의 인원이 직원 또는 고객의 입장으로 오언 파이낸셜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오언 파이낸셜과 관련된 사람들의 정화석은 다른 희생자들과 달리 치명적으로 탁한 빛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 세 가지 근거를 토대로 오언 파이낸셜이 사념체 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건 지금 학생이자 민간인 신분인 나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나래는 특히 희생자들이 오언 파이낸셜과 관련이 있었고, 그들의 정화석이 탁한 빛깔이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리하와 함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때문에 마음이 영 찜찜해서였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고 성장한 사념체는 마지막에 숙주를 파멸로 몰아간 후 빨아들인 에너지를 어디론가 전송한 뒤 그 자신도 소멸한다. 숙주에게서 빨아낸 에너지의 양에 따라 정화석의 색이 결정되는데, 보통 파멸 직전에 잡힌 사념체가 뱉어낸 정화석이 가장 시커멓다.


그런데 오언 파이낸셜은, 그것을 운영하는 일족의 또 다른 인원들은 자신들과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이 사념체에 의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래는 이 기업에 대한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고객들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직원들이 사념체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면 학생인 리하보다 지사장이라는 데이비드 오언이 먼저 나서서 처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그냥 놔두기만 한 걸까. 모르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또한 일족이라는데, 사념체를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 사념체를 제외한 다른 무엇이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걸까. 표면적 신분인 대기업의 임원, 물론 바쁘고 중요한 일인 건 맞다. 하지만 그걸 핑계 삼으며 기피하기에는 그의 원래 정체와 가진 그 역할이 너무 무겁다. 그의 일족 내에서, 사념체를 이용한 범죄는 최고 사형까지 갈 수 있는 심각한 사항이 아니었던가. 그걸 나 몰라라 버려두고 지구인 흉내에만 몰두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럼 지금으로서 의심해볼 만 한 건 오언 파이낸셜이 사념체 범죄와 어떤 연관이 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모른 척, 알고도 감추려 한다는 방향이다. 이거라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대기업 차원에서 범죄가 벌어지고, 그 대표들이라면 얼마든지 은폐와 증거 조작이 가능할 것이다.


추측은 일단 그렇게 되고 있다.


리하가 사념체를 정화시켰다는 미용실의 조사를 마치고 난 뒤, 은나래는 생각에 잠겼다. 추측을 입증할 수 있는 더 많은 단서, 확고한 증거, 이것을 잡기 위해 3년 동안 리하와 함께 하며 사념체의 뒤를 추적해온 보람이 아주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우선 약간이나마 밀려온 안도감을 위안 삼으며 다음 장소인 여의도로 가기 위해 근처의 지하철로 향했다.


오언 파이낸셜과 혹시 관련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살짝 다듬으며 이것저것을 물어보자 주인 아주머니에게 거의 하소연에 가까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상가 임대료가 작년부터 오르는 바람에 매달 수입의 반 가까이가 임대료, 수도, 전기 요금으로 빠져나가는데 정작 그 수입이 크게 신통치가 않아서, 뺄 거 다 빼고 나면 한 달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다고 말이다. 당장 애들 학원비, 집안 생활비, 내야 될 세금, 보험료, 계산하고 떼고 다 하고 나면 미용실 운영해서 버는 돈으로는 정말 입에 풀칠밖에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한다. 애 아빠와 맞벌이 하면서 버티고는 있는데, 이제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 나중에 대학 갈 것까지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져 온다는 푸념을 거의 수다에 가깝게 늘어놓는 사장이었다.


손님 입장에서 듣는 사장의 푸념이란 대개 듣기 짜증날 정도로 고역스러운 경우가 많지만 나래는 꽤 집중해서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게 많은 사람, 불만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사념체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그 정신이 타락해가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미용실 사장은 요 며칠 동안 우울증까지 와서 힘들었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 우울증을 부추긴 것이 사념체라는 걸 나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푸념을 듣고 난 나래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근처 대형마트 중에 혹시 오마트에 자주 가시지 않냐고.


