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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바람 님의 서재입니다.

마법소녀 유리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유모세
작품등록일 :
2016.05.18 00:04
최근연재일 :
2016.12.28 01:54
연재수 :
55 회
조회수 :
9,753
추천수 :
31
글자수 :
449,261

작성
16.05.19 00:06
조회
347
추천
4
글자
20쪽

비가 오는 날

DUMMY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리 거세진 않으나, 끊기는 일 없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아 성가셨다. 오후쯤이면 날이 개겠지,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기분이니까. 우산을 쓰고 있어도 땅바닥에서 튀는 빗방울과 물 고인 곳 밟을 때마다 질척하게 젖어가는 신발 밑바닥의 감촉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스트레스에 불과할 것이다.


“장래희망이라는 거 말야, 빠르게 정하면 정할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 양말 다 젖었네.”


비 오는 날의 그런 부정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은 건 유리하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물웅덩이를 잘못 밟는 바람에 젖어버린 신발, 그리고 양말을 그 자리에서 차례로 벗어던지는 행동과 그 얼굴에 다소 짜증이 어려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데?”


옆에서 나란히 우산을 쓰고 가는 소녀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리하는 젖은 양말을 교복 상의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어버리고는 대답했다.


“난 아무래도 나중에 크면 뭐가 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을 한 적이 없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거든.”


그리고 내친김이라 생각했는지 아예 가방에서 삼선슬리퍼 한 켤레를 꺼내 젖어버린 운동화와 바꿔 신었다. 학교에서 실내화로 쓰는 슬리퍼지만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그런 구분 따위 알 게 무엇인가.


“집에 가면 씻고 옷 갈아입고 내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좀 해야겠어. 지금처럼 이렇게 비오는 날······.”


갈아 신은 운동화를 가방 속 신발주머니에 곱게 집어넣어두었다. 이렇게 해서 맨발에 슬리퍼, 그 위로는 교복인 뭔가 날라리스러운 차림이 되었지만 리하는 그런 모양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사념체 정화시키고 다니며 고생할 바에야 미래를 위한 비전을 미리 준비하는 게 내 인생에 있어 몇 배는 더 이득이지 않을까.”


그리고 마치 깜박 잊었다는 듯, 양말 쑤셔 박은 교복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다가 거기서 만년필 비슷한 무언가, 또 작은 보석 비슷한 무언가를 꺼내고는 옆에 있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잘 생각해봐, 나래야. 우리는 올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이지?”

“응, 그렇지.”

“내년이면 고3이야, 고3. 인생에 있어 최초로 지나가는 지옥의, 사실 지금 우리가 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옥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게 훨씬 더 심해진다는 거잖아.”

“왜 벌써부터 그렇게 열을 올리고 그래. 저번 중간고사 때문에? 시험 망쳤어?”


고개를 갸웃하는 친구의 반응에 유리하는 어색하게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힘차고 빠른 손놀림으로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나는 앞으로의 인생이 공부와 등급으로 정해진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왜 학교에서의 성적만으로 내 모든 것을 평가하고 또 받아야만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던가, 그런 건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학생시절 성적을 최우선으로 끼워 맞추고 평가를 하는지 세상의 그런 기준에 신물이 나려고 그래.”

“살아가는데 있어 성적이 전부인 건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필요도 없는 요소는 또 아니지.”


담담한 지적에 다시 유리하의 동작이 딱 멈춘다. 이번엔 말소리조차 제대로 못내는 리하를 향해 은나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성적을 최우선으로 놓지 않고, 리하가 장래에 되고 싶은 건 그럼 뭔데?”

“그걸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성적도 고려 안하고, 장래에 되고 싶은 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하고······.”


그쯤에서 은나래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너 진짜 커서 뭐가 되고 싶은 거니?”

“그러니까 그걸 고민해야 하는데······.”

“고민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마저 빼앗아가는 이 바쁜 생활에 숨이 탁 막혀서 나도 답답해 죽겠어. 학교에서는 공부, 학교 끝나면 학원, 학원 끝나면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또······.”


