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검은물> (2)
“윤촉새 선생님, 구한말에 살아나 보고 하는 말이에요?”
“꼭 살아봐야 아나요. 그런데 어째 저들이 하는 꼴을 보니 아예 제로 자체를 빼앗으려 하는 거 같아요. 우리나라 정부가 하는 일에 완전 실망했어요. 아니 스스로 결정을 못해서 미국에 쪼르르 달려간다는 게 말이 돼요?
정말 한국의 윗것들은 자존심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대대로 그러지 않았어요?”
수라도 윤촉새의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다. 지금 미국 정부도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려 들었다.
윤촉새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그날 밤, 앞으로는 미 정보 당국과 공동 운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김세출 원장이 연락도 없이 내려왔다.
“어떻게 이 새벽에 오신 거예요? 연락도 없이요.”
“금 박사, 아니 금 소장님이시지.”
“편한 대로 부르세요.”
“난 금 박사가 어감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정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도 미국과 공동 운영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에 대통령이 너무 쉽게 무릎을 꿇었다고 긴 탄식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고자 이 새벽에 온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국가에 정보를 다 흘려요.”
“그럼, 여기는 각국의 전쟁터가 될 텐데...”
“뭐 자기들끼리 싸우라고 하죠, 뭐.”
“그래도 될까요? 금 선생.”
“어차피 모든 나라에 알려야 하는 일이에요. 결국 미국도 알릴 거예요. 우리가 먼저 알리냐, 아니면 미국이 알리냐 그 차이일 뿐이에요.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면, 전 세계는 우리를 우습게 알게 되겠죠. 미국은 그 전에 우리에게서 모든 핵심 정보를 빼내려 혈안이 될 거구요.”
“그렇겠군요. 탄소 배출을 몇 나라만 억제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알겠어요. 역시 여기 오기를 잘한 거 같아요.”
아침부터 윤촉새가 수라에게 달려왔다. 그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정부에서 하자는 대로 하실 거예요?”
“...”
“그렇게 안 하실 거죠? 그래도 금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분인데...”
“정부 명령대로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 건데요?”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냥 실망하는 거죠, 뭐. ‘금 선생님도 별수없군.’ 그러겠죠.”
그러자 수라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윤촉새도 한숨을 푹 쉬며 터벅터벅 힘이 빠진 채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안보리 상임 이사국들의 비밀 회동이 있었다. 김세출 국정원장이 서울로 올라가서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도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놀란 것은 미국과 우리나라 정부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기후 위기에 관한 내용과 제로 양자컴퓨터의 존재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미국은 우리 정부가 이중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불쾌감을 보였다.
[350일 12시간 4분 23초 ...]
전광판에 있는 숫자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안보리 상임 이사국과 소위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국가의 정보 수장들이 대거 태백산, 신단수로 비밀리에 모였다.
그것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나라 지도자들은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국제 회의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모였다. 이젠 더 이상 미국이 주도적으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른 회의와 달리 모든 회의 내용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회의장에는 오직 각국 정상들과 정보 당국 수장들만 회의장에 출입이 허용되었다. 그곳의 출입 관리를 이중삼중으로 강화했기 때문에 개미 한 마리도 몰래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은 이번 모임을 국제 회의 행사 중에 하나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눈치가 빠른 언론인들은 정보 수장과 국가 수장이 동시에 참여한다는 것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보 수장들이 양자컴퓨터가 있는 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몇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음모론을 펴기도 했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국제 회의장.
그 앞은 기자, 음모론자, 각국 정상들의 수행원으로 북적거렸다. 그들보다 뒤쪽에서는 각국에서 온 정상들을 환영하는 사람들과 시위대까지 총출동한 상태였다.
교통 통제를 받으면서 김세출 국정원장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시위대가 적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기 현수막에 적힌 글이 정확히 뭔지 아나?”
김 원장은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
“미친 놈들입니다. 일본에서 뺏은 양자컴퓨터를 원래 주인인 일본에게 돌려주라는 내용입니다.”
“일본인들인가?”
“아뇨, 멀쩡한 한국인이랍니다.”
