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 - 비이사 (7)
흑의 뇌가 담긴 장치는 일반적인 킬 스위치와는 달랐다. 그것을 작동하면 그의 뇌는 로켓에 실려 우주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구를 10년 동안 돌다가 영원히 우주 밖으로 튕겨져 나가게 만든 것이다. 아주 적은 영양분으로 살 수 있는 환경에서 흑의 뇌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만큼 살 수 있었다.
“영원히요?”
“흑 선생님, 영원히 산는 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아뇨.”
“그럼 지금부터 아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거예요.”
“...”
흑은 침묵을 지켰다.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우주의 종말까지 얼마나 지속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영겁의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을 혼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흑은 그것을 생각하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이것으로 이제 당신은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금수라는 뒤끝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것이 흑의 말대로 제로라면 최후에는 양자컴퓨터를 없애야 할 위급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는 정보를 종합해 보면 제로의 자체 판단보다는 흑의 거짓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석 의원과 김세출 국정원장이 걱정이 되었던지 함께 신단수로 왔다. 금수라는 이런 것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보고를 했다. 흑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이 보고서는 비밀에 부치고, 일단 며칠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부터 우려하던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레드칩을 맞은 사람들의 죽음도 평소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죽음의 명단에도 레드칩과 관련된 사람은 없었다.
‘역시, 흑의 장난이었나.’
일주일이 지난 후에 전 세계 관계 당국에 비공식적으로 이번 사태는 버그로 인한 일시적 오류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 일로 금수라는 각국 정부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그것이 가장 뼈아팠다.
그들은 이제 제로뿐만 아니라 금수라도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로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자료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의 오류를 각국이 스스로 점검하기 시작했다.
*****
정직은 박대한에 대해 첩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사소한 루머조차 없었다. 대개 이 정도 거물급이면 친한 기업인이나 기업이 한두 개 정도는 사실이든 아니든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여자 문제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심지어 그는 웬만한 국회의원이면 다하는 출판기념회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인 후원금만 받았다. 그는 회계 관리가 투명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 중에 대표적인 한 명이었다.
박대한 의원의 보좌진에게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 박대한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 외에는 특별한 첩보 하나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남초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해커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것으로 한때는 국정원에서 일한 적도 있었지만, 자신은 이런 일에 적성에 맞지 않다며 2년 만에 그만두고 나왔다. 실제로는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직은 그에게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는 정직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다. 이상하게 그에게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나이도 동갑인데다 누구보다 편했던 것이다.
정직은 그에게도 박대한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초식에게서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뭔데?”
“왜 이리 달려들고 그래? 부담돼서 어디 말이나 하겠어? 사실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별거 아닌 게 뭐냐고?”
단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댓글 말이야. 박대한이란 의원에는 부정적 댓글은 거의 없잖아?”
“그래서...”
“너, 조금만 더 뒤로 가라. 왠지 내 말이 끝나면 너가 나를 때릴 거 같아서 그래.”
정직은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고 말았다.
“내가 왜 널 때려.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지금 네 표정이 안 그래. 난 정말 지금 네 눈빛이 무섭다구.”
정직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제 됐지? 빨리 말해. 너 이번에도 말을 다 안 하고 끊으면 정말 맞을 수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첫 번째 달리는 댓글 있잖아. 그런데 그 댓글은 항상 같은 곳이더라구, 아이디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초식이 불러준 주소는 바로 하늘교의 공동체 삶을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도원 공동체.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바로 이건데...”
“그게 뭔데?”
“박대한 의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 근처에 갔다는 사실이야.”
“확실한 거야?”
“휴대폰만 간 게 아니라면 맞겠지.”
“너, 정말 예쁘다.”
정직은 초식을 껴안으려 하자 뒤로 물러났다.
“왜 이래, 너 아무리 급해도 난 안 된다. 그리고 나 씨 없는 남자잖아.”
“너 정말 한 거야? 미친 거 아냐?”
“오래 됐어. 아예 잘라서 양쪽을 불질러 버렸지. 나중에 마음이 변하면 풀 수도 있잖아.”
초식은 이것이 우리나라에 대해 복수하는 거라고 예전부터 말끝마다 했었다.
