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입성 (1)
두 사람은 허공에서 빠져 나온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직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부터 온몸을 만졌다. 정말 현실과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이었다. 그것마저 아니었다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뻔했다.
사방 모두 같은 옅은 하늘색으로 둘러싸였다. 어디가 바닥이고 벽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흑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흑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김정직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한 대 제대로 갈기려는 생각을 했지만, 순박한 얼굴에 예의 바른 목소리를 들으니 그만 잊고 말았다.
“금 선생님, 오늘은 바닷가를 떠올려 보시는 게 어때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피서를 즐길 상황은 아니지 않아요?”
수라가 정색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더니 말했다.
“좋아요,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수라는 다섯 살 때, 부모님과 같이 갔던 바닷가를 떠올렸다. 지금도 그때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선명한 색깔을 본 적이 없었다.
짙푸른 바다와 하늘. 그날 바다는 잔잔했다.
하늘 위로 뭉게 구름이 새하얗게 피어올랐다.
바다 한가운데 섬이 하나 있었다. 그 섬은 선명한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백사장.
거기에 커다란 진홍빛 파라솔.
그 아래에 하얀색 탁자와 의자가 세 개 있었다.
눈을 떴다. 정말 이곳은 그녀가 떠오른 대로 바뀌어 있었다. 흑은 반바지에 야자수 나무가 새겨진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정직도 보았다. 정직도 색깔만 다른 뿐 마찬가지였다. 그 옷은 아버지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수라는 자신을 보았다. 어린 시절에 입었던 감청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수라는 민망했던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위, 아래에 덧입을 옷을 떠올렸다. 그랬더니 위, 아래를 한 번 더 감싸는 체형 커버형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자에 앉았다.
“정말 아름다운 해변이군요. 전 이런 지금까지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흑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햇살을 즐기면서 말했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정직은 흑에게 되물었다.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빅브라더가 무엇이죠?”
이번엔 수라가 질문을 했다.
“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위험한 인물이란 말입니까?”
정직이 순간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흑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린 거죠?”
“저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에 대해 각기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고 그것을 합산한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험 정도를 정한 규칙이 뭐냐구요?”
“그건 말로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 규칙만 해도 수천 페이지가 넘습니다. 지금 장 소장님의 컴퓨터로 그 내용을 보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저한테도 보내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지켜야 할 규칙에 어긋납니다. 현재 당신에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초식 씨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해킹을 하도록 내버려둔 거죠?”
“위험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이번엔 그를 죽이려고 한 거죠?”
이번엔 정직이 끼어들었다.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는 명령한 대로 계산한 값에 따라 할 뿐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장치는 흑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흑을 우주로 보낸다면 일단 빅브라더는 중단될 것이다.
그때 또 한 명의 죽음의 명단이 도착했다.
“빅브라더를 멈춰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우주로 보낼 수밖에 없어요.”
수라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흑은 그런 것에 전혀 괘념치 않았다.
“저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내린 명령에 충실할 뿐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도저히 당신과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의미겠지요. 그럼, 잘 가요.”
수라는 결국 실행 버튼을 누룰 수밖에 없었다. 순간 잠시 멈칫했다.
“당신은 흑이 맞습니까?”
정직이 말에도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이 사람은 흑이 아닌가?’
그들도 의자에 묶여 있던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수라는 찜찜한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흑은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수라는 그 모습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그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왜 흑이 아니라고 말했던 거죠?”
수라는 정직에게 물었다.
“그냥, 사람 같지 않았어요. 마치 기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제로와 흑이 연결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전에 흑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제로와 흑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이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아직은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의 말대로 그와 제로가 서로 얽혀 있다면, 지금 제로에게도 흑의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제로마저 없애야 하는 사태까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수라는 날이 밝자, 국정원장과 석 소장에게 제로에서 흑을 분리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이제 장 소장도 빅브라더가 멈추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고서를 받은 김 원장은 지금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장 소장은 아직 조용했다.
‘벌써 난리가 났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자신이 그렇게 자신했던 빅브라더를 상의도 없이 수라가 종료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벌써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어떻게 종료되었는지 아직은 모르고 있으리라. 지금 그것 때문에 김 원장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수라가 느끼는 고요함은 마치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시작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김세출 국정원장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연락을 받은 몇 분 뒤에 수라의 방으로 찾아온 것이다. 장 소장을 만나지 않고 바로 온 것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악수만 하고는 의례적으로 하던 인사도 생략한 채 바로 의자에 앉았다.
“금 박사, 아직도 철부지 같은 꿈을 꾸고 있어요?”
“네?”
“그러지 말고 이번에 나랑 함께 국회로 들어갑시다. 이번에 정치를 제대로 배워 봐요. 괜히 사춘기 감성으로 남자들 무릎 꿇리려고 하지 말고. 금 박사 앞에서 남자들이 와서 스스로 꿇게 하는 게 진짜 멋있는 거 아니에요.”
김 원장은 지금 금수라가 필요했다. 석 소장에게 그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치 양자컴퓨터라는 약만 판 꼴이었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만병통치약으로 팔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석 소장은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능력도, 그렇다고 그것을 돌파할 힘도 없었다.
그러나 금수라는 달랐다. 그녀는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할 때도 있었지만, 힘만큼은 천하장사였다. 그녀의 그런 장점이 정치에서도 어려움을 돌파할 힘이 될 거라 생각했다.
김 원장은 지난 밤, 자신과 수라의 행동을 비교해 보고 있었다.
김 원장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온 보고서까지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라는 누구보다 빠르게 선택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옳았다. 오늘 아침 올라온 보고서는 빅브라더가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녀는 선택도 빨랐고, 그것에 책임을 질 자세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녀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확실히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이제 여긴 장 소장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어요. 대단하게 지킬 것도 없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거기에는 금 박사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백두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포부가 컸다. 더 이상 분단이 아닌 통일된 한반도. 저 넓은 만주 벌판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계 최초로 양자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선점 효과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많은 기밀 정보들이 강대국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 대통령과 장 소장은 어이없게도 그런 정보를 아무런 대가 없이 퍼주기도 했다.
검은물 작전에 여러 가지 의문을 품고 있던 각국은 그것을 빌미로 기밀 사항까지 요구했다. 특히 강대국들의 요구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들은 검은물 작전이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갖고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빌미로 핵심 정보까지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그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장 소장이 마치 그 작전이 잘못되었고,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말았다. 거기에 대통령이 맞장구를 치면서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그들에게 대부분의 핵심 기밀을 포함한 정보를 내주고 말았다. 그것만 생각하면 김 원장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말 망치로 뚝딱 박아 가슴에 창이라고 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다. 그때 장 소장이 들어왔다.
“원장님, 왜 여기부터...”
김 원장은 그를 보자 못 먹을 음식이라도 먹은 듯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를 보면 전형적인 기회주의 DNA가 새겨진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실상은 그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대개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모습을 감추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장 소장은 너무도 투명하게 드러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역겨웠다.
자신보다 조금만 강한 사람이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아첨을 하다가도 바로 약해지면 뒤를 물어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장유연 소장이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러면서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서류 봉투에 꽤 두께가 나가는 종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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