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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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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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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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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권 (36)

DUMMY

"그다지 강하다는 평가는 못 내리지만, 그 만하면 충분히 나중이 밝을 걸? 후우···. 섬세하지 못한 것은 재능보다는 경험이니까."

"그런가요?"

"허나 그런 체력을 가지고 살수를 한다는 것은 조금 아까운 일이긴 해서. 그거 뭐냐, 막대한 양으로 물량을 찍어버릴 수 있다, 는 단순무식한 게 전략이 될 수 있잖아? 살수는 그게 아니된다고."

"은밀히 처리한다는 게 전제니까요."

"아까워, 무진장 아까워. 지휘관이었으면 역전의 용사, 그런 거 되는 거 아니었나?"


'용사', 처음 듣는 호칭은 아니었다. 그간 듣지 못했다지만, 소환당했을 때 들었던 인상깊은 말을 잊을 수는 없었다.

단어 자체가 쓰기 어려운 것은 아니고, 의미가 그리 어렵지는 않으니까 리자드맨이 이와 관련되었다는 전개는 과장이었다. 약간 거슬릴 정도로 단어 선택에 있어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 다른 데로 팔려나가지 않고 대련만 주구장창 재밌게 하면 좋겠다. 돈 같은 거 안 받아도 충분히 살 자신이 있는데···."

"살수는 은퇴를 못하나요?"

"이 전쟁이 끝나면 은퇴를 올릴 수 있지. 그 전에는 하도 문제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만 해서 우리에겐 그렇다 할 자유가 없단다."

"그거, 여기에 들어올 때 알려줬나요?"

"들어올 땐 안 알려주지. 내가 물어봤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행동은 잠재워졌다. 지친 게 다 사라졌다고는 말은 못했다. 여전히 않아서 무기력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은퇴하고 우리 고향으로 올 의사는 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요. 고향에 특별한 게 있나요?"

"우리 마을은 그게 있거든. 같은 휴먼이라도 나쁜 휴먼이 있고 좋은 휴먼이 있다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 네가 가면 미움받진 않을 거야. 전~부 다가 그러지는 않긴 해도 편안히 살 수 있을··· 걸?"

"예상인 거죠?"

"그래. 요즘엔 모르겠다! 옛날에야 팔려나가다도 경유해서 들리긴 했는데, 근래에는 그 근처로 간 적이 없어. 혹시 모르지. 내가 없는 사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걸? 이러면 추천이 아니게 됐네."


어떤 희망적인 유혹이라도 항상 따라붙는 '전쟁이 끝나면'이란 전제에 지겨워지지 않기 힘들었다. 이러다간 전쟁이 끝나면 세계 제패라는 어마어마한 계략도 성사될 것 같아서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것에 대한 기쁨은 없었다.


"돌아갈까요?"

"아, 땡땡이 치고 싶긴 한데···."


땡땡이라는 말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언어 관련된 문화충격에서는 학습이 되어서 별 반응은 안 했다.


"이대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아니면, 이거 어떠냐?"

"뭐를요?"

"정확히 엿새 뒤에 성으로 돌아오는 거지. 나흘 뒤의··· 초저녁까지. 어때?"

"대련을 하겠다는 거군요."

"너, 성장하고 싶은 거 아니야?"


이건 '전쟁이 끝나면'이란 가정이 없어도 되는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의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오랜만에 아군으로 만난 적수가 내 욕구를 들어준다고 하면 거절하는 게 이상했다.




엿새이라는 시간을 맞춘다고 노력하니 못할 것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임무를 완료해서 리자드맨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살수의 역할을 다해도 되는 건지 괜히 죄책감이 들 정도로 내가 했던 어떤 임무들보다 침착함은 온데간데 없고 서두르기만 했었다.

그래도 완료할 수 있다면 충분할 거라고 나 혼자 타협했다. 이걸로 약점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상관 안 할 뚝심이었다.

리자드맨과의 대련 및 수련은 갈수록 즐거워졌다. 나뭇가지라는 제약이 없어지니 마구잡이로 내가 뒹굴어도 대련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나한테는 쾌감이었다.

