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2,956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7 20:57
조회
17
추천
0
글자
11쪽

1권 (15)

DUMMY

그렇게 테즈로 되고 나서는 당분간은 테즈로 불리는 일은 없었다. 왜냐 하면, 라데르는 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테즈라는 의미는 딱히 없는 빈 껍데기의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봤자 '야'가 내게 라데르의 기준에서는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에 물들여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고 무지막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태양력은 쓰더라, 라고 느낀 것은 내 생일을 멋대로 6월 5일이라고 기록한 점에서 알게 되었다. 신분증을 자력으로 독해해 보니 그런 결론이 지어졌다. 내 생일이 12월 5일이라는 걸 말해줬는데, 무려 딱 반년의 차이였다.

근데, 생일이 이름보다 더 가치 없었으면 가치 없었지, 그리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이름에 대해서도 저 지경으로 생각하는데 생일이야 불편하다가도 무심해졌다.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12월이든 6월이든 알게 뭐냐. 여기에서의 생일도 누가 축하해주기 위한 명분일 리는 없었다.

이 날, 3일차에 받침을 배우고 나서 라데르는 '토넴'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가르쳐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으니 정직하게 대답하여,


"널 쥐고 흔들었던 거미의 이름이지."


그 아라크네의 이름이란 말이었다. 만약 내가 오늘에 신분증을 받았으면 받침이 있는 이름을 받기라도 했을까, 와 이어서 터무니없는 이름으로 안 지어져서 다행이라고 끝내 안심하였다.

그러나 라데르가 나를 이름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토넴을 이름이 아니라 '장교님'이라고 불렀다. 계급제가 있는 구조에서 '토넴 장교님'이라고 2음절 덧붙이기보다는 장교님이라고 간결하게 1어절 3음절로 끝내는 게 입에게 편했다. 진정 이러면 도대체 이름이 뭐가 쓸모있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이로써 이름에 대한 잡생각은 그만한다.

3일차 언어 시간의 감상은 이러했다.

이건 명백히 형태만 다른 한글이었다.

받침이라고 배우는 순간 느낌이 왔다. 받침이라 해도 옆으로 늘어서 쓰는 것을 영어랑 다를 바가 없지만, 발음에 있어서 받침이니까 받침이라는 것이 좀 더 어려운 한글이란 느낌이었다.

도대체 창시자가 누구냐고 라데르에게 물으니, 그딴 것까지 알 필요 없다, 고 모르니까 하는 말을 하였다. 초졸에서 그친 학력이라도 이런 언어는 쓰기에 있어서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다. 차라리 한글을 가져다 쓰면 안 되는 거였는지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한글이라고 의식하는 순간 언어 시간은 힐링 타임이 되었다. 술술 교과서 전체를 낭독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져서 금방 10분 만에 하루 분량을 끝낼 수 있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라데르가 바로 다음 시간, 즉 내가 싫어하는 전투 계열 쪽으로 넘어갈 것 같아서 일부러 느릿느릿 속도를 조절해 최대 1시간까지 분량을 뻥튀기했다.

무술 및 검술은 갈수록 심화 과정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검술은 난이도는 상승하는데, 내가 초인도 아닌 걸 하루 만에 제전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누적되어가는 근육통에 그럼에도 분량은 어제와 똑같이 100회를 반복하는데, 여기서 내가 실수로 횟수를 까먹으면 부르는 게 현 횟수였다. 웃긴 것은 낮게 부르는 건 뭐라 안 해도 높게 부르면 임의로 라데르가 말해주었다. 임의라는 말은 정확히 내가 어디서 까먹었는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 더 낮춰부른다는 뜻이다.

3일차의 낮 시간은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다. 보잘 것 없는 일과라 푸념에 불과한 내용들뿐이다. 이 날에 중요한 것은 밤의 일이었다. 밤이라고 할까, 저녁일 수도 있었다. 낮은 종지기의 경쾌한 종명에 언제가 낮으로 바뀌는지 잘 알 수 있을지언정 캄캄해지고 나서는 그런 것은 없으니 가로등도 없는 환경에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 그런 시간에는 훈련생이란 하는 일이 씻고서 잘 준비하는 것밖에 없었으니 더욱 모를 만도 했다. 사실 그 때 잠이란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지쳐서 쓰러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강요이긴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변덕이 생겼다. 그런 감도 있었다. 이대로 잠이 든다면 그대로 눈 뜨자마자 또 지옥 같은 8시간 가량의 훈련을 해야 할 터이니 조금이라도 눈을 뜨자. 그리고 또 하나의 변덕은 주구장창 흙먼지 쌓인 운동장이나, 텁텁하고 갑갑한 돌벽 구조물 안에서만 지내는 게 시각적으로 피폐해졌다는 의미 모를 구실이었다.

