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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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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1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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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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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권 (24)

DUMMY

"테즈."


보따리에 용무를 끝낸 나를 바로 불렀다.


"뤼펠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뤼펠에게서 해산 통보를 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 해서 다 끝난 줄 알고 마음 놓고 있던 게 잘못이었다. 뤼펠과도 마무리 해야하기에 나는 아랑곳 않고 달려갔다.




"뤼펠?"


언제나처럼 이 날까지 내가 올 방향으로 기다리고 있던 뤼펠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아무런 말도 않는 게 무척 기이했다.


"뤼펠?"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서 반응을 원했지만 쓸모가 없었다. 어떤 의지로 그가 이러는지 전혀 몰랐기에 무방비한 상태로 그에게 걸어갔다.

쾅-

그러다 찰나의 직감으로 생존 본능을 위협하는 존재의 습격을 받아들여 저절로 블루드가 머리 위로 생성되어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경계 태세를 위해 나는 뤼펠에게서 멀어졌다.

명백히 시험이었다. 안 하고 넘어가는 게 이상한 거였다. 그동안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 확인하는 수단인 걸 다시는 볼 수 없을 제자를 위해서는 라데르와 똑같이 이게 최선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시험을 원했었다. 뤼펠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충분히 근거 있는 상상이자 예상이었다. 단순히 내가 발현만 하는 것하고 전투 중에 활용하는 것하고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것이므로 실전 경험은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뤼펠 보고 전력으로 하라는 건 그게 얼마나 날 과대평가하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의 합으로 '버틸 만하다'는 게 성사가 되어서 불평불만은 없었다.

한 가지 추가할 사실은, 라데르가 뒤따라와서 관전하고 있었다. 그냥 보내는 줄 알았거늘 어느샌가 날 쫓아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검술 시험보다는 나에게는 인생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경중 자체를 블루드에 더 손을 들어주었기에 합격 불합격이 상관없는 게 아니었다. 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일단 목표만 말해준다. 내 몸에 손을 대라. 그럼 네가 이긴 거다."


기약 없는 승부가 아니란 점에서 좋았다. 어떻게든 끝까지 버티라는 거였으면 저것보단 의욕이 꺼졌을 터였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시험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면으로 블루드가 날아왔다. 시퍼렇게 맑은 색을 띤 기운에 농도가 짙은 내 탁한 기운이 방어했다. 그러나 겹으로 날린 것은 차마 의식 못해 한 번만 막고 나머지는 다 맞아 뒤로 자빠졌다.

가까워지긴커녕 멀어지고 있고, 난 내 몸 주변에 발현하는 게 최선이다만 뤼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장풍 같이 날려보내고 있고, 어쩔 수 없는 불공평함은 이만 받아들이고 나는 다시 돌진했다.

또 정면으로 날아오는 블루드에 방어를 하지 말고 뚫어버릴 심산으로 정면에 발현시킨 채 달려갔다. 겉으로는 괜찮은 계획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에 질 세라 정면 만이 아니라 바닥을 쓸며 다가오는 블루드도 있었기에 그만 넘어지고 만다. 균형이 무너져 제대로 블루드를 유지할 수 없어 정면에 오는 것까지 받아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굴욕적인 것은 집어치우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너무 아팠다. 유혈사태는 없어도 곧 일어나거나 일어나 있는 것만 같은 통증에 안타깝게도 자신감이 떨어졌다. 포기까지는 아니었으나, 내가 뚫을 수 있냐는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은 반포기였다.


"살살 하시면 안 됩니까?"


웃으라고 한 이야기에도 어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나조차 하면서도 웃기보다는 비굴해서 쪽팔린 심정이었다.

타개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궁지에 몰리니까 그 좋던 잔머리는 도통 내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잔머리는 만능은 아니었다.

상상대로란 현실적이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잔머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모르는 이상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뤼펠이 원격으로 블루드를 내보낼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는가, 그것부터 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시험이되 실험판이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걸 내가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매우 무모한 시험이었다.

이 정도면 방임한 거 아니었을까. 자기만 할 줄 아는 걸로 시험을 걸면 어쩌자는 건지 도통 출제 의도가 불분명했다.