마조히스트란 소리는 아니었다. 단지 리자드맨이 우려했던 대로 나의 블루드의 양은 무한이라고 믿어도 될 정도로 지칠 수가 없었다. 유효타를 내가 내려고 해도 그 전에 맞기만 하다가 리자드맨이 지쳐 그만하는 게 정석이었다.

여전히 섬세한 제어는 못한다는 평가. 거듭할수록 살수와는 안 어울린다는 게 자각되었다. 그러니 저런 평을 깨부수고 극복하는 것이 얼마 없는 재미 중 하나였다.

대부분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잘하려고 한다는 것이 싸이코패스 같다고, 아예 생각 안 한 적은 없었다. 내가 윤리적으로 결백하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책임 회피였다.

어떻게든 정당화할 수 없는 게 살인이다. 누가 죽여도 된다고 해서, 게다가 과거의 행적에 어마무시한 일까지 있으니 죽여도 죄가 없을 것이다, 국가에 대한 대의를 위함이다, 설령 가장 함무라비 법전 같으면서도 왠지 동일한 가치로 보이는 친족의 복수까지 살인은 나쁜 짓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어마무시한 죄가 있다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죽인 것인 살인조차 어마무시한 일이지만, 어떤 살인자는 잘 살아있기도 한다. 죄가 있다고 해서 살인이 통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아니, 결국에는 승리한 살인자가 있기 때문이다.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무한한 살인의 굴레는 벌어지지 않는다. 복수가 복수를 낳아도 언젠가는 도덕이란 것이 정화하여 굴레를 깨뜨리게 만든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살인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다. 다른 의미론 혁명가이기도 할 테다.

그러나 살인자가 승리자라고 자칭을 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복수가 들어오지 않아도 살인의 무게는 크다고 느껴야 한다. 그게 굴레를 끊은 대신의 주어진 숙제다.

돌고 돌아 운명론이다. 죽어도 운명이고 살아도 운명이다. 살수일 때 죽었으면 그건 타당한 일이었다. 목숨의 경중이 없으니 내가 죽인 수백 명하고 비교하면 의식을 잃기 직전에 안타깝다 여겼을 것이다.

한참 전에 돌이킬 수 없어진 병사나 살수나 블루드를 연마하는 건 제 본분을 다하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승이 되어 도망치라는 건 부질없었다. 실제로 그런 방법이 있긴 했다. 절이 있어 가지고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평생 이곳의 절은 가보지도 않았다. 갈 일이 뭐가 있다고.

오로지 수련을 위한 시간들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렀기도 했다. 중간에 임무를 제때 완수하지 못해 못 만나는 불상사가 있었긴 했지만, 그러면 8일까지 맞추면 된다는 마음이 통했는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돈독해져도, 이름은 알지 못했다. 여전히 리자드맨이라 칭했고, 그의 입장에서 나는 휴먼이었다. 이름이 쓸모가 있는지 의심할 정도로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신기한 건, 한 계절이 지남에도 나머지 살수 2명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매번 엇갈리는 건지, 죽었는지, 혹은 임무가 장기인 건지.

리자드맨의 대답으로는 각각 하피하고 드워프라 했다. 엘프인 로브까지 더하면 종족 할당제라도 있는 듯했다.




달력은 매일 보고 있었다. 12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감탄해서 곧바로 밖을 보았다. 쌀쌀해서 실내에서도 로브를 입고 있긴 하다만 눈이 내리지 않는 탓에 겨울이란 감상이 와닿지 않았다. 늦은 가을이라고 보이게끔 성내의 나무는 굳건히 노랗게 물든 잎을 가지에 놔두고 있었다.

이런 추울 때 노숙할 수밖에 없는 임무가 나오면 죽어도 하기 싫어진다. 그러나 그게 어떤 임무인지는 결국 가야만 알 수 있기에 고달팠다.

숙식의 방법은 지역을 많이 탄다. 리자드맨의 고향처럼 휴먼을 반기는 곳이 있냐 하면, 반대로 절대 휴먼을 사절하는 지역도 있어서 그렇다. 문지기가 문저박대를 하는 경우도 있고, 여관 주인이 휴먼은 안 받는다면서 내쫓기도 한다.