그리고 사장에게서 생필품 구입을 거의 대부분 오마트에서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오언 파이낸셜이 운영하는 대형 할인점 브랜드가 오마트이고, 그곳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이 사념체에 침식당했다는 건 역시 의심해볼만한 일이었다. 불특정 다수로만 보였던 희생자들 중에 특정 조직과 연관된 점이 있고, 그 연관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나래는 대대적으로 오언 파이낸셜을 조사할 수단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시도해볼만한 지표라면 이걸로 얻은 셈이니까.


미용실에서 있었던 증언에 대해 리하와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여의도에 있다고 하니 그곳 또는 만나기 용이한 다른 지하철역도 괜찮겠지.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리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메시지 대답이 늦는 것도 리하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사념체를 만나 정화하는 중이라면 나중에 확인하는 대로 연락을 줄 테고, 그게 좀 천천히 이루어지니까. 지금은 외계에서 온 공주님과 함께 나간 참이니 그쪽 일도 같이 봐준다면 더 늦을 수도 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얻은 참이지만 나래는 흥분하지 않고 조용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단서라고 해봐야 퍼즐 한 조각일 뿐이다. 더 큰 조각을 찾아 맞춰 가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봐야 한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확실하게, 빠져나갈 길을 주지 않고 잡아야 한다.


사념체 사건의 종지부를 찍어 언니를 달래줘야만 했다. 3년 전의 사건에 영문도 모른 채 말려들어 목숨을 잃은 언니, 은미래의 원혼을.


그리고 언니와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반드시 이 사건을 끝내야만 했다.


* * *


사념체의 파편이 등 뒤에 닥쳐오자마자 피니엘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 자신이 익히고 있는 방어 마법을 쓰려함이었으나, 그게 없어도 몸을 보호해줄 수 있는 보호석을 리하에게 건네받았음을 떠올리고 우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침착하게 사념체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념체는 피니엘의 근처에 오자마자 멈칫하더니, 곧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기 의지 없이 그저 에너지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먹이를 살피듯 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을 뻔했으나, 피니엘의 대응은 매우 침착했다.

갤럭시 블레이드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이보다 더 긴박한 상황도, 더 끔찍한 광경도 숱하게 목격해온 그녀였다. 이런 괴물 같은 존재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신적 면역력을 획득한지 오래다.


그리고 들은 바와 달리 크게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리하가 강조한 그 주의가 다소 과장 섞인 호들갑처럼 여겨질 만큼, 사념체는 단순히 연기가 뭉친 듯한 형태여서 얼핏 보기에 따라선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는 짓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큼은 그랬다.


피니엘은 손을 뻗은 자세로 사념체를 경계하면서 어찌 대처할지를 생각했다. 리하에게 연락해서 사념체가 여기 있다고 알려야 하는데, 연락하는 동안에 사념체가 다른 곳으로 도망칠까봐 걱정이 됐다.

거기다 리하의 전화번호를 아직 모르기도 하고.

주의를 끌어 붙잡아 두는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아, 피니엘은 조금씩 마력을 집중했다. 매직 미사일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거 하나만 가지고 사념체가 완전히 마법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보기는 어렵다. 리하의 마법은 사념체에게 아주 효과적이었으니, 같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이쪽의 마법 중에서도 어쩌면 통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험도 해보고 사념체가 도망가는 것도 막아보기 위해 피니엘은 자신이 배우고 익혀둔 마법 주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잘 통했으면 좋겠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법을 준비하고, 주문을 외워 그것을 발동시키려 한 피니엘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발동은 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인 구현이 되지 않았다. 생성된 마력이 그냥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허무한 느낌만이 들면서, 아무리 해도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피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당황해버렸다.


“어? 왜 이러지?”


다시 한 번 사념체에게 마법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피니엘은 자신의 마력을 체크해보았다. 마법을 구현할 만한 체내의 마나 저장량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상태만 놓고 보면 최고의 컨디션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 남아도는 마력으로도 마법이 구현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점을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피니엘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용을 쓰는 동안, 마치 기회를 노리는 것 같던 사념체가 마법 발동 주문에 맞춰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간 것이었다.


