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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님의 서재입니다.

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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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작품등록일 :
2018.07.02 16:14
최근연재일 :
2018.08.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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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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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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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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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DUMMY

청년이 욕설을 내뱉었다. 메이븐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왜 군대에 끌려가지 않은 건데요?"


"나도 끌려간단 말이오. 다음주에 가야하는데 집에 병든 노모가 계시니 일주일만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지. 얼른 농삿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어머니를 돌봐줄 분도 찾아야 하오. 돌겠군."


"형제자매는 없나요?"


"삼형제인데 큰 형은 제국건국전쟁 때 죽었고 둘째형은 지난주에 징병으로 끌려갔고, 이제 나만 남은 거네."


"저런..."


"형씨도 아직 군역을 안 살았으면 공연히 어슬렁 거리다 잡혀 끌려가기 전에 얼른 멀리 떠나시오."


'내전이라면... 심각한 문제인데.'


소귀족인 루이스 자작은 친귀족적인 반왕당파 보다는, 친평민적인 왕당파로 분류되었다. 왕당파는 귀족계급의 특권을 해체하는데 동의하고 '1인 군주 아래 만민의 평등'을 실현시키려 한다. 상대적으로 젊은 귀족들과 상인, 자유시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반왕당파는 보수적인 대귀족들이 중심을 이루고 황태자와 서로 이를 갈고 있었다.

둘 사이의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는 메이븐 티리얼이 제거되고 황제가 와병중이니 황태자의 즉위식을 전후로 하여 사단이 일어나리라 예측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 주변국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어. 생각보다 희생이 더 크겠는데.'


얌전히 국경선 근방 전투에서 패하며 영토를 도로 뱉어내는 선에서 이웃 왕국들과 벌이는 전쟁의 피해가 끝나리라 예상했던 메이븐은, 에스피온 제국 내외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는 예상되는 전개에 인상을 썼다.


"전쟁이라니, 그리미어 숲으로 도망갈 이유가 늘었잖아. 어쩌지, 베니는 괜찮을까?"


베카도 내전이라는 말에 유명한 친평민 왕당파와 친귀족 반왕당파의 대립을 떠올리며 눈쌀을 찌푸렸다.


"내전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는가에 따라 다르지. 단순히 세력과시용으로 병력을 모으는지 정말 대규모 회전을 치를지."


고작해야 황태자가 반왕당파의 허수아비가 될 제1황녀의 세력을 집어삼키고 황도 내 암투를 벌이는 것을 상상했던 메이븐은 내전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명분은 뭐고, 반왕당파의 구심점은 누구인지 알려진 건 없습니까?"



"이 시골영지까지 알려진 게 뭐 있겠소. 들리기로는 표면적으로는 제1황녀이지만 실잘적인 구심점은 북부의 베르질 핼버디아 대공이라더군. 여기 대비해 황태자가 왕당파 병력을 소집하는 구실은 신성왕국 엠마뉴엘에 대한 토벌이요."


"1기사단은 황태자편이고, 3기사단은 원래 그레이번 공작 편이니 반왕당파일텐데... 2기사단은요? 중립입니까?"


"소드마스터 일리오네 핼버디아 경과 제2기사단이 반왕당파로 돌아선다 들었소."


메이븐은 베르질 핼버디아라는 이름을 듣고 의아해졌다. 일리오네의 아버지이고 메이븐 역시 친분을 다져둔 귀족이다.


'베르질 핼버디아 공이라면 욕심이 없는 북부의 패자이다. 왜 이런 짓을 벌이지? 제1황녀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그녀를 왕을 올린 뒤 귀족회의를 만들어 나라의 주축으로 삼는다는 그 계획을 실행하려는 건가?'


평민의회를 구상한 메이븐과 귀족 중심의 의회를 구상한 베르질 핼버디아 대공이 서로 이론적인 내용으로 갑론을박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황권을 유지하고 지방귀족들이 어설프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는데 주력해야 함에 동의했던 바 있다.


절충안으로 평민 자산계층으로 구성된 하원과 귀족과 성직자 계층으로 구성된 상원이라는 양원제로 결론을 내고 술잔을 기울였던 게 바로 지난해였다. 그 자리에는 황태자도 함께했다.


