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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님의 서재입니다.

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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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작품등록일 :
2018.07.02 16:14
최근연재일 :
2018.08.10 22:24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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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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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0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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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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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DUMMY

"저... 서, 선배님, 우리 죽으면 같은 무덤에 들어가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쉿."


용기를 내서 가슴 속에 숨겨뒀던 말을 꺼내려는 일리오네에게는 무심하게도, 메이븐의 신경은 이미 그녀가 아닌 등장한 적 소년병에게 쏠려 있었다. 활과 화살을 꺼내 시위를 메기려던 메이븐이 소년병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자, 머뭇거리다 도로 활을 내렸다.


그는 감시를 위해 벗어두었던 투구를 눌러쓰고 얼굴가리개를 덮었다.


"잠시 대기."


"네."


일리오네도 상황을 깨닫고 메이븐이 지시하면 뿔피리를 불기 위해 대기하다가 뿔피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투구를 착용한 뒤 그녀도 활을 손에 들고 소년병이 모습을 드러낸 수풀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년병은 움직일 힘도 없는지 한참을 언덕 아래편 수풀에 엎드려 있었다. 자신이 기사들에게 들킨 것은 알고 있을까?


"일리오네, 내가 가서 살펴봐야 겠는데. 내 말, 로시는 어디에 있지?"


"로시는... 로시는 어제 저녁 마굿간을 부수고. 흑... 아직 그녀가 떠나간 걸 잊지 못하시는 군요."


"말장난 할 때가 아니야. 맞아, 망할. 로시가 날 버리고 도주했지. 깜빡했다. 그럼 네 말 란테는? 란테는 어디있어?"


로시도 난테도 훈련을 잘 받아 메이븐이나 일리오네가 휘파람을 불면 그들을 찾아온다. 메이븐이 투구를 쓴 채 일리오네에게 묻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 글쎄요."


"란테도 사흘 전부터 안 보이던데, 너... 너네 소대원들 은근히 얼굴에 윤기가 흐르더니 설마? 말기름이었냐? 도망간 걸로 처리하고 훈련 받은 군마를 몰래 먹었어?"


"기분 탓이겠죠."


"야, 아까는 나한테 11일 째라며!"


허기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군마를 잡아먹어서인지 자기한테 안 나눠줘서인지 알지 못할 이유로 진심으로 화난 메이븐이 일리오네에게 성질을 부렸다.


"...빵이나 스프라고 물어보셨잖아요."


'너 진짜.'


나중에 두고보기로하고 메이븐이 다시 소년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로시는 어젯밤 마굿간을 부수고 도주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메이븐이 유력 용의자 한 명과 떨어져 막사를 나와 낮은 자세로 기듯이 걸었다.


그런 메이븐의 어깨를 일리오네가 뒤에서 달려들어 턱 잡았다. 그러다 둘이 뒤엉켜 넘어지는 희극이 연출되었다.


"일리오네. 뭐하는 짓이냐."


"선,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인데! 식인만은 안됩니다. 보급 나오면 제 빵까지 드리겠습니다."


"야, 너 미쳤어. 내가 왜 사람을 잡아먹어. 생포해서 취조하려는 거잖아."


"아, 그런 거였어요?"


어리버리한 신참기사를 발로 걷어차려다가 소리가 나면 적병이 놀라서 도망갈까봐 꾹 눌러 참은 메이븐이 일리오네를 떨어뜨리고 다시 포복을 시작했다.


그래도 그냥 가기는 억울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시미터를 허리에 찬 후임여기사에게 쏘아붙였다.


"너 란테가 사라진 걸 슬퍼마라. 란테는 죽지 않았어. 네 뱃살 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숨쉴테니까."


양심과 자존심에 가해진 충격이 상당했는지 일리오네가 무릎을 꿇었다. 사악한 미소를 지은 메이븐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정면만 보며 기어갔다.


갑옷이 철그럭 거리는 소리에 상대 소년병에게 접근하면 눈치챌 것이 뻔했다. 그 전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오러를 몸에 둘러 달려들면 생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갑옷을 벗고 올 걸 그랬군.'


그래도 혹시나 적 궁병이 어딘가 숨어있다면 화살을 막아 목숨을 구해줄 갑옷이다.


한편 정신이 몽롱해 보이던 소년 정찰병은 메이븐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갑옷이 접근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갑옷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다가온 메이븐의 신출귀몰한 도적식 발걸음 때문이다.