이부자리를 피던 도중에 물었다.

"교관님?"

"왜."

"바람을 쐬고 싶어요."

그러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거였다. 고작 3일차밖에 안 돼 놓고서는 바람을 쐰다는 거란,

"탈영을 하겠다는 소리냐?"

"안 말해줘도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내 생각대로 라데르는 경계하고 있었다.

"안 될까요?"

"왜?"

"약간 지겨워서요."

부실하지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100%의 진실로 얘기했다. 그게 라데르에게 전달되었으리란 확실히 보장 없는 대사였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포기할 생각이었다.

"정녕 탈영할 작정이 아니라면 여기 근처의 전망대로 가라."

"요새에 전망대가 있나요?"

"말이 전망대지 망루다. 지금은 쓰질 않는다."

"그렇군요."

"얼른 가봐."

"네?"

"가기 귀찮다."

다시 말해 무방비인 채로 나를 놔두겠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되나요?"

"탈영 안 한다며."

"네."

"가."

명료한 명령이었다. 오히려 그러니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된 듯했다. 조금이라도 제약을 두어 동행이라도 했다면 탈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겠다. 그러나 아예 자유롭게 풀어주니 내가 신뢰를 받는 기분이라 순진하게 그 신뢰따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찌 보면 멍청한 것이기도 했다.

망루에 오르기까지 중간에 누구라도 만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이 요새의 경계 태세는 생각 이상으로 느슨했다. 순찰조가 한 명이라도 없는 건지 한참 말단의 계급의 꼬맹이가 망루까지 오르는 데 제지할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마주칠 수 없었다. 전시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 태도였다.

만든 새는 망루이긴 하다만, 망루라는 게 의미 그대로 망을 보기 위함이니 거기에서 보는 풍경은 전망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나 이 망루의 경우에는 마을 쪽으로 위치해 있어서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을 다 담고 있었다.

당장에 처음으로 성내가 아닌 성외의 풍경을 본 나는 저 마을이 잘 사는 건지 못 사는 건지부터 구별을 하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나는 여기에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견문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할 수 있는 감상이란, 저 마을이 약간 익숙한 게 초등학교 때 체험학습 간 곳이랑 형태는 비슷하다, 그리고 사극에서나 보던 그 마을들과 견주면 우열을 가르기 힘들다, 그 정도였다. 언어 자체가 한글의 파생인 것을 고려하면 건축 형태조차 비슷한 건 예외는 아닌 듯했다.

마을에서 내 눈에 가장 잘 들어온 것은 '인간같은 것'이었다. 나머지가 모조리 타종족이라는 사실은 내게 있어선 고립감을 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인간이기를 빌어 피부색 상관없이 비늘은 없고, 날개도 없는 인간 형태에 눈이 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귀가 멀리서 봤음에도 느닷없이 긴 게 게임에서나 봤을 법한 '엘프'라는 그런 종족이었다는 참담한 결과에 고립감은 짙어졌다.