숨이 탁 막힌다고 말은 했지만, 유리하의 눈빛은 그와 정반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나이대의 청소년들이 다 그렇듯 공부 아닌 취미활동에 돌입하기 직전에 보여주는 그런 생기 가득한 눈동자였다.


“마법소녀 노릇까지 해야 하니 말이지.”


말로는 답답하다면서 눈은 반짝이는 모습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은나래가 웃었다. 리하 역시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답하고는, 만년필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작은 보석을 끼워 넣고는 다시 닫았다.

그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리하의 몸 전체에서 눈부신 황금빛의 광채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광채는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또 휘감으며,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빠르게 바꾸어 놓고 있었다.

사실 유리하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여고생, 이라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160대 후반 정도로 키가 큰 것은 그렇다 쳐도, 외모에서 이질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햇빛과도 같이 찰랑이는 금발이 그렇다. 염색이 아닌 본래의 머리색으로,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느낌이다.

금발 아래 선홍색의 눈동자는 그냥 있으면 무척 차분하게 보인다. 선을 확실히 그려주는 높고 오똑한 코나, 길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턱은 동양인보다 서구권의 미녀 이미지에 더 가깝다. 더해서 풍만하기 그지없는 가슴과 매끈한 곡선의 허리, 높은 언덕처럼 이어지는 엉덩이까지를 보면 또래는 물론 어지간한 성인여성들조차 압도할 만큼 유혹적인 자태이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 북유럽계의 백인소녀가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장난스럽게 눈빛을 반짝이고 있으면, 어른스럽고 의젓해 보이는 외모와 그 분위기를 완전히 밀어낸 발랄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가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이제 변해가는 중이다.

아까 젖어버린 운동화 대신 신고 있는 슬리퍼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작고 하얀 맨발을 짙은 주홍빛의 무늬로 아로새겨진 흰색의 롱부츠가 감쌌다. 그 위의 교복치마 또한 사라지고 주홍빛의 다른 스커트로 바뀌어있지만 그 전환은 너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마치 카멜레온이 색을 바꾼 것과도 같은 느낌이다.

교복의 연회색 블레이저 역시 먼지처럼 스르르 사라지고, 드러난 그 아래의 하얀 블라우스는 사라지지 않은 채 형태만 바뀌었다. 어깨 부분이 작고 둥글게 부풀고, 넥타이가 변화하여 리본의 형태로 가슴 앞에 내려오면서, 유리하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또 황금빛 무늬의 하얀 장갑이 부드럽게 감싼다. 그리고 뻗은 손을 그대로, 유리하가 허공의 만년필을 잡자 그것은 만년필의 형태에서 길다란 지팡이로 변화했다. 지팡이 끝의 장식에는 그녀가 이렇게 변하기 직전에 집어넣었던 분홍빛의 보석이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 마법소녀라고 말했던 것처럼, 유리하는 정말 마법과도 같은 변화를 거친 끝에 친구인 나래의 옆에 내려섰다.


“역시 피곤하니까 얼른 끝내고 집에 갈래.”


변신을 끝마친 유리하가 나래를 돌아보며 에고에고, 엄살 섞인 신음소리를 내었다. 나래 또한 쓴웃음을 짓고 리하의 어깨를 살짝 떠밀며 말했다.


“너는 이렇게 마법소녀로 활동하는 거 즐기기라도 하지, 난 뭐니 대체. 너 도와주느라 덩달아 집에 늦게 가잖아.”

“자기도 좋아서 따라와 놓고는.”

“네가 너무 덜렁대니까 걱정이 돼 보살펴주러 온 거야, 걱정이 돼서.”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소녀를 오히려 걱정하는 나래의 분위기가 심각했다. 아마 이전에도 비슷한 잔소리를 여러 번 해봤고, 그때마다 유리하가 듣지 않은 듯하다.


“뭐 이런 걸로 걱정을 하고 그래. 금방 끝나는데 뭐.”