메이븐은 쾌재의 함성을 마음 속으로 숨기며 소년병의 등 뒤로 돌아 수풀을 지나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표범처럼 오러를 두르고 뛰어들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 직전인 헬키아 소년의 입을 붙잡아 막았다.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이 파란색 오러가 도는 악마의 얼굴이 음각된 은빛 갑옷, 허리에 찬 롱소드... 서부전선의 살인마 메이븐 티리얼이구나!'


수많은 동료 헬키아군의 기사들과 선임병들이 이 살인마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 기사만 아니었어도 벌써 헬키아 군은 루이스 언덕을 점령하고 에스피온 왕국 수도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무수한 헬키아군 장병들이 욕하던 공포의 기사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투구 너머로 악마가 소년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반갑다, 헬키아 꼬마. 아침 엄마 젖은 잘 챙겨먹고 왔냐?"


'읍읍!'


눈물을 흘리는 꾀죄죄한 소년이 살려달라며 바둥거리자 메이븐이 옆구리를 가볍게 경고삼아 주먹으로 때렸다. 그런데 살가죽이 아니라 갈비뼈가 맞는 소리만 들렸다.


'뭐야, 뼈밖에 없잖아?'


메이븐이 자세히 헬키아 소년을 살펴보니 거의 해골 수준으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소년병을 최전방에 보낸 것으로 모자라 먹을 것도 챙겨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데려가자. 얘를 구워먹든 삶아먹든 결정해야지."


식인이라는 불안한 예감에 소년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메이븐이 소년을 질질끌고 에스피온 군의 초소로 복귀했다.


"선배님, 그래서 얘를 데려오셨다구요?"


마침 보급이 도착했다는 말에 메이븐을 버려두고 빵을 받으러 다녀온 일리오네가 경계초소로 복귀해 소년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롱소드를 꺼내 닦고 있는 메이븐을 보고 물었다.


"응, 알고 있는 것 다 뱉어내라고 헀는데 꼬마라 새로운 정보는 없어. 헬키아 왕국군도 열흘째 굶고 있다는데. 퇴각하기로 결정할지 모른다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확실하다고 재확인 했으니까. 수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그래요? 그러면 우리가 좀만 더 버티면 물러나겠네요?"


"그치."


메이븐이 소년병을 흘깃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대로 왔다가게 둘 수 있나. 도망칠 때 쫓아가서 조져야지. 최대한 죽여 놔야 헬키아군이 다음에 또 못 오지.'


일리오네가 보급받은 천 포장지에서 꺼낸 빵은 딱 두덩이었다. 팔뚝만한 크기의 딱딱하고 마른 흑빵이었다. 물을 머금고 녹여서 조금씩 아껴 먹어야 한다.


꿀꺽.


일리오네와 메이븐이 무려 11일만에 제대로 된 빵을 삼키기 위해 경건한 의식처럼 빵조각과 물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어디선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일리오네와 메이븐이 묶여 있는 헬키아 꼬마를 보았다. 꼬마는 메이븐과 일리오네의 손에 들린 흑빵을 보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계속 시선이 그 쪽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배고프니?"


일리오네가 자상하게 잡혀온 소년병에게 물었다. 소년병은 적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일리오네를 보더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그녀의 손에 들린 빵조각에 시선을 빼앗겼다.


"안돼. 우리도 열흘 조금 넘게 보급이 끊겨서 십일 만에 처음 맛보는 빵이야."


그러자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헬키아 군의 꼬마가 고개를 숙였다. 메이븐이 물이라도 좀 주려고 재갈을 풀어주었다.


"흑흑, 어머니, 아버지..."


물을 삼킨 뒤 헬키아 꼬마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진 메이븐이 어쩔 줄 몰라하며 일리오네를 보았다. 일리오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가 수풀 너머로 다가오는 쇠붙이의 반짝거림을 발견하고 선임인 메이븐에게 보고했다.


"선배님, 뭔가 접근합니다."


"뭐?"


메이븐이 다시 투구를 눌러쓰고 오러를 돌려 안력을 돋군 뒤 먼 언덕 밑 수풀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덜덜 떨면서 꼬마를 되찾으려는 듯 방패와 창을 들고 낮게 포복해서 다가오는 헬키아의 소년병들이 보였다.


아마 메이븐이 소년병을 납치하는 광경을 알아봤나보다.


상대방이 정말 헬키아군의 악몽인 메이븐인지 확인차 간을 보려고 희생양을 보낸 건 아닌가 싶었다.


