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00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7 20:59
조회
17
추천
0
글자
12쪽

1권 (16)

DUMMY

마주치자마자 동족이란 것에 환희를 느끼고 반갑다며 망루에서 내려갔다. 성내에서의 만남이라 조금은 의심을 해볼 법도 한데, 그건 제 3자의 생각일 테고 밑도 끝도 없는 목마름이 해소되던 때라 어찌할 도리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 당장 눈앞까지 다가갔지만, 정작 다가가놓고서는 뒤늦게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고민했다. 영리하지 못한 판단에 그만 갈피를 못 잡고 어영부영 시선만 회피하기 바빴다.


"신병이지?"

"네? 예."


나 스스로 목걸이에 손을 대며 이게 증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크기가 개목걸이 수준인 걸 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뭐하고 있었던 거니?"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하고 다정했다. 그러나 나는 지레 속뜻이 있을 줄 알고 약간 겁먹었다. 그래도 사실은 사실대로 보고했다.


"야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야경?"


그녀는 망루 위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런 데서 볼 게 있었니?"

"···잘 모르겠습니다."


있었다, 라고 말하기도, 없었다, 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애매하게 대답했다.


"이름은?"

"테즈입니다."

"보여줘."

"무···얼 말입니까?"

"신분증."

"지금 손에 없습니다."


그 말을 하자 의문인 표정을 지었다.


"죽을 때까지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 못 들었어?"

"그런 겁니까?"

"그런 거야."


라데르가 야속해졌다. 다른 건 칼같이 해도 이런 중요한 규칙을 왜 안 가르쳐줬는지 내 잘못은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황상 네 탓은 아닌 거잖아. 고개 들어."


짧은 순간에 그녀의 표정은 기분 좋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내가 해학적으로 마음에 든 것 같다는 나만의 해석이었다. 이성적으로 마음에 들었다고 하기에는, 그건 너무 망상에 가깝고 지나친 확대해석이었다.

한편으론 나는 그녀가 이성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한 눈에 반한 것이었다. 딱히 이에 대한 이유라고는, 그냥 예뻐서. 안 그래도 무표정일 때도 준수했지만, 웃음을 지은 순간부터는 무조건이었다.

너무 이상적이라 감히 내가 넘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솔직히 내가 한 눈에 반했다고 해서 그녀가 넘어오는 것도 아닌 걸 김칫국을 몇 그릇 들이킨 상태였다.


"잠시 몸 좀 빌려가도 될까?"


내가 무식한 건지 이해하기가 약간 버거웠었다.


"정,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같이 걷자는 거지."

"괜찮습니다."


'괜찮다'가 아니라 실은 무진장 좋았다. 한 눈에 반한 상대하고 걷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선 명령이 포상이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라데르는 한 톨만큼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생각이 나질 않으니 죄책감조차 없었다.

일단 걷는 것인데, 돌이켜 보면 성벽의 절반을 돌파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는 장면은 어색했다. 풍경을 구경하면서 걷는다는 느낌도 나나 그녀나 안 들었다.

보통 '같이 걷는다'는 것은 진짜 걷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테고, 최소 '이야기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침묵이 이어지는 게 여간 긴 게 아니었다. 그리 빠른 걸음도 아니었다.

곧 이어서 꺼낸 주제를 들자면, 그럴 법도 하긴 했다.


"테즈."

"예."

"여기엔 어떻게 왔어?"

"끌려왔습니다."

"간단명료하네."

"제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혹시···."

"미안하지만, 나는 아니야."

"네?"

"당장 여기만 보면 우리 같은 휴먼이 본래 없는 세상 같겠지만. 여기에는 이미 휴먼이 있는 세상인 걸? 그래서 공감대는 다를 수 있겠네."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라에는 거의 없지."

"어떻게 된 겁니까?"

"죽었거든."


말을 잇지 못했다.


"받아들이긴 힘들 거야. 나도 몇 년 전만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그것도 고작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인 걸 어떡해. 그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된 거지. 휴먼을 처단하자는 무리들의 손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비극은 웬만한 누구에게는 듣기만 해도 버티지 못해."

"···저희는 뭡니까?"

"혐오의 싹에서 시작한 비극이지만, 그래도 유용하기는 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놔두고 있는 거야. 난 지휘관 급이고, 넌 병사니까."


지휘관 급이라는 말에 그녀의 목을 보아하니 라데르 마냥 목걸이 따윈 없었다. 성내를 아무렇게 인간이 활보하는 것에서부터 피어올랐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민간인 중에서는 없다는 뜻입니까."

