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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2,995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8 12:22
조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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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권 (18)

DUMMY

"어?!"


놀란 것은 오로지 나만이었다. 식당으로 왔으니 그러는 게 맞는 이치지만, 이곳에서 한밤을 지냈을 사리나 님 또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내 당황한 표정의 시선을 따라 라데르도 목격했다.


"마침 잘 됐군."


나는 그다지 사리나 님에게 엮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그럴 권리는 없을 테니까, 설령 사리나 님이 너그럽게 허용한다 치더라도 내 직속은 라데르이므로 일종의 갈아타는 행위는 부정할 터였다.

그래도 라데르가 직접 사리나 님 맞은 편에 앉는다면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러는 거였다.


"오, 테즈구나. 잘 잤니?"

"잘 잤습니다."


먼저 앉은 라데르는 신경 안 쓰고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무시당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데르는 조금 신경질이 돋은 목소리였다.


"이봐."

"···성명이?"

"이름은 라데르다."

"라데르 씨가 테즈 담당 교관인가요?"


사리나 님의 말투는 급변했지만, 어째서인지 위화감은 없었다. 느긋한 억양과 천진난만한 태도는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왜 블루드를 벌써 가르쳐 준 거지?"


초전부터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전문어를 섞으니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해했다.


"제대로 가르쳐 준 건 아니에요. 그저 있다는 것만 보여준 거지 발현은 아직 거리가 멀다고요?"

"그런 거냐?"


라데르가 급기야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혀 제가 모를 법한 이야기뿐이라 뭐라고··· 말해야 하죠?"

"자의로 못 쓸 진도라는 건 잘 알겠군."


이대로 사리나 님을 선처해주는가 싶었더니,


"그래도 경솔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글쎄요? 차라리 그 편이 검을 휘두르라는 것보다 훨 나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사리나 님은 그 대화를 끝으로 식기를 반납하면서 식당을 떠났다.

라데르는 묘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화났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었다. 나보다 큰 몸집의 파충류의 심상을 읽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블루드에 대해서 궁금하냐?"

"뭐라고요?"

"언어 시간에 알려주마."


그러고는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식사를 하기 시작한 라데르였다. 저 입에 빠른 속도라, 양이 나보다 많다지만 속도를 맞추려면 내가 허겁지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고나서 당장 라데르는 책을 펴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다. 교탁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아하니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게 확 느껴졌다. 어제 내게 벌어진 게 무엇인지 몰라도 경계해야하는 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라데르의 저 반응을 이해 못할 것 같았다.


"네가 어제에 난간에서 떨어졌을 때."

"네, 떨어졌어요."

"무엇을 떠올렸냐?"


그런 질문에 나는 쉽게 당황했다. 답변들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하나같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난잡하고 추상적인 혼란 그 자체였기에 키워드만 콕 집었다.


"죽기 싫다, 내 몸이 으스러질 거다, 살고 싶다, 땅에 닿고 싶지 않다···."


마지막 키워드에서 나 또한 기묘해졌다.


"땅에 닿고 싶지 않았으니까 위로 튕겨올라간 거겠지."


그런 말이었다. 우연히 내 몸의 생존본능에만 맡겨져 멋대로 블루드라는 영문 모를 것이 나를 조종한 거라 생각했지만, 실은 어느 정도 내 의시가 있었기에 반응했다는 소리였다. 뭐, 결국 블루드가 뭔지 아리송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서는 그 년이 닿기 전에 구해주었겠지만, 네가 블루드를 발현한 게 더 기적일지도 모르겠군."

"그, 계속 언급하시는 블루드가 뭔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라데르는 자기 할 말만을 하였다.


"언어 시간이 이젠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넌 글을 읽을 줄 아는 거 아니냐."

"···예."


대답은 확신에 차지 않았지만 실은 반대였다. 당돌하게 말할 수도 있었던 것을 좀 신중했던 태도였다. 이미 이곳의 언어가 유사 한글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해독 못할 글은 없었다. 익숙하지 않아 오래 걸리는 것은 맞다마는 '읽을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제일 두꺼운 책을 꺼내고, 26장으로 넘겨봐라."


제일 두꺼운 책을 꺼내자마자 표지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역사'라고 적혀 있었다. 이 국가의 역사인지 세계 전체의 역사인지 겉으로는 전혀 모를 제목이었다.

26장은 거의 300페이지를 넘겨야 겨우 실체를 드러냈다. 이 시대의 인쇄술로 이런 두께를 만들어냈다는 게 대단했다. 다시 말해 많이 못 만드니까 대물림을 하는 것이겠거니 공감을 하였다.


"'제 26장 - 잊힌 병법의 부활'."


제목만 읽고 라데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하기야 책을 펼쳐놓고 남에게 묻는다는 것은 상식이 뒤틀린 행위였다. 차근차근 책을 살펴보았다.


⌜부활 이전까지의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유실되고 소각된 서적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고의적으로 사료가 파괴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그러나 파괴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확고하므로 이 이상의 망상은 자제할 것이다.