김 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 사람들은 패배적 DNA를 가진 것일까, 아니면 기회주의적 DNA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일까’
많은 인파들을 지나 회의장 앞으로 갔다. 여기에 초대된 나라는 30여 개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이미 태백산 벙커 원에 다녀온 정보 수장은 10여 국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국가들은 아직 임계점에 대한 사실을 자세하게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보 수장과 동행하지 않는 정상들이 더 많았다.
각국 정상과 정보 수장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제한되자 일부 정상들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항의성 요구를 계속했다. 그것을 본 김세출 원장이 금수라를 급하게 찾았다.
“저 얼간이들은 수행원이 없으면 밥도 못 먹는 인간들이야. 국가당 두 사람까지만 더 허용하는 게 어때요?”
“갑자기 이러시면...”
“저들 중에는 회의가 끝나고 나면 딴소리하는 얼간이들 많을 거요. 차라리 똑똑한 수행원들에게 말하는 게 덜 피곤할 거예요. 금 박사.”
120석 규모이니까 예비용 자리까지 만들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입증도 충분히 여유분이 있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을 정하는 것도 각국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본회의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은 회의 첫날에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공식 합의문이 발표되었다. 사실 금수라가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발표문으로 고개를 살며시 들던 음모론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공식 합의문에 담긴 내용은 특허권을 없애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후 위기를 줄이는 기술에 한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양자컴퓨터를 갖고 있는 한국에만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이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중요한 회의는 둘째 날이었다. 120석 규모의 회의실은 가득 찼다. 국가 정상, 정보 수장,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수행원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책상 위에 놓인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것은 모든 언어를 자국의 언어로 바꿔주는 기능이 있는 것이었다. 모두 자국의 언어로 말을 하더라도 자동으로 상대방의 언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그래서 마치 같은 언어로 실시간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먼저 노트북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금수라의 보고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모두 금수라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금수라는 그들 앞에서 지구 종말의 임계점이 일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래서, 뭐...’라는 표정이었다.
수라는 그들을 먼저 설득해야만 했다. 저녁 만찬 후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여기 그래프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기 보이는 붉은 선은 10분 전 예측한 주식 시장의 그래프입니다. 그리고 푸른 선은 실제 주식 시장의 종합지수입니다. 이 둘을 겹쳐보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분 전 예측 그래프 일치율 89.88%]
이제야 각국 정상들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식 시장이나 날씨는 복잡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이런 복잡계조차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거의 자료일 뿐이잖아요. 저희는 실시간으로 적용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말을 하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제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곳은 오직 벙커 원입니다. 제로는 양자컴퓨터의 인공지능 이름입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연결되었답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영국 시장이라고 합니다.”
지금 금수라를 대신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장유연 박사였다. 그곳과 이곳은 실시간으로 모든 것이 공유되고 있었다.
화면에 붉은 선이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10분 후에 푸른 선이 나타났다. 그 선들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래 오차 범위 안에서 움직일 확률이 표시되었다.
[98.01%]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나 보네요. 평소보다 아주 높은데요.”
이것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자신의 스피커를 통해 말을 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실제 거래를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정보 수장들에게 설명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10여 국가를 제외하면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돈을 많이 벌거나 잃을 때는 가격 변동성이 클 때 일어난다. 그런데 그런 가격 변동은 어느 한 순간 갑작스럽게 나타날 때가 많았다. 그런 순간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시장이나 제로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 말은 제로가 그것까지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모의 선물 투자를 했을 때, 지난 주 수익률은 -3.3%였다. 9번은 이기지만 1번은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1번이 실제로 9번으로 번 돈보다 더 많이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니터에 있는 그래프를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그러면 겹쳐보이는 가운데 가끔씩 삐죽하게 심하게 위아래로 갑자기 솟구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 부분에서 실제로 손실이 커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식에는 인간의 심리가 개입되면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것이 예측의 정확성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수라가 이들 앞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주식 시장이 아니라 날씨였다.
“이미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를 보십시오. 지금 보고 있는 날씨는 일주일 전에 예측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씨와 일치율이 99.9%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날씨와 관련된 요소들은 관측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향후 예측까지도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346일 15시간 34분 24초 ...]
“저희는 이번 결과를 얻기 위해 수억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습니다. 탄소 배출량이 저기 보이는 선을 넘어가는 순간 어떤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지구는 더 이상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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