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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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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3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2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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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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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권 (32)

DUMMY

받은 돈은 유익하게 썼다. 첫째로 의복이었다. 얼마 안 되는 의복들은 병사 시절에 뒹굴어서 베긴 냄새들로 가득했으니 여간 손빨래로 해결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버리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다지 무생물에게 연을 가지는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딱히 버리는 것에 동조하진 않았다.

한 가지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의복 구매를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필 주요 교통수단이 말이어서 그랬다.

가축이었던 시절을 견뎌낸 고유의 냄새가 아직 있다 보니 승마를 하면 무조건 옷에 전염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위생이 괜찮은 것도 아니어서 살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안고가야 할 문제였다.

둘째로 연고 등의 치료제였다. 블루드로 방어가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한시라도 내가 무적이나 불사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잠잘 때 모기풀을 태운다고 한들 물리는 건 다반사였다. 그 밖에도 모든 벌레에 면역일 수 없는 내가 블루드가 재생 능력을 높이는 것도 아닌 걸 어떻게 할 수 있진 않았다.

그리고 그게 내가 산 품목의 끝이었다. 그 밖에는 욕심이 전혀 나지 않았고, 유흥 거리도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받은 자금에 봉급까지 포함이 되어있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내 여가를 풍족하게 하자는 마인드 자체가 없었다.

살수가 되고 나서 역력히 자각하는 것은, 나는 삶의 마땅한 목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리나 님에게 말한 것처럼 살아있기에 사는 것 같다는 것, 언제라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병사로 사는 것보다는 편하니까 살수로 전향했다마는, 거기에도 무위 말곤 남아있질 않았다.

돈을 위해서라도, 명예를 위해서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도, 어느 것 하나 감흥으로 다가오지 못해 나는 멀리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개인주의조차, 부대장님의 조언대로 제대해서 블루드로 깽판 치고 다니면 못 먹고 살 일은 없을 것을 괜히 살수라는 사슬에 묶여있는 지라 말이 안 되었다. 사실 그 조언이 저런 조언은 아니긴 했다.

내게 살수로의 길을 떠밀어준 것은 확실히 사리나 님이었다. 사리나 님이 블루드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사리나 님에게 반하였으며, 편지가 결정적으로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의 모든 삶이 사리나 님에게로, 가야만 목적성은 확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사리나 님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이 안 되었다. 살수가 되어서 비교적 자유로울 거란 생각은 실현되었다만,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리나 님에게 해줄 수 가 있는 게 전혀 없었다.

그야 정보가 부족했다. 일거수일투족의 ㅇ조차 허락된 정보가 없었다. 편지에도 자신의 신변을 적어놓지 않았고, 반대로 사리나 님도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였다.

막연하고 장황해도 짝사랑은 여전했지만, 그렇기에 상사병이 되는 듯했다. 사리나 님의 직책이나 복무 장소나 나이까지,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필요 없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했다.

오죽하면 그 로브가 사리나 님일 거라는 망상도 했다. 망상에 불과했다. 그 로브조차 정체를 제대로 밝힌 게 아니라서 했던 망상인데, 단 하나만으로 부정할 수 있었다.

전혀 사리나 님의 몸매가 아니었다. 크지 않지만, 그래도 아예 없지 않은 가슴이야말로 사리나 님의 것인데, 그 로브는 평평했다. 조금 이상하긴 해도 시각 정보를 최대한 활용한 증명이다.

상사병은 그런 근거 따위 가볍게 무시했다. 어쩌면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하여 쓸데없는 것에 불태웠다.

몸매는 옷으로 어떻게든 감출 수 있다. 로브도 그런 원리니까 반증 또한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로브의 얼굴을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로브소에서의 행보보다 치밀했다. 세탁, 식사, 씻기를 제외한 나의 하루를 내 방에 나오지 않는 걸로 통일했다. 그 로브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달했을 때는 외출 중이라 오후 추정이고, 회수하러 왔을 때는 11시 부근(해를 보고 계산)이었다. 어떤 이유가 그 속에 있든, 그 로브의 출몰시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막막한 시간이었다. 설낮잠까지 자며 피곤함을 덜어내 그 로브를 기다렸다. 특히나 이번에는 기막힌 설계가 있었다.

문에 잠금쇠를 걸어놓았다. 만약 문을 열려고 한다, 내가 가서 열어준다,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임무를 받기 전에 말을 건다, 그 로브의 목소리를 듣고 사리나 님인 걸 판단한다, 이것이 기막힌 설계였다. 별 거 없어보여도 중학생 수준의 혜안이었다.

이틀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였다. 정오가 지날 무렵, 발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문 앞을 노려보았다.

덜컥덜컥

그 로브가 맞았다. 잠궈져 있지 않았던 전례를 생각해서 문을 열어보나 당연히 잠금쇠에 막혔다. 이제 1단계가 해결되었지만, 순조롭게 계획이 진행된다고 해서 문쪽으로 다가가려했다.

어림도 없었다. 기막힌 건 내 설계보다 그 로브의 행동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였냐면, 스멀스멀 문틈으로 블루드가 기어나온 소리였다.