애써 공격 않는 뤼펠 앞에서 양손으로 블루드를 만지작 거리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기껏 해도 30cm 떨어지니 소멸하는 현상을 보고 오기로 될 게 아니라 결론을 내렸다.

최선이고 유일한 것은 어떻게든 배운 거로 하는 거였다. 이젠 잔머리는 내려놓았다. 오로지 기합만 내세웠다.


"좀 세게 때려도 모릅니다?"


아까처럼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블루드를 미리 발현하고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 자신있던 것은 아니었어도 뤼펠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즉각 반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쾅, 깡, 쾅, 탕, 팡, 쾅-

위로도 날아오고 아래로도 날아오고 측면은 당연지사, 보기는 그렇게 하였지만 본다고 해서 풋내기인 내가 다 완벽히 방어할 순 없었다. 그래도 전진을 위해서는 맞아도 그 자리에서 후퇴하는 건 전략적 후퇴가 아니었다.

전력차에 전술차까지 나는 마당에 예비도 없는 걸 그저 패퇴일 뿐이었다. 하필 상대가 뤼펠이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여튼 물러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오기에서 나는 한 가지 뜻깊은 기술을 터득했다. 뤼펠이 원격으로 블루드를 날려보내는 것처럼 굳이 내가 팔을 꼭 사용해서 발현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훈련을 하면서 그랬기 때문에 팔을 뻗고 거기에서 내보내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날아오는 곳에 팔을 못 뻗는다고 해서 블루드를 발현시킬 수 없다, 그건 어리숙한 착각이었다.

착각을 깼다고 해서 바로 온전해지진 않았다. 팔 아닌 곳에서 발현시키는 일은 걸어가는 것조차 멈춰야할 정도로 안정된 자세가 요구되었다. 전방위를 방어하게 되었다고 해도 팔을 뻗어 방어한 경우에만 전진했다.

뤼펠에게 가까워질수록 공세는 과격해지고 속사였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몽롱해졌다. 그간 훈련 때 섰던 양만큼을 단 몇 분만에 발산하고 있는 중이라 업보인 셈이었다. 보고 반응하는 건 무리였다. 전방위 발현으로 방법을 바꾸고 극단적인 소모전의 형태로 최종국면을 맞이했다.

온몸에 중장갑옷을 입으면 이런 느낌인 것 같이 한 발 내딛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얼마 남았는지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천만다행이었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뭐가 세게 때려도 모른다는 건지, 뤼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스운 공약이었다는 사실을.

샤악······

날 위협하던 푸른 빛의 군세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손이 뤼펠의 앞 오른다리에 닿고 있었다. 내가 언제 닿았는지 기억도 없었는데, 결과는 내가 시험을 통과했다는 건 현실이었다.


"축하한다."

"저 죽었습니까?"

"멀쩡히 살아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


엄살은 아니지만 일어설 수는 있었다. 금세 휘청거리는 걸 보면 다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얼얼함이 촉각을 마비시켜 잠시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였다.


"전장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는 있을 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죽을 수도 있는 건 변함없다."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적어도 이걸로는 계급장을 떼낼 수는 없을 거다."


모든 간부 이상이 뤼펠 수준은 아니겠지만, 언제 내가 뤼펠과 대등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지금도 뤼펠이 봐주는 수준에서 나를 시험했기에 아직까지는 성장에 대한 확신을 못 찾았다.


"대장-"

'대장 님'이라고 마저 다 말하지 못하고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지면서도 다시 까맣게 채워지는 교묘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 뒤로 꿈도 없이 수 시간을 한순간에 날려보냈다.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그리고 라데르의 방인 줄 알았던 장소는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침대가 여러 개 있는 걸 보니 의무실이란 걸 떠올렸다.


"깨어났냐."


앉아서 기다리던 라데르를 맨 처음으로 보았다.


"죄송해요."


그냥 미안해서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뭐가 미안하냐."

"계속 일어나 계셨던 거 아닌가요?"

"늙었어도 한 때는 밤샘 전투도 하던 몸이라 익숙하다."