물질적으로 '이 병법'은 전도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언제 소리 소문도 없이 만인 속에서 잊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또한 물질적으로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부활도 되지 않았다면, 미래에까지 '이 병법'은 종말까지 없어져 있을 거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본다. 미지를 말세까지 미지였을 거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그럼 어느 누구가 주장하는 헛스러운 것 또한 실현이 가능한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고쳐 쓰자면 미지인 척하는 유산의 은닉에 가깝다.

그러나 '이 병법'은 은닉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큰 사건의 여파에 의해 단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다. 어쩌면 영향력으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큰 사건이란 '자게라의 해체'였다.

이 대목, '자게라의 해체'는 이전 장에 전혀 나올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민간, 정치, 외교, 어느 곳에서든 이 사건 자체의 영향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게라의 해체'와 달리 '자게라'라는 단체 자체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거의 '자게라' 자체에서 은폐 및 독점하고 있던 '이 병법'을 이용한 그들의 용병 생활은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감정적이거나 편향적인 면모가 없었다. 그래서 앞선 대목에선 잔인해 보이는 게 '자게라'의 실체이나,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의뢰들을 보면 별 볼 일 없는 것도 수두룩했다.

나 역시 그렇지만, '자게라'는 집단의 성과만으로는 이 역사에 등장했든 안 했든 영향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이 있다. '자게라'의 업보 때문에 인과가 형성되었다고 하다는 게 반대파의 주장이지만, 우리가 보는 '자게라'란 포식자가 아니라 탁해도 맑아지게 하는 시냇물에 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시냇물이 '자게라'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래서 '자게라' 자체의 평가를 높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자게라의 해체', 이 사건은 눈여길 필요도 없이 충격적인 재앙이었다. 그들이 조용하게 '해체'했으면 이런 말도 안 한다.

사건의 진상이란, '자게라'가 해체했다는 소식을 가져온 한 휴먼의 난동에 의해서 시작한다. 기록도 못할 정도로 들은 이가 거의 없는 요상한 연설을 나불거렸던 휴먼은 경비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경비원들은 휴먼에게 다가가 질책을 하였다. 이 질책의 분을 못 이겼는지 분노한 휴먼은 즉시 '이 병법'을 이용해 경비원들을 즉각 사살하였다. 이가 일어난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휴먼은 연설을 끝맺음으로서 '이 병법'에 관한 걸 전수받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자신의 자취를 말해주지도 않은 휴먼이었지만, 이를 뒤쫓은 병사도 있었고 시민도 있었다. 그 중 살아돌아온 이는 빠짐없이 그 휴먼을 추종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전하기를, 그 휴먼은 '자게라'의 일원이었고 뒤쫓던 병사들은 몰살 당했으며, 자신은 '이 병법'을 전수받았다고 널리 퍼뜨리라는 스승의 말을 잘 이행하였다. 그렇게 '이 병법'은 세간을 타고 흘러가 심지어 나의 귀에까지도 들려왔다.

'이 병법'이란 '자게라'가 소위 부르기를 '블루드'라고 한다.⌟


그 밖에 더 내용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대충 블루드라는 근본 모를 단어의 출처는 알았으니, 결국에는 역사서인 것을 블루드의 설명서는 아니었기에 나는 초롱초롱하게 블루드의 발현에 궁금하다는 눈빛을 라데르에게 전달했다.


"책에 있는 내용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내용이겠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덧붙여서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네."


내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났지만 어쩔 수가 있나. 가만히 라데르의 뜻대로 되게끔 내 의지는 묻어두었다.

드디어 칠판이 제 쓸모를 되찾는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분필도 칠판 지우개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번에도 칠판은 방치되겠구나, 싶어서 귀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너는 이곳에서 살면서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더냐? 종족 구성 자체가?"

"저 말고, 그리고 사리나 님 빼고 다 타종족인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시국이 이러니 그렇게 되는 거고, 내가 말하는 것은 세계 단위로 말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매우 똑똑한 편이 아니어서 오리무중이었다.


"전혀요."

"당장에 곁눈질로 봐도 나와 같은 바실리스크, 널 잡고 흔들었던 아라크네라던지, 수다 떠는 하피라던지. 그리고 너와 같은 휴먼을 같이 비교해봤을 때 어디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줄여서 종족 우월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쉽사리 라데르가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 이해했고, 더불어서 찬동하는 편이었다.


"바실리스크나 아라크네 정도겠죠."

"바로 그거다. 지능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개체 수가 확연히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바실리스크네들과 휴먼네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게 현실적인가, 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물음이 있었다. 그 책 1장부터 전쟁 얘기가 나올 텐데 그 시작은 보통 이런 물음일 거다."


나는 한 가지 감탄을 했다.


"정말 선생님 같은데요."

"교관이잖냐."


호되게 훈련을 당해서 무식한 교관이라는 인상을 타파하는 장이었다. 이 이후로 라데르가 벌이는 일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다고 빡센 훈련이 용서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건 확실히 지옥이었다.


"하지만, 블루드의 부활은 이 종족들의 기능상의 불균형을 완전히 종결 내버렸다. 문제는 종결과 동시에 우리들이 전쟁을 겪게되었다는 현실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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