“너 그런다고 세상은 눈 하나 꿈쩍 안 해.”
“알아,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망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세상에 복수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아이를 남기지 않는 것...”
“미친 놈.”
박대한, 하늘교.
정직은 신녀가 박대한의 영혼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하늘교 도원 공동체로 가야 했다. 아직도 점심 시간 전이었다.
그는 신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에 그녀의 위치 정보를 보니 여전히 신당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초식아, 너 신당 앞에 달려 있는 CCTV 볼 수 있지? 빨리 돌려 봐.”
두 시간 전이었다. 낯선 사내 둘이 신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곧이어 신녀와 같이 나와서 걸어가는 장면이 찍혔다. 하지만 그들의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너, 이 근처 CCTV에서 그들의 행방을 찾아 봐.”
“여기서 CCTV를 바로 해킹할 수 있는 게... 알았다.”
초식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표정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정직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장 차를 타고 신녀의 신당으로 달려갔다.
문이 잠기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 휴대폰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일부러 휴대폰을 놓고 간 것은 아니리라.’
그러면... 그는 다시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녀가 휴대폰을 들지 않고 나왔다면 화장실을 가려고 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간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여기서 그녀가 스스로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발장을 열었을 것이다. 그는 신발장을 열었다.
그런데 거기에 옛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둥근 딱지 한 장이 일부러 놓은 것처럼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뒤집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런데 거기에 손톱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게 별 모양이었다. 원에 별 모양. 그것은 하늘교 문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하늘교로... 그런데 왜 그들은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데리고 간 것일까? 설마 은호의 유골을 가져온 것을 안 것일까?’
하지만 정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정직은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도원 공동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비이사, 박대한, 신녀, 하늘교...”
운전을 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단어들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때 초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 도원 공동체로 가고 있는 거 같아.”
“나도 지금 그리로 가고 있어.”
“뭐야, 그럼 진작에 얘기했어야지. 지금까지 그 모든 차량 조사하고 있었잖아.”
“혹시 모르잖아.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이런 때일수록 판단이 흐려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초식이가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길 바랐다.
“알았다, 그건 됐고... 그런데 지금 거기로 가는 차량이 모두 다섯 대야. 거기는 막다른 길이라 가는 차량이 거의 없거든. 그런데 거기에 박소한 의원의 차량이 있는 거 같아.”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게 말하기 좀 어려운데, 어쩌다 박소한 의원 핸드폰을 해킹하게 됐어.”
그러잖아도 박대한 의원을 조사하면서 박소한 의원을 알게 되었다. 박소한 의원은 이번에 재선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박대한의 정치적 아들로 불릴 만큼 박대한과 인연이 남달랐다. 젊은 이미지에 강단 있는 모습은 차기 대통령 후보 중의 가장 강력한 한 명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계속 그들을 따라가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알려줘?”
“알았어.”
정직은 속도를 높였다.
*****
2시간 전.
지난 주 신녀는 초식이와 하늘교 예배에 참여했다. 여신도들은 그 잘생긴 보디가드, 그러니까 정직의 안부부터 물었다. 집안일 때문에 당분간 못 온다고 했더니, 무슨 일이냐고 혹시 안 좋은 일은 아니냐고 마치 가족이나 되는 것처럼 걱정했다. 그들은 잘생긴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연신 아쉬워했다.
그날 예배에서 드디어 비이사의 죽음을 공식화했다. 그동안은 부활을 염두에 두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후계자가 누구인지 발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면 이번 주에 후계자를 정하고 예배 시간에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이번 주에 소문으로만 도는 신들의 모임이 있을 수도.
정직이 도청 프로그램을 휴대폰에 깐 이후로는 화장실 갈 때는 휴대폰을 들고 갈 수 없었다. 이래저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그 앞에 난데없이 건장한 남자 둘이 있었다.
“누..구세요?”
“타성님이 모시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보통은 이런 사람이 올 때는 어떤 강한 예감이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하늘교와 관련된 일은 신의 딸인 자신도 보통 사람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죠?”
“저희는 모릅니다.”
여기까지 찾아 왔다는 것은 자신이 재벌집 혼외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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