황권을 빼았아 평민들과 이제 비-특권층이 되어가는 귀족들에게 나눠준다는 계획을 듣고도 당시 황태자 에반스 에스피온은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그 때 에반스의 시커먼 속을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죽임을 당한 뒤 다음 차례는 베르질 핼버디아 대공이었던 거군.'


에반스가 꿈꾸는 에스피온 제국은 강대한 군주아래 귀족도 평민도 없는 절대황정이다. 메이븐이 다음주 징집된다는 청년에게 물었다.


"왕당파와 반왕당파간 내전이 벌어진다면 여론은 어느 편을 들 것 같으십니까?"


"글쎄, 소식지를 보면 솔직히 황태자 쪽이 유리하다고 봐야지 않겠소?"


"그렇겠지요. 반왕당파의 주축은 귀족들인데, 사병이 해산되었고 평민들은 귀족들의 목을 손수 교수대에 걸게 해준다면 농기구라도 들고 친평민적인 왕당파에 가담할테니. 말씀 감사합니다."


메이븐이 고개숙여 인사하자 청년이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밭으로 걸어갔다. 거리에는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루이스 영지의 영지민들이 마찬가지로 그늘이 가득한 표정으로 각자의 일터로 부지런히 떠나고 있었다.


청년은 왕당파의 낙승으로 내전이 금방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는 듯 했으나, 메이븐의 얼굴은 어두웠다.


"레이크웰, 내전이 일어나도 그렇게 쪽수가 상대가 안 돼면, 보통 얼른 협상을 맺고 끝내지?"


"그렇겠지. 지금대로라면, 그렇게 종료되는 게 정상이야."


황도의 동생이 안전하리라 여긴 베카가 안심하는 가운데 메이븐은 여전히 걸리는 게 있는 듯 어두운 얼굴로 루이스 자작가문의 깃발이 흰생 독수리문양이 펄럭이는 성을 바라보았다.


"왜? 메이븐, 황태자 네가 유리하네. 핼버디아 대공이 걱정되서 그래? 일리오네의 아버지라서?"


메이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베르질 핼버디아 대공은 좋은 귀족이야.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비전도 있는 아까운 인물이지. 일리오네의 가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정말 걱정하는 건 이웃국가들이다."


"이웃국가들? 신성왕국 엠마뉴엘하고 마도왕국 헬키아, 남부의 히페리온. 이 세 국가?"


"그래, 그들이 기득권층이 해체되고 신분질서가 무너지는 왕아래 절대평등이란 시스템을 가만 두고볼까? 혁명의 불꽃이 자기나라로 번지려 할 때?"


"어... 그곳 귀족들이 가만 지켜보지 않을 거란 말이야?"


"맞아. 그들이 동맹을 맺어 반왕당파를 지원할 수 있다. 물자를 지원하고 기사단을 파견한다면 피가 고랑을 채우고, 호밀밭은 돌볼 농민 하나 없이 시체들만 널려 있게 되겠지."


"그건 문제네. 황태자가 서두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야?"


"그래, 날 사형시키고 빠르게 반왕당파를 처리하며 군대까지 소집한다. 그렇게 한 달 내로 폭풍같은 정리를 완성해야 이웃국가들이 참전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내정을 장악하고 에스피온 제국을 먹을 수 있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곧장 황위에 오르겠지."


"황제는 부르고 에스피온이잖아?"


"몰라, 죽이진 않겠지만 와병중이니, 반대파 정리를 완성하고 피묻은 칼을 들고 '황제자리를 이만 물려주십시오.'하면 넘겨줄 수 밖에 더 있나."


"우리가 숲을 헤매는 사이 폭풍이 불고 있었구나."


"그렇네."


베카와 메이븐이 수배를 피해 몬스터가 출몰하는 숲을 건너고, 유리스 상단을 만나고 헤이스팅스 영지를 거치는 사이 황도에서는 일련의 폭풍같은 개혁과 숙청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메이븐은 일리오네가 혹시 이 때문에 자신을 찾은 걸까 고민했다.


'일리오네와 제2기사단 녀석들... 무사하겠지? 스텔라가 상징적인 성녀이니 건드리지 않을테고. 일리오네는 조금 걱정인데 가문으로 돌아갔으려나.'


메이븐이 걱정스럽게 생각에 잠겨, 베카와 함께 잡화점을 들렀다. 나머지 여행장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쪽이건 혁명이다. 왕당파는 귀족의 특권을 해체해 황제아래 만인의 평등을 꿈꾸고 귀족들을 지방관료화하는 절대군주제 혁명을, 반왕당파는 예산과 입법을 담당하는 귀족의회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귀족적 혁명을 원한다.'