"어찌 들키지 않고 부지하는 부류도 분명 있을 거야. 이 나라를 뜨면 된다는 게 말이 쉽지. 전부 이 무지막지하게 큰 땅을 횡단해서 이주했다는 보장도 없잖아. 모르는 거지. 역사상 학살은 잔뜩 있었어도 완전무결한 몰살은 없었고···."


그러나 만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란 말이 생략된 듯했다.


"그보다! 아까 저기서 떨어지려고 한 거였어?"


갑자기 올라간 억양에 당황했고, 내용에도 한층 더 당황했다.


"그건··· 그게."


찰나에 든 생각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 명백히 부정하려니 나 모르게 가슴이 찔리는 기분이었다. 거짓말은 아닌데 거짓말인 모순에 끝내 대답했다.


"죽긴, 힘듭니다."

"의사는 있었단 거네?"

"예···."


내가 말하고도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였다. 조금을 알콩달콩해도 좋을 지경인데, 그다지 흥분은 없었고 냉정하게 차가운 대화만 이어졌다.


"죽는다는 건, 끝난다는 거잖아?"

"네."

"그런 의미에선, 나도 그렇거든."

"······."

"조금 센 말이었나."

"괜찮습니다."

"별로, 너한테는 좋은 발언은 아니겠네."

"들려줘도 괜찮습니다."


사심에는 듣고 싶다는 악취미의 계략이 있긴 했다.


"듣고 싶은 거지?"


금방 들켜버렸다.


"···여기에 있는 이상 멀쩡히 있으려면 왕국의 영광과 번창을 기원하는 게 올바른 선택일 거야. 그러지 않으면 언제든지 미움사는 것을 시작으로 언제 처분 대상이 될지 모르거든. 그러나 언젠가, 정말 이 왕국의 영과과 번창이 오는 시기로 우선 이 전시 상황을 승리를 이끌게 된다면 그 이후의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답이 뻔하지 않니?"


굳이 내가 말을 하진 않았다.


"전쟁 병기로서 쓸모없어진 이상, 가차 없이 폐기될 수도 있는 것이고, 최소한 몇 십년은 정상적인 생활은 없을 거야, 휴먼에게는."


선동되는 것이라는 상상은 안 들었다. 이상한 논리 회로가 아니었다. 그리 복잡할 것도 없이 흠잡을 데 없는 추리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추리의 결말은 결국 우리가 쏜 쓸 것은 없으니까 죽자는 걸로 흠잡을 데 없는 비극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고, 그녀가 내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지헤를 가지고 있다고 바랜 의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히 푸념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나를 신적인 존재로 안 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은 명백히 현실적인 태도였다.

이것은 명백히 전염성 있는 울분이었다.


"살아도 죽고, 죽으면 죽는 겁니까."

"그렇게 되지."


단순하게 생각하다, 너무 단순한 결론을 지었다.


"안 죽고 도망치면 안 됩니까?"

"어디로?"

"완전무결한 몰살은 없을 테니, 저희도 어딘가로 숨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일 중에서 그나마 하나였다. 꼭 마주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왕국이 우릴 처형시킨다면 살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수단이 답이 아닐지, 속 편한 결론이었다. 명예란 건 찾아볼 수 없는 생물로서의 생존 본능만이 있는 명답은 그녀에게 잘 전달되었다.


"맞아. 도망치면 살겠구나. 살려고 하면 뭐든지 있을 텐데, 왜 생각을 못했을까? 좀 멍청한 것 같지 않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

"그렇다는 거지?"

"···."


묵비권을 행사할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계급상 내가 훨씬 아래인 걸 말문이 트였다고 해서 그녀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눈에 반했다고 해서 나 혼자만의 행복회로는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진짜 멍청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게 정말 멍청한 거였다.


"우리 지금 당장 도망칠래?"

"네?"


반쯤은 농담으로 했다는 게 억양에서 잘 드러났지만 묘하게 이끌렸다. 이런 사람과 도주를 할 수 있다면 바로는 행복하겠지만, 그걸로 평생의 죄악이 되지 않을지 나는 걱정이었다.

영악하게, 추악하게 살고자 하면 살 수는 있겠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삶은 마음에 안 들었다. 비록 떳떳한 죽음도 싫다마는, 빈털터리인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아서 억지로 사는 것은 인생의 가치를 전자보다 볼품없게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난 짐짝 이하의 존재로 있을 거이기에 강하게 부정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진짜 도망칠 건 아니었는데."

"앞으로도 안 하실 겁니까?"

"그것도 아니지. 언젠가는 할 거야."

"전쟁이 끝날 때 쯤입니까?"

"몰라. 하여튼 언젠가는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무튼 그런 거지."