그게 뭐 대수냐는 듯 흘려 넘기는 지금 리하의 행동이 그 의문을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게 없다는 듯, 유리하는 지팡이를 들고 앞을 향해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오늘은 비도 내리고 있지만 시간도 많이 늦었다. 이미 12시가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조금 더 있으면 버스고 지하철이고 막차 시간이 지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리하의 푸념대로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왔다가, 학원이 다 끝나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대에 리하와 나래는 잠시 학원가에 머물러서 사람이 뜸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다니고 있는 학원가의 한 건물 옥상에서 사념체의 존재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유리하는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남들 몰래 학원건물 옥상으로 올라와 숨어있는 사념체를 찾아냈다. 나래도 친구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돕기 위해 그런 리하를 함께 따라왔다.

덕분에 둘 다 학원 버스를 놓쳐버린 상황이지만, 마법소녀인 유리하의 입장에서 그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념체를 그냥 놔둘 경우, 그것으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생한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망가뜨리는 건 기본이고, 그로 인해 인간을 폭주시켜 큰 사고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하는 그것을 막기 위한 마법소녀로서 이미 몇 년 전부터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 밤에도, 사념체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숙주가 된 누군가를 구해주려 하고 있다.


“누가 자꾸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유리하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건물 옥상 전체에서 수십 줄기의 회색빛 연기 같은 것들이 피어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들짐승과도 같은 무리를 이루며 리하와 나래의 주위를 포위해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념체 심어두는 거 걸리기만 해봐. 가만 안 둬, 진짜.”


으스스한 광경에도 리하는 전혀 겁먹지 않고 지팡이를 들어 한 번 더 휘둘렀다. 그러자 사방의 연기들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울리며, 회오리치듯 유리하의 지팡이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팡이 끝의 분홍빛 보석이 환히 빛나며 그 연기들을 모조리 빨아들였고, 사방에서 한 점의 연기도 남지 않게 됐을 때 유리하가 무언가를 쳐서 떨어뜨리듯 지팡이를 한 번 떨쳤다.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허공에 빛나는 작은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지며, 거기에서 회색빛의 보석이 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색이 엄청 탁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쌓인 게 무지 많은가봐.”


그 보석을 집어 들고 살피며 유리하가 말했다. 나래는 그 옆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거들고 있다.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하잖아, 지금의 현대 사회는.”

“그래도 너무 탁해. 제대로 된 정화석 되려면 숙성기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보석을 들고 공깃돌처럼 휙휙 던지고 놀면서, 유리하는 변신한 모습을 풀었다. 황금빛 머릿결은 그대로이나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던 마법소녀에서 교복에 양말 벗고 삼선슬리퍼 신은 날라리틱한 여고생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리하는 회색빛 보석을 양말 집어넣은 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우겨넣으며 말했다.


“끝났으니 이제 집에 가자. 잠도 오고 배고파.”

“그래야지. 그런데 이번엔 내가 도와준 게 하나도 없네.”


한 게 아무 것도 없어 시무룩해 하는 나래를 리하가 달랬다.


“도와주는 거 없이 끝나는 게 오히려 좋지. 위험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잖아.”

“그렇기는 한데, 잘못해서 네가 고생하는 일 생기면······.”

“나는 괜찮으니까 본인 몸 관리나 잘 하셔. 나는 일하다가 잘못되더라도 우리 엄마가 전직 마법소녀니까 도움 받을 수 있지만 네가 잘못되면 누가 도와주니.”

“그땐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나래의 태연한 대답에 리하는 일부러 뭔가를 계산하는 척 하다가, 장난스런 웃음으로 친구를 돌아보았다.


“우리 집까지 택시 타고 가자. 택시비는 네가 내고, 대신 나는 우리 집에서 야식이랑 잠자리랑 갈아입을 옷이랑 목욕탕을 빌려줄게. 어때?”


나래의 대답은 핸드폰 들고 집에 연락하는 걸로 대체되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 리하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들어갈게요. 괜찮잖아, 내일은 휴일이라 학교 안 가는 걸. 응, 알았어요. 내일 집에 일찍 갈게요.”


그리고 리하 역시 집에다 따로 연락을 취했다.