베카가 잡화점에 들어가도 메이븐은 자신이 너무 탱자탱자 살아온 게 아닌가 반성하며, 바깥 거리에 남아 씁쓸하게 루이스 성의 성문에서 나오는 오와 열을 맞춘 왕당파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혁명의 불길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번지려 하고 있어. 그럼 시민들은 혁명이 무엇인지, 자기들이 무슨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위해 죽는지, 그게 정말 필요한 희생인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한 채 피를 흘려야해."


"레이크웰,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뭘 어쩌겠어? 이제 너는 18살 평민 소년 레이크웰이고 나는 21살의 황도의 협곡 여배우 베카야."


물품 구입을 마치고 나온 베카가 예전에 메이븐에게 빼앗았던 회색망토와 묘하게 닮은 회색 망토 두 벌을 구해 자신과 메이븐의 어깨에 걸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드마스터 겸 백작이던 시절의 감상에 젖어 있는 게 아니야! 그냥... 그런 혼란스런 세상에서 세계제일의 방탕아가 되기 어려우니까. 그래서 해 본 걱정이야. 풍요로운 시대여야 마음놓고 더 방탕한 생활을 하지."


"거짓말 마."


"바바, 혹시 황도를 한 번 들리고 다시 동부의 그리미어 숲으로 향하는 건 어때?"


"안 돼! 일리오네 경에게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거야.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어차피 가서 상황을 보고 위험해 보이면 베니를 데리고 그리미어 숲까지 가야하잖아? 동생도 보고 황도의 분위기도 파악할 겸 잠시 들리는 건?"


"베니는 알아서 그리미어 숲으로 갈 수 있어. 편지만 보내면 돼."


"일리오네는 내가 잘 설득해 볼께. 정 그렇다면 너는 혼자 그리미어 숲으로 가. 내가 황도에 가서 일리오네를 설득하고 베니 양도 상황에 따라 그리미어 숲으로 몸을 피하도록 조치할께."


"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베카가 메이븐의 따귀를 때렸다. 메이븐이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아 얼얼한 뺨을 감싸고 베카를 보았다. 베카는 성큼성큼 먼저 걸어가버렸다.


"왜 화내는 거야?"


"저 등신."



*



마침내 말 두 필을 구했다. 메이븐과 베카는 안장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피곤에 찌든 몰골로 숲길을 따라갔다.


"바바, 그 방향은 황도 방향이야."


"알아. 그러니까 가는 거잖아. 내가 멍청이로 보이냐?"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루이스 영지를 떠나려는 베카의 옆에서 메이븐이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베카가 혼자 성큼성큼 가길래 헤이스팅스 성으로 돌아가 그리미어 숲까지 떠나나 했던 메이븐은 그녀가 당당하게 황도방향으로 말을 몰자,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차갑게 굳은 그녀의 얼굴에 안절부절 못해하며 눈치를 봤다.


한숨도 잠을 못이뤄서 하루 쯤은 쉬었다 가려 했는데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채 베카는 잘도 말을 몰아갔다. 호송간의 강행군과 간밤의 도주로 한 숨도 못자 쓰러질 것 같은 상태로 메이븐이 그녀를 뒤따랐다.


"베카, 일리오네와 난 10년 간 사선을 함께 넘나든 사이야. 헤어졌다지만 남이라기에 너무 가까운 전우라고. 내가 설득하면 네게 왜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화를 풀게 할 수 있어. 정말 죽이려던 건 아닐거야. 일리오네는 다행히 잊어버린 것 같지만, 무덤도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약속했단 말야."


"야! 니들이 부부냐!"


마침내 화가 폭발한 베카가 등에 멨던 몸통을 전부 뒤덮는 커다란 카이트쉴드를 풀어 메이븐에게 휘둘렀다. 칼과 다르게 넓은 면적을 뒤덮는 위협적인 풍합에 메이븐의 망토와 머리카락이 훅 하고 날렸다.


간담이 서늘해진 메이븐이 말 등에 납작하게 엎드려 카이트 쉴드를 피하고 베카로부터 대여섯 걸음 거리로 떨어져 말을 몰았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야. 내가 이야기해 보겠어!"