블루드가 위로 힘껏 올라가더니 매끄럽게 잠금쇠를 쳐서 잠금을 풀어버렸다. 이미 내 문의 잠금 시스템을 완벽히 파악한 것이었다.

덜컹

또 그 로브는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어······."


당당히 내 앞에 와서는 자신이 들고온 임무표를 받으라며 건넸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에 주체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취한 나에게, 그저 받으라며 임무표로 콕콕 내 손을 찔렀다.

저 무례함을 계기로 그냥 화내는 쪽으로 갔다.


"잠겨있는 걸 멋대로 열고 들어오면 화나는데요?"


화내고 있다고 기운을 뿜뿜 풍기면서 대사에까지 화내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진정한 중학생 수준의 표현력이었다.

그러자 로브는 나와의 첫 대화를 이렇게 끊었다.


"업무에 감정 싣지 마."


사과라도 할 줄 알았던 그 로브의 무심한 말에 그만 나는 분개했다. 치가 떨리고 주먹도 떨려 최대한 폭력을 자제했다.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해야지, 사과도 왜 안 하는 건데?"

"받기나 해."


임무표가 더 밀어붙어져 휘어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과를 하면."

"별로 사과할 마음도 없어. 살수라면 다들 이러거늘 너만 이러는 거 아나? 가끔 쉰다고 해서 자위를 하고 있었으면 내가 미안하다 사과를 했겠지. 별 아무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걸 보고 사과를 할 이유는 없어."


이쯤에서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포기했으면 편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거대한 망상에 힘입어 끝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받지 뭐."

"그래야지."


전달해주자마자 로브는 문을 향해 나가려고 했다. 뻔뻔한 태도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어서 얌전히 물러나게 할 생각은 1도 없었다.


"나가지 마라."


열려있는 문에 블루드를 발산하여 방어막을 펼쳤다. 창문 외에는 나갈 공간이 없게 된 로브는 그만 멈췄다.


"그만 해라."


로브도 슬슬 인내의 한계를 느낀 것이었다. 화난 상태는 아니고, 돌변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사과를 하라니까."


이 말도 진절머리가 날 듯한 로브는 금방 체념했다.


"어떻게 사과를 하면 되는데?"


사과를 하는 방법에 대핸 고민한 바가 없었다. 딱히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아무렇게나 말하였다.


"얼굴을 까."

"그게 사과 방법인가?"

"사과 대신."

"제멋대로네."


감정이 실린 과정이었지만, 얼떨결에 본래 목적으로 도달했다. 철통보안은 아닌 로브는 내가 쓴 떼의 보상으로 벗겨졌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로브를 벗기는 목적의 이유는 어디까지나 사리나 님이 맞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거였다.

그렇다면, 굳이 목소리를 들은 시점에서 확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오점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로브를 벗겨내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만이지?"


정확히 얼굴 부분의 후드만 뒤로 제쳐 내 요구대로 해주었다. 일단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듯이 사리나 님은 절대 아니었다. 몸매론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그 전에 로브 속의 숨어있던 얼굴을 인간 여성의 것이 아니었다. 신장이 비슷해서 어렴풋이 눈치를 챘었지만, 엘프의 귀가 보자마자 눈에 띄었다.

엘프인 것도 그렇지만, 가장 눈에 뵌 것은 머리였다. 머리가 아름다워서, 가 아니라 신기해서였다.뾰족한 귀보다 강조되는 이상적인, 비현실적인(이미 비현실이긴 하다.) 백발 혹은 은발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딱히 빛나지는 않으니 백발이었다.


"머리가?"

"이걸 보고 욕을 바로 박진 않네."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발언에 갸우뚱했다.


"욕을 왜 해?"

"고지식한 녀석들은 그렇더라. 얼마 못 산 어린이라 잘 모르는 것 같네."


이쯤되면 억지로 화내는 것도 일이었다. 애초에 여기서 어린이라 들은 것에 대해 화내는 게 자폭 행위라 이에 대해선 별 말 안 하였다.


"선천적이라는, 그런 건가?"

"이제 보여줬으니까 열어줄래?"

"···약속은 지켜야지."


문에 펼쳐놓은 방어막을 거둬들였다. 보자마자 로브는 다시 얼굴을 숨긴 채로 방을 나서려고 했다.


"잠깐."


뭔가 아쉬워서 말로 로브를 세우려고 했었다.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에서 이젠 말을 잘 듣고 반응하는 로브를 봤다. 그러나 아쉬운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 나는 막 내뱉었다.


"이름은?"


로브는 시원스레 말해줬다.


"알려줘봤자 내게 좋은 것은 없잖아. 우리끼리 이름을 공유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나?"


섭섭해도 저게 맞았다. 살수 전반적인 활동에서 이름을 함부로 알리는 건 명백히 금기였다. 그건 동료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리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고, 반대로 유리한 정보를 얻어가는 것이 사명인 만큼 로브도 이름을 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두었다. 분위기상 사명감이 아니더라도 안 알려줄 것 같긴 했다마는 애써 태연하게 임무표나 바라보았다. 어쨌든 로브가 사리나 님은 아니었으니까 해프닝으로 감정을 무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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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권 (33) 20.06.23 1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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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권 (31) 20.06.20 2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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