또, 주정뱅이들의 노숙 장면이라도 난 부러움에 휩싸였다. 비록 비생산적이고 형편없는 짓거리긴 하다마는 결국 여기에선 그런 의미 없는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건 크나큰 악재였다. 이 땐 탈영의 욕구보다는 탈영을 해도 못할 거라는 체념에 가까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농담 같았던 말의 의미가 진심 어리게 다가왔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던 불안은 전혀 그러지 않고 반대로 심해졌다. 아주 짧은 찰나이긴 하다만, 이대로 떨어져서 죽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현실, 이미 여기가 현실이긴 하다마는, 당시에는 아직도 여기가 현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타종족이 있다는 등의 점은 둘째치고, 그리 사랑하지는 않았던 가정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진 곳에서는 상당히 무료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없어도 될 줄 알았더니 없어져버리니 여간 고통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곳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없어지기 전에는 노숙할 수는 없으니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여전히 성숙해졌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요람이 되어 줄 곳이었다. 그러 곳이 없어지니, 차라리 죽는 게 속 편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죽어도 대성통곡할 사람은 없으니까. 라데르에게는 자신의 커리어가 박살나는 거라 미안함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게 가정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뭐랄까. 그래도 죽기 싫다는 건 무슨 심보였을까. 내가 편하지 않다고 죽는다는 전제 자체가 비겁한 것이었을까. 비겁한 게 영리한 거라고 믿어왔던 나에겐 모순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왜 동물들은 자살을 안 할까. 생각해 보면, 자살은 인간의 산물이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로드킬을 당하는 건 어쩔 수 없으나 그렇다고 동물은 못하는 자살을 인간은 한다는 게 갑자기 궁금했다. 그것도 영리하기 때문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혹은 죽는 게 더 이득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 인간이 죽음을 마음대로 택한다면, 죽고 싶지 않아서 산다는 것은 매우 짐슴 같은 사고인 것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살아야 했다. 망루의 난간에서 머리를 앞으로 내밀다가도 심장이 요동치며 나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대로 뛰어내렸어도 현실을 도피하는 거니까 겁쟁이였을 테고, 물러난 결과조차도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니 겁쟁이였다. 어떻게 보나 난 겁쟁이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갈 바에야 죽었으면 현명한 겁쟁이라도 되었을 것을, 보기에는 아직도 뛰어내릴 기회는 있는 것이었으나 심적으로 양자택일의 시간은 지나간 상태였다.

나의 무기력함을 증명하고 라데르의 방이자 나의 침실로 돌아가려 했다. 설령 기계라 하더라도 뒤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몸을 돌려야 하는 걸, 어쩔 수 없이 측면의 장면을 무조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환상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인간같은 것'을 발견한 듯했다. 아니, '인간'이었을 것이었다. 내려다 본 마을 아래가 아니었다. 훨씬 가까웠던 형상이었다. 스쳐지나간 장면이었음에도 크고 뚜렷했었다.

흥분한 나는 재빨리 몸을 90도 돌렸다. 확실히 그것은 '인간'이 맞았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가까이 있었고, 혹시나 '인간같은 것'일까 싶어 귀를 확인하려니 귀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머릿결을 파고 나올 정도로 귀가 뾰족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었으니 엘프, 그런 류는 아닐 거라 보았다.

망루 바로 밑의 성벽을 거니는 한 인간 여성과 난 눈을 마주쳐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1권 (44) 20.07.09 65 0 13쪽
43 1권 (43) 20.07.07 16 0 11쪽
42 1권 (42) 20.07.06 18 0 12쪽
41 1권 (41) 20.07.03 18 0 13쪽
40 1권 (40) 20.07.02 15 0 12쪽
39 1권 (39) 20.07.01 16 0 12쪽
38 1권 (38) 20.06.30 14 0 12쪽
37 1권 (37) 20.06.29 16 0 12쪽
36 1권 (36) 20.06.26 13 0 11쪽
35 1권 (35) 20.06.25 17 0 12쪽
34 1권 (34) 20.06.24 18 0 12쪽
33 1권 (33) 20.06.23 17 0 12쪽
32 1권 (32) 20.06.22 17 0 11쪽
31 1권 (31) 20.06.20 22 0 12쪽
30 1권 (30) +1 20.06.19 35 1 11쪽
29 1권 (29) 20.06.19 19 0 12쪽
28 1권 (28) 20.06.19 17 0 11쪽
27 1권 (27) 20.06.19 19 0 13쪽
26 1권 (26) 20.06.19 17 0 11쪽
25 1권 (25) 20.06.19 16 0 12쪽
24 1권 (24) 20.06.19 20 0 13쪽
23 1권 (23) 20.06.19 18 0 12쪽
22 1권 (22) 20.06.18 16 0 12쪽
21 1권 (21) 20.06.18 20 0 11쪽
20 1권 (20) 20.06.18 17 1 11쪽
19 1권 (19) 20.06.18 17 0 11쪽
18 1권 (18) 20.06.18 16 0 11쪽
17 1권 (17) 20.06.18 17 0 11쪽
16 1권 (16) 20.06.17 17 0 12쪽
» 1권 (15) 20.06.17 18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