쭈뼛거리며 메이븐이 말했지만 베카의 화만 더 돋구었을 따름이다.


"그게 안된다고, 이 답답아. 황도에서 마주치면 일리오네 경이 그 자리에서 날 찔러죽일거야."


"내가 막아줄께. 아침 안 먹었지? 삶은 감자 먹을래?"


메이븐이 화해를 위해 방금 전 루이스 영지에서 나올 때 급하게 농가에 값을 치르고 얻어 온 알감자를 내밀었다. 밤을 샌데다가, 아침식사를 거르고 출발해서 배가 고플 것이다. 육포를 먹긴 하지만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어디 같은가.


"우리집에도 그런 거 있어. 아니 그것보다 너 따위가 어쩔건데? 네가 산토끼면 일리오네 경은 암호랑이야. 이빨과 발톱울 사자와 곰의 피로 물들인 년이라고."


여자들은 흔히 여우가 여우를 알아본다고 한다. 호랑이도 호랑이를 알아보는 것이라 베카는 일리오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짐작이 갔다.


"여차하면 넌 잠적하는 건 어떨까? 날 버려두고, 그러면..."


"야!"


메이븐이 또 삽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소리를 듣고 베카가 빽 소리질렀다.


"너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아니 못할 말까진..."


"나쁜 남자야 엉엉. 책임져. 너랑 극장 앞에서 만나기 전까지 내 인생은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런대 널 만나고부터는 빚쟁이에, 실업자에다 엉망이 된 거야."


"미안."


메이븐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베카 옆에서 말을 몰았다.


"그래, 무덤자리는 어디로 봐놨는데? 둘이 같이 묻히기로 한 장소는 어디셔?"


"아! 거기라면 이 앞에 있는 언덕이야."


베카의 목소리에 감춰진 비수를 읽지 못한 메이븐이 베카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에 반색하며 답변했다. 누가 37살까지 동정 아니었다고 할까봐 신이나서 자신의 무덤에 더불어 관짝까지 정성을 다해 나무를 다듬어 만들고 있었다.


"저 언덕이라고? 루이스 영지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째 길을 잘 안내하더라'라고 생각하며 베카가 애꿎은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그 가죽끈이 짖이겨졌다. 그녀는 언제 투핸디드소드를 뽑아 메이븐을 죽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응, 있었지.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야. 내가 임관하고 3년이 지난 중급기사이고 아직 소드마스터가 아닐 때, 신입기사인 일리오네가 파트너로 왔어, 약소국이었던 에스피온 왕국의 영토를 빼앗으려 여기 루이스 영지 인근까지 침투한 헬키아 왕국군과 대치하는데 보급대가 전멸하고 보급선이 끊겼지 뭐야. 그 보복으로 우리도 헬키아 왕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지."


"굶었어?"


"열흘 동안 물만 마셨어."


메이븐이 아련하게 먼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루이스 영지의 전선에 후임기사로 일리오네 핼버디아가 들어왔을 그 시절, 메이븐은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년차의 소드익스퍼트 상급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경험부족을 이유로 중급기사로 취급되었다. 일리오네는 소드익스퍼트 하급에 들어선 신출내기 여기사였다.


둘이 소속된 에스피온 왕국은 동네북이었고, 보급은 열악했다.



*



15년 전,


"일리오네, 배가 등가죽과 상봉했어. 사람은 오랜시간 굶으면 미음부터 먹어야 한데. 그런데 어젯밤에는 돼지고기며 쇠고기를 바베큐부터 찜, 훈제까지 한 상 가득 부러지게 차려서 먹는 꿈을 꿨어."


"선배님도 그러셨습니까? 저는 수도에 있는 특급 레스토랑을 하루 대여해서 부대원들하고 거기 있는 모든 요리를 하나씩 음미하는 꿈을 꿨습니다. 튀긴 닭날개와 돼지고기 수육이 입에서 스르륵 녹더군요."


두 명의 삐쩍마른 해골이 루이스 영지의 서쪽 언덕 간이망루를 지키고 있었다. 망을 보고 있는 메이븐과 일리오네 였다. 황금빛 반짝이는 눈동자를 하고, 칙칙한 갈색머리의 여기사가 체면 불구하고 망루의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짚은 시미터에 기대 자세를 유지했다.


선임기사인 메이븐은 힘없는 눈으로 아름다운 미녀 후배를 돌아보았다.