“아······.”


그 순간 마치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시야가 팍 꺼져버렸다. 귀가 멍멍해지고, 몸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들면서 방향감각이 사라졌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피니엘은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 피니엘의 앞에 하얗게 빛나는 구체가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피니엘이 우선은 안도를 느껴 그 구체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자, 그녀의 머릿속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속삭이듯 울려오는 그 목소리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왜 그런 것인지, 미처 따져보지도 못하고 피니엘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어 그 속삭임에 빠져들어 버렸다.


그 속삭임은 피니엘을 향해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자기 사정을 풀어놓는 독백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인 젊은 남자의 이름은 이승후. 연령 31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현재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고시생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시 공부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간다. 남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천재가 아닌 이상, 한때 제아무리 수재 소리를 들었어도 일차 합격을 보장할 수 없다. 재수, 삼수를 기본으로 깔고 가며 매년마다 늘어나는 경쟁자들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평균 500대 1의 경쟁률. 살아남지 못하고 낙오되는 이도 많지만 새로이 도전하는 이들 또한 많아 경쟁률은 이보다 더 높아질지언정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 속에서 이승후는, 나는, 대체 언제 끝이 날지, 아니 끝은 고사하고 희망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진흙탕 속을 4년 째 헤매고 있다.


시작은 좋았다. 법학과에 합격하고 군복무 2년, 대학과정 4년을 거치고 나니 26세라는 한창의 나이였고, 젊을 때 승부를 보기 위해 바로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는 것은 알지만, 삶의 오랜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검사가 되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 할 관문이었다.


고시 준비 1년차. 첫 번째 시험에 낙방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1차에 합격하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시험이다. 좀 더 준비해서 다음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할 수 있도록, 흐트러지지 않고 다시 피 나는 노력에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방의 월세를 부모님께서 대주고 계신다. 필요한 생활비와 용돈도 지원을 받고 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달마다 꾸준히 들어오는 돈을 보고 나태함과 엉뚱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나는 아예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부모님께 은혜를 입고 있으니까 다음 시험에는 꼭 붙어야지. 다음 시험 경쟁률은 더 높아질 텐데, 공부 안 하고 딴짓 하고 싶은 생각이 드냐, 생각이? 독서실 주위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술이다 게임이다, 허송세월 보내는 고시낭인들이랑 똑같이 되고 싶어?


2년차에는 붙는다. 만에 하나 2년차에도 안 된다면 3년차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는다. 그래야 한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공부해 왔으니까.


당당하게 대한민국 검사가 되는 거다. 사회악들을 걸러내어 질서와 신뢰를 회복하는 정의로운 검사가 될 것이란 상투적인 관용문구는 필요 없고, 그저 내 할 일 열심히 하며 부모님께 보답한다는 소박한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소박함을 장차 원대하게 품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검사를 선택한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내 뒤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은희의 그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려면 다음 번 시험에서 반드시 합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2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주위에서는 위로를 건넸다. 원래 한두 번 만에 붙기 어려운 시험이라고, 다들 3수 하고 4수 하면서 어렵게 붙는다고,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는 붙도록 노력하는 되는 거라고,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나이도 이제 스물여덟이 되었다. 특정한 수입원도 없이 공부에만 매달리며, 가족들의 지원만 받아먹기에는 너무 눈치가 보인다.


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머니는 내게 그 사실을 되도록 알리지 않으려 했던 것 같지만, 결국 병원 진료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일평생 덤프트럭을 몰고 다니며 기사로 일을 해 오신 아버지는 오랫동안 중장비를 운전하면서 얻은 피로로 인해 허리가 좋지 않으신 편이다. 최근의 진료로는, 더 이상 트럭을 몰고 다니면 허리디스크로까지 악화될 수가 있다고 한다. 중장비 특성상 진동이 많고, 핸들 한 번 돌리는 데도 상당한 힘이 필요한 일이니 허리가 안 좋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거기서 디스크까지 악화된다면, 중장비 기사로서의 수명은 사실상 끝이라 봐야 한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다음 번 시험에는 붙어야할 텐데. 힘들게 벌어서 보내주시는 돈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떨어지면 내 자신에 대한 실망보다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리는 것이 더 무서웠다.