“엄마, 나 지금 나래랑 집에 들어갈 거야. 나래랑 같이 공부하고 자려고. 그래도 되지? 응, 응, 알았어. 그리고 야식 좀 시켜줘. 나 지금 배고프니까······, 엄마 잠깐만. 나래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12시가 넘어간 시각이라 야식 먹는 것이 매우 걱정된다는 표정이었으나, 나래는 뭐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리하의 질문에 대답했다.


“피자.”

“엄마, 나래가 피자 먹고 싶대. 라지 한 판이랑······ 괜찮아, 우린 한창 먹을 때잖아. 하루 정도는 야식 먹어도 살 안 쪄. 그리고 찌더라도 마법으로 다시 되돌리면 돼. 얼마나 편해. 라지 한 판이랑 스파게티도 두 개씩 추가해서······ 스파게티는 엄마가 해준다고? 안 돼! 가뜩이나 요리도 못 하면서! 무조건 시켜놔야 돼, 알았지? 주방에는 얼씬도 말고!”


어머니를 향해 엄포를 놓듯이 말한 리하는 바로 내려가지 않고 옥상에 잠시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휴일 전의 평일 밤이란 대개 요란한 법이라 학원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번화가 쪽은 불빛들이 휘황찬란했다. 반대쪽의 주택단지들은 대개로 조용한 편이고,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었다.


“왜 그래, 리하야?”


나래의 말에도 잠시 대답 않은 채 리하는 굳은 표정으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에게 기생하여 그 정신을 빨아먹고 마지막에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사념체.

그것들이 나타난 지 이제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목적이 무엇인지, 누가 연관되어 있는지,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기간은 정확히 12년. 그 12년 동안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아직 이렇다 할 단서조차도 잡히지 않은, 이 사념체들을 이용한 ‘범죄’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걸까.

‘일족’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고, 애꿎은 ‘지구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이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리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냐.”


나래의 물음에 뒤늦게 답하고, 리하는 친구와 함께 옥상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찜찜했다.

사념체의 존재 그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들이 출몰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길을 가다 몇 번씩이나 마주칠 정도로 말이다. 그 수가 오죽하면 일족에서 아직 어린아이인 유리하까지 동원해 사념체의 정화를 시키고 있을까.


“힘들 것 같네······.”


학원 옥상에서 내려오며 유리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냥 이유 없이 해보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비록 자학 반쯤 섞인 데다 자칭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마법소녀로서 이런 일을 해온 것이 어쩐지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사념체와 그걸 처리해야 하지만 언제나 부족한 인원수는 서로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기분을 주기에 충분하다.

씁쓰름해지는 마음을 애써 떨쳐보았다. 그냥 내가 너무 부정적인 것뿐이겠지.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뿐 아니라 어른들도 다 같이 고생하는 걸.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곧 집에서 푸짐한 야식과 목욕,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완전히 불안함이 가라앉지는 않아, 유리하는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정말 아무 일도 없기를.


* * *


쏟아지는 빗줄기에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지치고 배고픈 것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소녀는 너무 다급했다. 마음이 불안한 정도를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응답해, 아무도 없어? 누구든 좋으니까 대답 좀 해줘.”


늦은 시각이라 행인도 드물고, 야간 택시들과 어딜 다녀오는 것인지 모를 자동차들만 부지런히 오가는 어느 거리에서 소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비슷한 물건에 대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발······ 누구 없어? 설마 나 혼자만 떨어진 것처럼 보이려고, 다들 장난으로 침묵하는 거라면 나중에 그냥 안 둘 줄 알아.”