그런 건 아무리 들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발언이었다. 어디에도 잠을 자지 않고서 피곤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바실리스크가 인간과 비교해서 잠을 안 자도 생활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더욱이나 배려라는 걸 알았다.


"제 몸, 잘못 되었나요?"


내가 느끼기로는 아무런 증상이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네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네?"


그건 마치 진단상으로는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듯한 속뜻이라 마음에 걸렸다.


"이상이 있었나요?"

"네가 쓰러지고 곧바로 네 몸에 블루드가 이글거리면서 솟구쳤다."


전혀 상상이 안 가는 묘사였다.


"왜죠?"

"제 아무리 미숙련자라도 졸도했다고 그러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도 처음 보는 걸 이유를 낸들 알겠냐? 그래도 이글거리는 게 절단력은 없어서 옮기는 데는 힘들지 않았다. 한참 이글거려 일각 전에 겨우 그쳤다. 깨어날 수도 있다는 징조로 보였다."


혹시나 해서 조그맣게 손가락에 발현시켜보니 멀쩡히 손톱을 감싸며 짙은 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시기를 늦추려고 했지만, 일어났으면 어쩔 수 없이 약속대로 오늘 갈 거다."

"괜찮을까요?"

"형식에 괜찮은 건 중요하지 않다. 너는 가게 될 거다."

"···."

"두렵냐?"


'그럼 안 두려울까요'라고 말하려던 걸 포기했다.


"블루드가 부활한지 얼마나 되었죠?"

"우리 기준에서는 4년이다."

"교관 님이 못 본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지."

"그러면 치료제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

"가야하겠네요."

"가야지."


불치병이라 처분하면 더욱 할 말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거라면 죽지 말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기도하나 전장에 나가서 기도하나, 산다면 사는 거니까. 열정적인 체념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이게 적절한 표현이었다.




내일 이른 아침, 보따리를 싸 들고 나온 뒷문 앞에는 말과 함께 나를 데려다 줄 마부가 있었다.


"부대장 님?"

"못 본 새에 그새 거칠어졌네. 형씨, 너무 굴린 거 아니야?"

"적절히 구른 거다."


마침 나를 데려다주는 이가 파논이라니, 그것도 오직 나만 말에 오르는 것이었다. 기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중립의 감정에 암만 떠올려도 파논과는 그다지 연이 없었던 게 맞다고 단언했다.


"말이 처음인가?"

"네."

"힘들겠는데?"


당시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해 흘려들었다.


"잊어버린 건 없겠지?"

"네."

"재밌게 좀 얘기해봐."

"죄송합니다···."

어떻게 재밌게 대답해야 하는지 누군가 알려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형씨, 작별인사라도 해봐."


파논이 제의한 거라 미덥지는 못했지만, 내심 라데르의 작별인사를 고대했다. 어떤 발언을 할지 따뜻한 한마디만이라도 던져주면 고마워했을 거였다.


"죽지 마라."

"네!"

그럼 그렇다고 역시 냉정하게 말하는구나, 라고 받아들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병사한테 있어서는 그게 축복인지라 한 번도 전장을 겪지 못한 훈련병이나 나름 따뜻한 한마디라고 느꼈다.


"그럼 간다-"

"테즈."

파논의 시동을 잠재우고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는 멀리서 뤼펠이 낸 거였다. 마중을 안 나올 줄 알았더니 스승으로서의 정은 똑같았던 모양이었다.


"종전까지 살아남아라."

"네!"


말만 다르지 라데르와 똑같았다. 그나저나 생존에 대한 기원은 흡족했어도, 한 가지 섭섭했던 게 있었다. 왜 아무도 승진을 위해서는 기원을 하지 않을까. 파논과 말을 타고 가면서 고민한 끝에 아직도 나를 어리다고 뜬구름을 주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오랜 운행 중에 파논의 걱정을 나는 알아차렸다. 말은 경력자가 아니면 엉덩이가 찢어질 만큼 아프다는 필연 때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엉덩이 때문에 의무실에 가야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빠르고 쓰라린 행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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