"죽기 직전에 하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고려해볼게."


이쯤에서 대담하게 물어보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함이 무엇입니까, 라고 해."

"성함이 무엇입니까?"

"사리나. 이게 끝이야."

"사리나, 님?"

"그래, 그렇게. 그렇게 불러."


방금 알아낸 호칭을 이용하여 또 하나 질문을 하려고 했다.


"사리나 님."

"테즈."

"네."


그러나 뒤늦은 사리나 님의 호명에 막혀 질문은 보류했다.


"병사로서 지위가 높아지고 싶어?"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가?"

"높아지면 좋습니까?"

"무진장 많이 좋아져. 이 시국에 무관 말고 딱히 좋은 게 있을까나?"

"그러면, 높아지고 싶다 해서 높아지는 건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지. 그래도 도와줄 수는 있어."


안일하게 낙하산 같은 걸 기대하기는 했다. 그런 불법적인 행위가 없을 것 같은 세상으로 보이진 않고, 바실리스크든 하피든 휴먼이든 이성체가 있는 이상 불법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에 따른 비용에 대해서는 내가 감당할 수는 없을 거라 예상했다.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필사적으로 높아지고 싶은 거야?"


상식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전시 상황에서 생존 확률이 높을 게 뻔했다. 감히 안 바랄려고 해도 바랄 수가. '필사적으로'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긴 해도 대답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네."


음흉하지만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권유했다.


"난간 위로 올라가볼래?"

"······."

"장난이 아니라. 너를 돕고 싶어서 그래."


그대로 사리나 님의 말을 믿고서 난간 위로 올라갔다. 나름의 이유를 내 상식에서 찾자면 담력을 키우기 위함인가? 그런 사고였다. 망루에서도 보았지만, 망루에서 고작 6m 낮은 이 성벽의 높이조차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 요새라고 하려니 흔히 문화유산에서 찾던 성들과 비교해서는 훨씬 높아보인 게 아니라 실제로 높았다. 아파트 10층 높이를 우습게 여기는 높이에 이게 포크레인도 없이 쌓을 수 있는 건축물이란 게 놀라웠다.


"일어서봐."


앉은 채로 올라서있는 걸 듣고서 깨달았다. 몸을 펴봤자 한 몇 십 cm 더 높아지는 거지만, 안정감의 차이 때문에 무서웠다. 단지 서 있는 것만 해도 무서웠다.

나는 무서움을 타파하기 위해 몸을 사리나 님 쪽으로 돌렸다.


"이제 어떻게-"


그러자 나의 몸은 휘청거렸다. 휘청거렸다고 의식한 순간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울어져 있었다고 의식한 순간 나의 몸은 이미 발의 대부분이 떼어졌다. 내가 균형을 잃어서 이렇게 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내 가슴 앞에 사리나 님의 손만 없었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1권 (44) 20.07.09 65 0 13쪽
43 1권 (43) 20.07.07 17 0 11쪽
42 1권 (42) 20.07.06 18 0 12쪽
41 1권 (41) 20.07.03 18 0 13쪽
40 1권 (40) 20.07.02 15 0 12쪽
39 1권 (39) 20.07.01 17 0 12쪽
38 1권 (38) 20.06.30 15 0 12쪽
37 1권 (37) 20.06.29 16 0 12쪽
36 1권 (36) 20.06.26 14 0 11쪽
35 1권 (35) 20.06.25 18 0 12쪽
34 1권 (34) 20.06.24 19 0 12쪽
33 1권 (33) 20.06.23 17 0 12쪽
32 1권 (32) 20.06.22 18 0 11쪽
31 1권 (31) 20.06.20 23 0 12쪽
30 1권 (30) +1 20.06.19 36 1 11쪽
29 1권 (29) 20.06.19 20 0 12쪽
28 1권 (28) 20.06.19 17 0 11쪽
27 1권 (27) 20.06.19 20 0 13쪽
26 1권 (26) 20.06.19 18 0 11쪽
25 1권 (25) 20.06.19 19 0 12쪽
24 1권 (24) 20.06.19 20 0 13쪽
23 1권 (23) 20.06.19 18 0 12쪽
22 1권 (22) 20.06.18 17 0 12쪽
21 1권 (21) 20.06.18 20 0 11쪽
20 1권 (20) 20.06.18 18 1 11쪽
19 1권 (19) 20.06.18 18 0 11쪽
18 1권 (18) 20.06.18 17 0 11쪽
17 1권 (17) 20.06.18 18 0 11쪽
» 1권 (16) 20.06.17 18 0 12쪽
15 1권 (15) 20.06.17 18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