"너네 부대원이냐? 구하러 왔나본데?"


"아, 키쉬 녀석..."


메이븐이 슬쩍 떠보자, 헬키아 소년병은 어리숙하게 소년병들이 자기 부대원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래도 전우를 구하겠다고 눈물나는 전우애로, 수풀 위를 낮게 기어오는 소년병들을 보고 메이븐이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투구를 챙길 것도 소드오러를 일으킬 것도 없이, 롱소드를 들고 나가서 썰면 한두방에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놔눠도 알아서 픽픽 쓰러질만큼 스켈레톤화 된 소년병들이었다.


'저 어린 소년들이 좋아서 전쟁터에 나온 게 아니니까.'


메이븐이 생포한 헬키아 소년을 묶어 놓았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가라, 꼬맹아."


"예?"


"묻지 말고.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가."


메이븐이 심각하게 갈등하다가 그가 먹던 흑빵의 삼분의 일 가량을 뚝 떼어내서 검은머리카락의 헬키아 소년에게 넘겼다.


"꼬맹아 더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저기 니 친구들한테 가서 내 손이라도 이빨로 깨물고 탈출했다고 둘러대란 말야."


메이븐이 손에 쥐어준 흑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이 곧 빵을 품 속에 넣더니 거듭 고개숙여 감사인사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메이븐을 보는 눈빛에서 적대감은 사라져 있었다. 일종의 형제애처럼 느껴지는 고생한 군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아아아아아!"


어디에 그런 힘을 숨겨놓았는지 헬키아 꼬마가 자력으로 탈출한 것처럼 고함지르며,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몸에 붙이고 감시초소가 있는 언덕에서 언덕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방패와 창을 들고 덜덜 떨면서 다가오던, 아마도 그 소년병과 같은 부대원으로 보이는 헬키아 소년병 다섯이 그런 동료의 귀환에 잠시 얼이 빠져서 이편을 보았다. 그러다가 소년이 합류하자 얼른 함께 방패와 창을 등 뒤에 매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티리얼! 서부전선의 살인마! 네 놈을 찢어죽이고 목을 헬키아 왕성 앞에 효수해 전시하겠다."


꼬마들은 잊지 않고 도망치면서 욕도 한마디 덧붙였다.


"아오, 저것들을 그냥 가서 썰어 버릴라."


방금 전 꼬마를 놓아준 것을 후회하는 메이븐이 활을 집어들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알아본 헬키아 소년병들이 질겁해서 이번에는 더 죽을 힘을 다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리오네가 옆에서 말했다.


"못 본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메이븐이 저 멀리 수풀 너머로 사라져가는 여섯명의 소년들을 보다가 활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투구를 벗자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하늘빛 머릿결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크게 초가을의 향기가 나는 바람을 들이키고 메이븐이 말했다.


"그래 나도 니가 로시를 잡아먹은 건 모르는 걸로 해주마."


"윽... 선배님, 죄송합니다."


"뭐, 일리오네 네가 네 몸을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게 나는 더 화났을 테니까. 내 말을 잡아먹어서라도 기운을 냈다면 좋은 거지."


"선배님.."


"앞으로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렴. 죽으면 무덤도 함께 쓰자며."


소년을 불쌍하게 여겨 풀어주는 모습에 인간적으로 감명 받아 있던 일리오네가 메이븐의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


괜히 에스피온 왕국에서 미남하는 손꼽히는 게 아닌 듯 하늘빛 머리를 나부끼는 스물 둘의 선배기사는 여자인 그녀보다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시리도록 가슴이 아렸다.


"네?"


일리오네가 커다란 황금빛 눈망울을 순박하게 끔뻑이면서 메이븐을 쳐다보았다. 초가을 미풍에 땀을 식히는 모습인 채로 메이븐이 파랗고 맑은 눈으로 싱긋 웃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일리오네가 메이븐 앞에서 먹던 빵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밀려든 부끄러움에 막사 기둥을 때려 부수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전우였는데,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건 설마? 그래도 직장연애라니 지난 달에 기사 아카데미 동기하고 엉망으로 끝나서 그건 싫은데. 너무 빠르지만, 그래도 예쁜 메이븐 선배님이라면...'