"빵이나 스프를 먹은지 얼마나 되었지?"


"오늘로 11일 째 입니다. 위장이 운동을 멈춘 것 같습니다."


"시발. 보급로가 끊겼으면 복구부터 해야지 여기서 왕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그만큼 상황이 안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메이븐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눈 앞의 초원을 노려보았다. 이따금 씩 그들 자신들 만큼 헐벗은 헬키아군의 퀭한 눈동자를 가진 병사며 기사들이 정찰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메이븐이 쏜 경고화살이나 뿔피리 소리에 도로 도망쳤다.


적군도 이쪽만큼 오랜기간 빵 한조각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다할 전투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선은 소강상태였다.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이런 게 전쟁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리오네, 이런 게 전쟁이야. 소리지르면서 서로 달려들어 전투하는 것 전쟁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 살아남는다면 좋은 경험이 되겠지."


"선배님, 우리 살 수 있을까요?"


"난 몰라도 넌 귀하신 집안 딸인데 살아야지. 만약 내가 죽으면 내 시체라도 요리해서 먹어."


"으웩. 농담도."


"원래 여자가 남자보다 장기간 굶주림을 견딘다는 통계도 있다. 내가 먼저 쓰러질 테니까 그 때는..."


일리오네가 뒤에서 시미터를 검집째 휘둘러 메이븐의 정수리를 때렸다. 메이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고맙다. 배가 고프니 헛소리를 했네."


"고맙지요?"


"하여튼, 후배야 전쟁이 이런거다. 단 한두시간 이어지는 전투를 위해 일주일 동안 전략을 짜고 보급과 거점점령, 진지구축을 하는 것. 그 과정이 전투 자체만큼 비중이 크다. 행군로를 잘못짜서 싸우기도 전에 전염병이나 동상, 열사병에 병력이 사라지기도 하지."


"전쟁과 정치란 비슷하다더니 그런 의미네요."


"맞아. 잘 싸우면 그만이 아니야."


"선배님, 오늘은 보급을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으니 정신차리고 기다려봐요."


"그래, 그러자."


메이븐이 일리오네에게 맞아 혹이 올라오는 정수리를 왼손으로 어루만지며, 다시 헬키아 군이 이따금 출몰하는 우거진 수풀을 살펴 보았다.


그의 눈에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헬키아군 작업복을 끈으로 동여 묶어서 입은 작은 몸체, 굶주리고 겁에 질린 얼굴, 적군의 소년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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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세 검의 종류와 검술 참고자료 목록 +1 18.07.19 120 0 -
37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2) 18.08.10 57 0 18쪽
36 [외전] M. T.의 기사 임용 면접 후기 18.08.09 58 0 15쪽
35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1) 18.08.06 76 0 17쪽
34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3) 18.08.05 74 0 18쪽
33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2) 18.08.04 68 0 18쪽
32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1) 18.08.03 101 0 19쪽
31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3) 18.08.02 101 0 18쪽
30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2) 18.08.01 121 1 18쪽
29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1) 18.07.31 117 1 17쪽
28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8) 18.07.30 108 0 18쪽
27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18.07.29 101 0 19쪽
»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18.07.28 102 1 18쪽
25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5) 18.07.27 107 0 19쪽
24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4) 18.07.26 90 0 17쪽
23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3) 18.07.25 129 0 17쪽
22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2) 18.07.24 109 0 17쪽
21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1) 18.07.23 127 1 19쪽
20 헤이스팅스 영지로 (4) 18.07.22 125 1 18쪽
19 헤이스팅스 영지로 (3) 18.07.21 151 1 19쪽
18 헤이스팅스 영지로 (2) 18.07.20 162 1 17쪽
17 헤이스팅스 영지로 (1) 18.07.19 154 0 19쪽
16 죄수의 딜레마 (4) 18.07.17 161 0 19쪽
15 죄수의 딜레마 (3) 18.07.16 146 0 18쪽
14 죄수의 딜레마 (2) 18.07.15 175 0 18쪽
13 죄수의 딜레마 (1) 18.07.14 193 0 20쪽
12 황도의 비밀결사 (4) 18.07.13 176 1 19쪽
11 황도의 비밀결사 (3) 18.07.12 200 1 19쪽
10 황도의 비밀결사 (2) 18.07.11 254 1 19쪽
9 황도의 비밀결사 (1) 18.07.10 307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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