붙어야 한다. 붙어야 한다. 붙어야 한다.


하지만 3차 합격자 명단에도 내 이름 이승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불합격인 것이다. 부모님께 불합격 사실을 알려드리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는 괜찮으니 1년 더 잘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셨지만, 이제 아버지의 허리는 한계상태다. 1년이 아니라 당장 내일 트럭 몰고 나가다가 힘을 이기지 못해 증상이 더 악화될 수가 있다.

부모님께 더 이상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만이라도 내 힘으로 벌기로 했다. 1분도 낭비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공부 시간을 줄이고 셋방 근처의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어서, 일을 하다가 짬짬이 시간을 내어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일이 끝나면 학원, 그리고 독서실. 잠은 하루에 3시간. 바쁠 때는 수면시간조차 지키지 않았다. 다음 번 시험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잠이 오냐, 잠이?


은희는 오빠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아르바이트 그만하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권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은희 역시, 부모님처럼 나를 뒷바라지 해주며 내 곁을 지켜주었으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이니까. 보답하는 길은 하나, 다음 번 시험에 합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4번째 시험은 그러한 노력조차 헛되게 떨어지고 말았다. 3차보다 등수와 점수가 훨씬 더 떨어진 처참한 성적으로. 아르바이트의 영향인 것 같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서른이다. 아무 성과도 얻은 것도 없이 빛나는 20대의 청춘이 이대로 저물어버리는 것이다. 시험에만 합격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나는 참고서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기필코······!


전보다 더 공부에 매달렸다. 수면도 거의 취하지 않고, 남들이 정말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만큼 공부에만 매진했다. 다음은 없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수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워가면서.

그런 내 모습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은희가 어느 날 내게 이별을 통보해왔다. 오빠는 점점 변하는 것 같다고, 이상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고,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더는 오빠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해왔다. 이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서로 헤어지는 것에 의견을 맞췄다. 은희 역시 기약 없는 내 상황을 감당하기에 한계가 왔겠지. 몇 년 더 있으면 은희 역시 서른이 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르는데, 아직까지 앞날과 비전이 보이지 않는 내 옆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요구하는 건, 사랑을 건다 해도 잔인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은희와 헤어졌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스며들어온 우울함을 잊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다. 매달리려 했다.


하지만 이별의 충격은 내게도 크게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공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결국 병원에서 디스크 판정을 받고 트럭기사를 은퇴했다는 소식에도 덤덤하기만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남보다 몇 배는 더 많이 공부했다고 자부하는데, 왜 하는 일마다 죄다 실패를 겪기만 하는 걸까. 불공평하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기만 했다.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봤다. 뭣 때문이지? 뭐가 원인이야?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됐지?

이제 서른하나가 됐다. 수입은 없고, 고시준비생이라는 탈을 쓴 백수 신세.

뒤를 돌봐주던 가족에게서도 힘을 빌릴 수가 없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까.

옆에서 지켜주던 연인 또한 없다. 헤어졌으니까.

시험 합격도 장담할 수가 없다. 눈에 불 켜고 죽어라 공부해도 안 됐는데, 먹고 살 걱정 때문에 공부할 시간마저 줄어든 지금 합격이라니, 꿈도 못 꿀 일이다.


그 빌어먹고 더럽고 엿 같이 어렵기만 한 시험, 잘나빠진 꿈 하나 쫓겠다고 몇 년 동안 삽질한 대가가 이 꼬라지라는 것에 기가 막혀 온다. 내가 뭘 잘못했지? 뭘 잘못한 거야? 시험 몇 번 떨어졌다고 의지할 데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신세가 됐다니 뭐 이런 좆같은 개······.