일리오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몸을 베베꼬다가, 그림처럼 예쁘게 하늘빛 머리카락 쓸어넘기는 선배를 조금씩 훔쳐보았다. 아름다운 남자기사는 마치 그녀의 답을 기다리듯 엄격하고 듬직하게 그의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그녀도 배속된지 한 달 만에 선임에게 반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주저하며 물었다.


"저... 그럼 제 몸은 또 누구 건가요?"


일리오네가 두근거리는 자기 심장의 소음에 어쩔 줄 모르며 아찔한 눈으로 메이븐을 쳐다보았다. 건드리면 붉은 피가 쏟아질 것처럼 귓바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메이븐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일리오네를 보다 그녀의 붉어진 귀에 속삭였다.


"당연한 걸 묻는군. 아카데미 출신 기사의 몸은 관물이다. 국가소유이니 소중히."



*



"레이크웰, 이 미친 새끼야. 거기서 국가가 왜 나와? 국가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베카의 얼굴이 구겨지고, 입술이 미묘하게 물결치듯 꿈틀거리더니 시시가각 기묘하게 뒤틀렸다.


"니가 남자냐? 고자지. 고자 중 고인 물, 썩은 물 고자."


베카가 분노에 가득차 소리질렀다. 메이븐이 그 기세에 놀라 말 위에서 저도 모르게 소심하게 움츠러들었다.


"바바, 너까지 그런 소리야? 전방에서 일선을 구르는 기사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게 만용이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카데미에서 양성했는데, 젊다고 스스로의 체력을 과신하다 컨디션 관리에 실패해 허무하게 죽지. 선배로서 뼈와 살이 되는 중요한 충고였다."


"너 같은 놈이 왜 소드마스터가 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도 살아남냐. 하늘도 무심하지. 세상 참... 쓰레기다."


"내가 뭐 어때서?"


"나한테 감사하다고 절해라. 나 아니였으면 너 같은 슬라임보다 거지 같은 연애감성을 누가 구제하겠냐."


"딱히 네가 구제하지 않아도..."


베카가 등자에서 발을 뽑아 말을 탄 메이븐에게 옆차기를 날렸다. 메이븐이 질겁하며 빠르게 허공에서 두 손으로 베카의 발을 붙잡았지만 힘에서 밀려 말에서 낙마할 뻔 했다.


"떨어져서 구를 뻔 했잖아!"


"야, 걷는 말에서 낙마한다고 안 죽는다, 엄살은."


베카가 새침하게 이야기하고 말을 몰고 앞서가 버렸다.


"너 앞으로 친절한 검술지도는 없다. 오로지 실전, 실전으로 터득하는 거다."


메이븐이 베카의 괴력이 실린 발길질을 막고 아려오는 손바닥을 풀며 뒤에서 소리질렀다.


"속까지 좁잖아. 좀생이가."


베카가 혼잣말인듯 혼잣말이 아닌 메이븐에게 들리는 투덜거림을 한 뒤 손가락으로 수풀 너머로 내리쬐는 봄 햇살에 산들거리는 봄꽃이 만발한 언덕을 가리켰다.


"레이크웰, 저 언덕이 니가 말한 그 언덕이야?"


"맞아."


"저기 위에 누가 있는데?"


메이븐이 베카의 말에 의하한 듯 언덕을 살펴보자 그 위에 갑옷을 입고 칼을 집은 어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투구는 쓰지 않았다. 그는 메이븐과 베카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움직임 없이 서있었다, 마치 둘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헤이스팅스의 기사들은 늘 다섯 명이 함께 움직였다. 합공할 적에도 메이븐을 당해내지 못 했는데 저렇게 홀로 무방비하게 단독행동 할 리 없었다.


'설마 이 곳을 지나갈 것을 알고 기다린건가?'


앞서가던 베카가 말을 멈췄다.


눈이 좋은 그녀는 상대가 땅을 짚고 있는 유려하게 휘어진 검의 형체와 붉그스름한 기운을 알아본 것이다.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짚고 선 그 자의 옆에 둥그스름한 흙 둔턱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흙무덤처럼.


메이븐이 멈춰서 돌처럼 굳어 하얗게 질린 베카를 지나쳐 언덕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극단적으로 휘어진 시미터의 외양과, 숨길 수 없는 타오르는 듯한 마법적 기운이 느껴졌다.


'피에라브라스?'


검-성애자인 메이븐이 이 느낌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은 낮았다. 일리오네의 검 피에라 브라스였다. 그러나 검을 짚고 선 인형은 남자의 것이다. 백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제2기사단장을 상징하는 일리오네의 여성용 갑옷도 아니었다. 저 갑옷은 거무튀튀한 흑빛이 칠해져 있었다.