두 가지 선택지다. 다른 마을에서 숙식하거나 앞서 말한 것처럼 노숙을 하거나. 보통 상황이면 후자가 많이 나온다. 전자는 거의 불가능이다. 차별이란 건 지역감정이랑 일맥상통해서 그 마을이 그러면 주변 마을도 그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숙에도 나는 블루드를 활용해서 해답을 찾았었다. 동면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서 방어막을 전방위로 생성한 '요람'을 쳐서 그 속에서 자는 것이었다. 자고 있어도 블루드가 꺼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했다. 블루드가 무한인 것 같은 게 거짓이 아니라 가능했다.

말로만 들으면 쉬워보여도 고생길이었다. 땅을 적당히 잘 파는 것부터해서 숨구멍을 따로 만들어야하는 아찔함에 여관이 편하긴 편했다. 저래서 돈을 받고 재워주는 것이 아니냐, 깨우치게 되었다.

노숙이 가능하다곤 해도, 임무를 안 받고 빈둥거리고 싶었다. 옆방의 리자드맨은 이미 어제 출동했으나 나는 이대로 사흘을 더 버티고 싶었다. 이것도 나름 직업병이었다.

지겨울 것 같은 그 발소리가 또 들려왔다. 로브의 것이었다. 나머지 방에는 아무도 없으니 보나마나 임무표의 목적지는 나였다. 안락했던 나날들이 없어진다는 것에 침대에서 몸부림쳤다.

오기로 문을 막기로 했다. 잠금쇠는 어차피 로브 앞에서는 제 구실을 못할 테고, 내가 직접 문을 막았다.

그간 리자드맨과의 수련에서 터특한 기본기가 있었다. 블루드를 점토처럼 흐물흐물하게 하여 구현에 있어 유연성을 더했다. 패시브라 딱히 명명할 것은 없지만, 그나마 하자면 비유대로 '점토'였다. 점토를 문에 붙여 아예 봉쇄시켰다.

툭, 툭, 툭

밀어서 열려는 로브의 손길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브의 블루드가 문 사이로 통과해 내 블루드와 접촉했다. 그걸로 로브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열어줘."


까놓고 말해서, 이게 무슨 소용인가. 별 의미없는 행동에 자괴감만 들고 점토를 풀었다. 이런다고 해서 내가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라 로브의 길을 막은 것은 유치한 어리광이었다.


"무슨 장난이야?"


로브가 들어와도 침대에서 베개를 다리에 낀 채로 뒹굴고 있었다. 대답할 마음은 없었다.


"이거나 받아."

"안 주면 안 되나."

"자기만 좋은 소리하네."


임무에 관해서는 물러날 일이 없는 로브였다. 임무표를 내 손에 들이밀어 당장 잡으라는 식이었다. 난 파리지옥처럼 서서히 움켜쥐어 이에 응했다.

무엇보다 숙식을 걱정하는 나이기에 임무표를 받자마자 장소를 탐색했다.

'문원'

서양틱하지 않은 한자어 같은 지명에 썩 달갑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과학적인 증명은 없다만 휴먼 차별이 극심한 곳이 저런 꼭 저런 지명이었다.

선비문화의 고증을 따라가는 것인가 싶게끔 만드는 놀라운 적중률에 벌써 실망했다.


"정말 가기 싫어진다."

"가기나 해."

"노숙할 것 같은 곳에 가야하나."

"네 임무인 걸 어떻게 해. 난 전달해주기만 해서 알 바 아니지."

"문원이란, 이 망할 지역이 어딘지 모르겠다만 휴먼은 푸대접 받을 게 뻔해 보이잖아."

"그래? 거긴 마을에 들어갈 생각조차 마. 살수인 신분에 낙인 찍히고 싶지 않다면."


의외로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는 모습에 비일상을 감지했다.


"아는 곳이야?"

"내 고향이거든."


어정쩡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리 큰 영향은 없지만, 그래도 있으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설픈 상황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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