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녀가 결혼했다(2)
레안의 중매로 덩그러니 놓여진 하륜과 세이렌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특히나 세이렌의 반응이 까칠했는데, 하륜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어디 한번 구경 시켜 줘봐.”
거만한 어투로 말하는 세이렌의 행동에 하륜의 표정이 아주 살짝 일그러지는 듯 했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우선 여기가 총 훈련장입니다.”
확실히 총 훈련장이니 만큼 크기는 컸다.
“아무 것도 없는데?”
크기가 큰 만큼 훈련하는 이 없어 휑한 공간을 바라보며 세이렌이 삐딱하게 말했다.
“보통은 각 단마다 마련된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따로 모여서 다같이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면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륜의 대답은 세이렌의 귀가 아니라 훈련장을 배회했다. 이어 하륜은 세이렌과 함께 현무단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쯧, 나름 실력 있는 기사들이라더니 실망이군.”
마치 저것도 훈련이냐, 라는 의미를 담아 세이렌이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이로 제국의 황실 기사단은 누구나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들어와서 저 모양인 건가.”
대놓고 무시하는 말에 하륜의 표정이 굳었다. 딱히 하륜이 황실 기사단이란 곳에 대해 깊은 충성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간 몸 담아온 곳을 무시하는 것은 기분이 나빴다. 특히나 이곳에 들어옴으로서 레안과의 연이 생기고, 그로 인해 상처에 대해 한단계 넘어갈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저희 기사단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총단장님이신 레안 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네. 레안이 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기사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레안은 결국 저들과 상관없는 남이야. 그러니 황실 기사단인가 뭔가 하는 것들과 레안을 엮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저런 것들 때문에 레안이 용족 구역을 벗어나 인간들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어.
세이렌의 얼굴에는 명백한 짜증과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런 세이렌의 말에 하륜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이번에 내뱉은 말의 내용만큼은 절대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실 기사단 자체를 욕하는 거야 적당히 나쁘고 말 정도의 기스이지만, 레안과 자신들이 관계에 대해 저렇듯 가볍게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용족들이 얼마나 지 잘난 맛에 살고 있는지, 인간을 무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 겪으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하륜의 기분을 느낀 세이렌이 그래서 뭐 어쩔 건데 하는 듯한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말하는데, 레안에 대해 쓸데없는 감정 갖지 마. 보아하니 전에 레안이 물어봤던 마룡의 하트를 가진 자가 그쪽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관계니.”
“제가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 꽤나 재밌는 소리를 하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세이렌이 짙은 살기를 흘렸다. 그나마 마룡의 하트를 가졌기에 하륜은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꽤 짙었기에 다소 버거운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때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신발로 보이는 것이 세이렌의 뒤통수를 가격한 후 훈련장 한 구석에 박혔다.
“적당히 해. 쓸데없이 웬 시비야.”
귀찮음에 하륜에게 맡기긴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뭐하고 있나 잠깐 보러 왔던 레안이 비뚜름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히 말했다.
“시비라니.”
마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세이렌이 레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환청을 들었다는 거야?”
레안이 직접 들었다면야. 할 말 없음에 세이렌이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애들이야. 삼촌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심술은 적당히 부려. 지나치면 때리고 싶어지니까.”
그나마 삼촌이란 이유로 친절하게 말하는 레안이었다. 그에 세이렌이 매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레안에게 대들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륜과 세이렌의 가볍고 사소한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드물게도 언제나 얌전히 훈련을 하던 하륜의 표정이 사정없이 굳어 있었다. 그래도 예의는 아는 사람이라고 욕설을 내뱉거나 살기를 흘리진 않았지만 미묘하게 굳은 표정은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게 했다.
“설마 그것을 훈련이라고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남들이 봤다면 저런 훌륭한 자세라니, 하며 감탄했을 자세건만 얄밉게도 하륜의 앞에 딱 앉아서 구경하듯 바라보던 세이렌이 비웃듯 물었다. 하지만 하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봤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이렌의 시비는 계속 됐다.
“오늘 처음 검을 든 건가? 자세 한번 대단하네. 거기다 고작 1000번 휘두르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거야?”
세상에, 이런 거 처음 본다며 세이렌이 무척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해됩니다만.”
결국 참지 못한 하륜이 싸늘히 말했다.
“요즘은 검 가지고 노는 데도 집중이 필요 하나?”
한마디로 네가 하고 있는 그것은 검술 훈련이 아니라 놀이다, 라고 폄하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검 너무 가벼운 건 아닌가?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이래 뵈도 나름 꽤 무게가 나가는 검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세이렌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어디선가 꺼내온 검 하나를 던지며 세이렌이 말했다. 딱 봐도 묵직한 것이 무게가 장난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과연 이 걸 들 수 있겠어, 라며 대놓고 무시하는 그 시선에 하륜이 묵묵히 검을 들었다.
역시나 검의 무게가 무거운 지라 다소 버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하륜은 힘든 기색 없이 검을 들고 휘둘렀다. 그 모습에 내내 무시로 일관하던 세이렌의 눈에 미미한 이채가 서렸다.
한편 오기로 검을 들고 휘두르곤 있지만 100번 정도를 휘두르자 슬슬 팔에 무리가 느껴지며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웬만한 기사라면 드는 것도 힘든 검이었으므로 이 정도만 해도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무거우면 그 쯤 해. 어차피 별로 기대도 안 했으니.”
세이렌의 덤덤한 그 한마디에 하륜은 오기와 악으로 버티어야 했다. 정말 팔이 끊어질 듯한 감각을 느끼며 하륜은 자신이 이렇게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나 하는 고민에 잠겨야 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무시하는, 그리고 레안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야. 멈춰.”
하륜이 기어코 팔의 감각이 사라지며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갔을 때 어느새 나타난 레안이 하륜이 들고 있던 검을 뺏어들며 말했다. 한심하다, 라는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약간 억울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왜 자꾸 애한테 시비야.”
물론 대충 왜 그러는 것인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좀 심했다. 정확히는 심했다, 라는 느낌보다는 좀 거슬렸다.
“나보다 쟤가 더 좋아?”
무슨 애도 아니고. 세이렌의 진지한 질문에 레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진지해진 건 세이렌 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놓고 숨을 고르고 있던 하륜도 묘하게 진지한 얼굴로 레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내가 과연 삼촌을 좋아하는가, 부터 다시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누구를 좋아해야 쟬 더 좋아하는지 덜 좋아하는지가 정해지지, 라는 의미로 말한 레안의 말에 세이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고는 있었다. 레안이 낯가림 심하고, 마음 잘 안 열어서 관계에 있어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막상 이 자리에서, 하필이면 저 마룡의 하트를 가진 놈 앞에서 확인사살 받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세이렌의 감정을 느꼈는지, 레안이 미묘하게 위로하듯 망설이다 세이렌을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름 어린 시절 보여주었던 레안만의 애교였다. 그제서야 다소 기분이 풀어진 세이렌이 레안을 품에 안았다.
그렇게 둘 사이를 진정시킨 레안은 문제의 원인인 세이렌을 데리고 훈련장을 떠났다.
“넌 좀 쉬어.”
뭔가 버려진 느낌에 움찔하던 하륜은 걱정하듯 내던져진 레안의 말에 피식 하고 작게 웃었다.
- 작가의말
새삼, 레안이랑 삼촌이랑 성격이 미묘하게 닮았어요..
과연 그들은 레안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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