곧 그 갑옷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제2기사단의 선임단원인 호레시오 햄릿이었다.


"호레시오? 야! 반갑다. 네가 왜 피에라브라스를 들고 거기 있어."


"왔군. 메이븐 티리얼."


"어?"


반가움이 아니라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호레시오의 반응에 메이븐은 반갑게 흔들던 손을 내리고 다시 한 번 호레시오를 살펴보았다.


"일리오네 단장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리로 올 줄 알았지."


"지금 누가... 죽어?"


말에서 내린 메이븐이 고삐를 놓고 천천히 호레시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몰랐나? 너 때문에 죽었는데. 당신은 여전히 쓰레기로군."


"그게 무슨 소리냐? 장난치고는 좀 심한 장난 아니야?"


이반과 함께 제2기사단의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한 호레시오가 자신에게 질나쁜 농담을 던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메이븐이 되물었다.


호레시오는 짧게 깎은 금발과 날카로운 눈매,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그런 메이븐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설마 그 무덤이? 아니지? "


"일리오네 핼버디아 단장님의 무덤이다. 그분의 유언대로 너를 곁에 묻어주려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븐 티리얼. 검을 뽑아라."


호레시오는 그렇게 말하며 쥐고 있던 시미터를 검집에서 뽑았다. 붉은 화염을 토할 듯한 피에라브라스는 군데군데 이가 나가고, 중앙에 기다란 금이 가있었다.


"정말 일리오네가...?"


"사실이다. 듣자하니 단두대에서 살아남고 젊은 새 여인까지 끼고 도망쳤다더니 사실이었군. 너만 보면 10년을 기다려 준 일리오네 단장님께 죄책감은 가졌나? 살아도 사신 게 아닐 지경이 되어서 자살소동도 일으키셨는데, 반반한 낯짝을 잘도 대낮에 들고 다니더군."


전에 없는 호레시오의 심한 말에도 메이븐은 충격을 받아 일리오네의 무덤이라는 갓 흙이 덮인 봉분으로 떨리는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단장님'이라고 부르는 일리오네가 장난이었다며 언덕 너머에서 달려올 것 같았다.


"...이거 장난이지?"


소드마스터의 순수 미스릴 검이 저 지경이 되었다. 거짓말이 아님을 호레시오가 피에라브라스를 뽑아 보여준 순간 깨달은 메이븐이 일리오네의 무덤 앞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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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세 검의 종류와 검술 참고자료 목록 +1 18.07.19 120 0 -
37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2) 18.08.10 57 0 18쪽
36 [외전] M. T.의 기사 임용 면접 후기 18.08.09 58 0 15쪽
35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1) 18.08.06 76 0 17쪽
34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3) 18.08.05 75 0 18쪽
33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2) 18.08.04 69 0 18쪽
32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1) 18.08.03 101 0 19쪽
31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3) 18.08.02 101 0 18쪽
30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2) 18.08.01 121 1 18쪽
29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1) 18.07.31 118 1 17쪽
28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8) 18.07.30 108 0 18쪽
»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18.07.29 102 0 19쪽
26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18.07.28 102 1 18쪽
25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5) 18.07.27 107 0 19쪽
24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4) 18.07.26 91 0 17쪽
23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3) 18.07.25 129 0 17쪽
22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2) 18.07.24 109 0 17쪽
21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1) 18.07.23 127 1 19쪽
20 헤이스팅스 영지로 (4) 18.07.22 126 1 18쪽
19 헤이스팅스 영지로 (3) 18.07.21 151 1 19쪽
18 헤이스팅스 영지로 (2) 18.07.20 162 1 17쪽
17 헤이스팅스 영지로 (1) 18.07.19 154 0 19쪽
16 죄수의 딜레마 (4) 18.07.17 161 0 19쪽
15 죄수의 딜레마 (3) 18.07.16 146 0 18쪽
14 죄수의 딜레마 (2) 18.07.15 175 0 18쪽
13 죄수의 딜레마 (1) 18.07.14 193 0 20쪽
12 황도의 비밀결사 (4) 18.07.13 176 1 19쪽
11 황도의 비밀결사 (3) 18.07.12 200 1 19쪽
10 황도의 비밀결사 (2) 18.07.11 254 1 19쪽
9 황도의 비밀결사 (1) 18.07.10 307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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