그렇지만 원하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녀는 울상을 지은 채 절망적인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응답해, 갤럭시 블레이드. 응답 바람, 갤럭시 블레이드. 멤버 누구라도 좋아. 통신 듣는 대로 응답 해줘.”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눈앞이 캄캄한 기분에 소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분홍빛의 장발이 소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비로 인해 젖어버린, 교복과도 비슷해 보이는 옷 위로 역시 젖은 머리칼들이 달라붙자 소녀는 거추장스러운 듯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흔치 않은 머리색에 이어, 흔치 않은 미모를 지닌 얼굴이 드러났다. 열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나이지만 소녀답게 화사하고 귀여움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젖은 옷 위로 볼록하게 솟은 가슴과 날씬하게 들어간 허리가 드러나면서 귀여워 보이는 얼굴에 더해 요염함까지 보태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무슨 인종인지, 단정을 내리기가 매우 애매했다. 피부도 무척 하얗고, 얼굴의 형태가 뚜렷한 걸 보면 백인에 가까워 보이지만 짓고 있는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 어딘지 동양인과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그렇다고 혼혈이라 보자니 외모의 개성이 참 뚜렷해서, 굳이 어디라고 짐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그 소녀는 이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곧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택시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어느 주택단지 앞에서 내린 다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대답 없는 통신을 시도했다.


“부탁이야. 누구든 좋아, 대답 좀 해줘. 니슈티? 하셀? 이오? 정말 아무도 없는 거야?”


일행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에 더해, 한참 동안 비를 맞고 돌아다닌 탓인지 이제는 몸까지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봄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일교차가 있는 5월의 밤, 그것도 비가 내리는데 오랫동안 얇은 제복차림으로 돌아다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이렇게 되면 여기가 거기이기만을 기도해야 하나.”


암울하게 중얼거린 소녀는 계속해 골목길을 걸어갔다. 목적지가 따로 있기라도 한 듯.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나름의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그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소녀는 아까보다 더욱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부유해 보이는 2층 주택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소녀는 울음을 터뜨리듯 중얼거렸다.


“틀렸네······. 전부 다······.”


더 이상 버티는 것에 한계가 온 소녀는 그 집의 대문 앞에서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늦은 시각이라 나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직 그치지 않은 빗줄기의 한가운데에서 소녀는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작가의말

작중에서의 묘사에 따르면 주인공 리하양은 백인에 가까운 혼혈, 그리고 금발거유라는 모에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맨발과 교복... 흠...
너무 노린 설정이 되어버린 걸까요(...)

이런 리하양과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할 친구 나래양, 그리고 초반 스토리를 이끌어나갈 것 같아 보이는 정체불명의 소녀가 등장했네요. 의외로 초반은 어둡지 않고 정말 마법소녀다운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일단 다음주에 더 진행시켜보겠습니다, 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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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5 모듈라
    작성일
    16.05.22 22:09
    No. 1

    아아ㅠ일부러 몰아서 보려고 몇달간 문피아를 끊었거늘! 어째서 그토록 고대하던 유리하랑 3학년 1반은 2개밖에 안올라온 걸까요ㅠㅠ1달만 더 참을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6 유모세
    작성일
    16.05.22 22:26
    No. 2

    글쓴이도 사람인 이상(...) 일주일에 두 편씩 네 편 올리는 게 한계였습니다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Diei3
    작성일
    16.05.23 17:28
    No. 3

    프롤로그로 유추를 하자면...
    일족이 사념체를 지구인한테 뿌리고
    정화석을 회수하면서 힘을 기르는 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6 유모세
    작성일
    16.05.23 17:50
    No. 4

    그렇게 되면 지구인들은 본격 일족의 가축이 되는 셈이네요ㄷㄷ
    리하양이 그 일족의 후예로 보이는 암시가 나온 상황에서, 정화석 회수란 일을 하고 있다면 이 아가씨의 정체성은 대체... 무섭습니다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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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단서의 추적 16.06.22 120 1 13쪽
10 Pair 16.06.16 113 1 17쪽
9 Pair 16.06.15 103 1 18쪽
8 일족의 후예 16.06.09 110 1 15쪽
7 일족의 후예 16.06.08 127 1 23쪽
6 망국의 황녀 16.06.02 185 2 23쪽
5 망국의 황녀 16.06.01 155 2 17쪽
4 신비한 것과의 조우 16.05.26 160 3 14쪽
3 신비한 것과의 조우 16.05.25 169 3 17쪽
» 비가 오는 날 +4 16.05.19 348 4 20쪽
1 프롤로그 16.05.18 440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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