욕이 나온다. 분노에 치어 다 쏟아내지도 못할 것 같은 쌍욕들이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다. 내가 몇 년 동안 이어왔던 그 처절한 노력들이 아무 쓸모없는 헛짓거리였다는 게 화가 난다.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이, 나조차 모르는 새에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왜 이렇게 됐지? 이 모든 게 누구 탓이지? 나는 정말 죽어라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흩어진 게 무엇 때문이지?

은희 때문이다. 나를 그렇게 버려두고 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옆에서 참아줄 수는 없었던 거야? 나를 조금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던 거냐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어떻게 나를 버리고 갈 수 있었지?


은희를 찾아갔다. 직접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를, 아니,


그년한테 풀지 않으면 이 분노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다. 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이 나를 버리고 가서 이렇게 된 거라고. 내 옆에서 조금만 더 참고 손을 잡아줬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 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줬으면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다고.

지가 조금 힘들다고 나한테 모든 책임 있다며 덮어씌워놓고 쓰레기 버리듯 버려버린 송은희란 이름의 쌍년은, 새로 만나기 시작한 또 다른 남자와 시시덕대고 있다. 나 따위는 이미 예전에 다 잊은 듯 보인다. 용서할 수 없었다.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 찾아가서 웃어? 그러니까 행복해? 응? 행복하냐고, 이 개년아.

이런 년은 죽어야 돼. 죽어 마땅하다고.

맞지?

내 생각에 동의하지?

동의하잖아.

그 여자는 살려둘 가치가 없어.

그러니 죽여.

죽여.

죽이라고.

칼을 구해. 그걸 들고 그 여자를 찾아가. 그 썩어빠진 얼굴을 그어버려. 배를 갈라. 가슴을 찢어. 심장을 도려내서, 두 번 다시 팔딱거리지 못하게 씹어 먹어 버려.

통쾌할 거야. 그걸로 네 복수는 끝나.

그러고 난 다음에,

심장을 찔러.

그 여자를 죽이고 공포와 환희와 두려움과 쾌감에 주체할 수 없이 뛰어오르는 네 심장을 찌르라고. 네 삶에 있어 그것보다 더 큰 보상과 편안함은 없을 거야.


가서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그리고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그걸로 넌 해방되는 거야. 보잘 것 없었던 네 삶은 그로 인해 찬란하게 빛날 테니까.

내 말을 따라. 나를 믿어. 또 다른 네 자신을 믿으라고. 나를 믿잖아? 너를 믿잖아?


죽여.

그리고 죽어.


“······!”


독백이 끝남과 동시에, 그 말에 동화되어 지배된 피니엘은 어느새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찢을 듯이 할퀴어대고 있었다. 죽으라고,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찢어발기라는 정체모를 누군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피니, 괜찮아?!”


그때 눈앞으로 환한 빛이 닥쳐왔다.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동작이 멈춰버린 피니엘의 시야가 다시 환하게 트였다. 의식이 차츰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걸 느끼고 나니, 어느새 피니엘의 앞으로 창백하게 굳은 얼굴의 유리하가 있었다.


작가의말

사념체에게 침식당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묘사해본 이번 화였습니다만...
일단 사념체를 뿌리고 다니는 범인이 개객기란 점은 증명된 것 같다고 볼 수 있으려나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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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념체 16.06.29 168 1 23쪽
12 단서의 추적 16.06.23 113 1 14쪽
11 단서의 추적 16.06.22 120 1 13쪽
10 Pair 16.06.16 113 1 17쪽
9 Pair 16.06.15 102 1 18쪽
8 일족의 후예 16.06.09 110 1 15쪽
7 일족의 후예 16.06.08 127 1 23쪽
6 망국의 황녀 16.06.02 184 2 23쪽
5 망국의 황녀 16.06.01 154 2 17쪽
4 신비한 것과의 조우 16.05.26 160 3 14쪽
3 신비한 것과의 조우 16.05.25 169 3 17쪽
2 비가 오는 날 +4 16.05.19 347 4 20쪽
1 프롤로그 16.05.18 440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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