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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님의 서재입니다.

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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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작품등록일 :
2018.07.02 16:14
최근연재일 :
2018.08.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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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2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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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헤이스팅스 영지로 (3)

DUMMY

아침이 밝았다. 오우거가 사라져 이제부터는 다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는 숲을 벗어나기로 한 알론소 마법사와 메이븐이 뒤처리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베카는 그 틈에 어제 죽인 백년 묵은 오우거의 사체로 가서 돈이 될만한 힘줄과 가죽을 해체했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마차와 용병들의 장비는 알론소 마법사님께서 가져가 처분하시고 다른 네 노예들도 책임지고 고향에 돌려보내 주시는 걸로요."


율리시스와 네 명의 용병은 마차를 받아가는 알론소들이, 헤이스팅스 영지로 끌고가 기사단에 신고하고 넘기기로 결정이 났다.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메이븐이 눈물흘리며 꺼내 준 2000골드의 여비로 헬키아 왕국과 그레이트 에스페란사 사막까지 떠나기로 했다. 도보로는 최소 반년이 걸리는 여정에 인당 400골드라면 빠듯한 예산이지만, 전리품인 마차를 타서 이동하고 야영을 하며 예산을 아끼면 가능할지 몰랐다.


"마차로 가면 2개월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여비는 그 정도면 충분하오. 언제고 헬키아 왕국에 오면 다마소 학파의 본부를 찾아오시오. 내 목숨값에 더해서, 다른 분들이 받은 여비까지 이자를 쳐서 갚겠소."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밤사이 기운을 차린 노예들에게 얻어맞은 율리시스와 용병들이 마차 한 구석에 떡이 된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고, 그 앞에 마법사 알론소와 세 명의 노예가 마차에 올랐다. 젊은 여자가 마차를 몰아본 경험이 있다며 마부석에 앉았다.

또래를 만나서 기쁜지 베카가 그 옆에 붙어서 옥신각신 뭔가 활기차게 토의 중이었다.


메이븐은 천천히 야영지를 정리하고, 어제 그가 죽인 용병들의 시신을 매장해 주었다. 오우거를 잡아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들이지만, 병든 아버지의 약값을 구한다던 여자용병처럼 각기 절박한 사연이 있었다.

한이 많은 눈을 차마 감지 못하고 허공을 보는 한나라는 이름의 그 여자용병의 시신을 묻어줄 때 메이븐은 왠지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차가 떠날거라 생각했는데, 메이븐이 시체를 염해주고 돌아와도 그 자리에 있었다. 베카와 여자노예가 논쟁중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뭔가 곤란한 표정이었다. 메이븐이 오자 얼굴이 밝아진 베카가 메이븐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고 마차 앞으로 끌고갔다.

끌려가는 메이븐을 보며 '네가 희생양이 되었구나. 고마워.'라는 눈빛으로 마차 안의 세 남자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여기 여성학 외길인생 16년의 메이븐 선생님께서 작은 가슴의 매력에 대해 설명해주실거야."


어처구니가 없는 메이븐이 두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통통한 젊은 여인은 괜히 엘프가 아닌지 낭떠러지인 베카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안좋은 예감이 든 메이븐은 뒷걸음질로 도망치려했지만 이미 괴력의 엘프에게 단단히 팔꿈치가 잡혀있었다.


"잠깐! 이게 뭐야."


베카가 생글생글 웃으며 점차 팔꿈치를 쥔 손의 악력을 높였다. 메이븐의 왼손이 서서히 힘줄이 돋고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메이븐은 선후임 기사들 틈에서 배운 대원칙,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할 편에 붙기를 시전했다.


"어, 나는 녹색 긴생머리의 미녀에게는 작고 아담한 가슴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리고 특히 아름다운 얼굴과 조화가 될 때 아름다움은 배가 되지."


귀가 얇은 베카가 뻔한 아부에 기분이 좋아져서. 기고만장하게 마차를 몰고 떠나기 전, 미소년인 메이븐에게 추파 던지려던 여자노예를 노려보았다.


"좋아. 메이븐, 또? 또?"


"어... 가슴이 크면 아무래도 활과 검을 쓰는 데 방해가 돼. 특히 양손검을 사용할 경우 작은 가슴의 이점은 두드러지지. 로우-가드에서 하이-가드로 빠르게 전환할 시라던가, 공격을 회피할 때 좋아."


메이븐이 궁색해진 답변을 계속했다. 옛 성현께서도 남자의 키와 여자의 가슴은 클수록 좋다하셨다.


"야! 그건 다른 이야기잖아. 여기서 검 이야기가 왜 나와."


여자노예가 메이븐의 거짓말을 눈치 채고 도로 자신감을 찾았다.

그러더니 다가와서 메이븐에게 수줍게 그녀의 집 위치를 적은 것으로 보이는 쪽지를 쥐어주더니 메이븐을 힘껏 끌어안아주고 작별인사했다.


"또 봐요. 예쁜 용사님!"


헤롱거리는 메이븐의 등에 베카의 손바닥이 작렬했다. 피멍이 들 것이 분명했다.

용병들의 말 중 상태가 좋아보이는 두 마리를 잡아서 베카와 메이븐이 나눠탔다. 앞으로의 여정이 수월해질 것은 분명했다. 베카가 짐과 카이트쉴드를 싣고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은 메이븐의 회색망토도 걸친 뒤 말했다.


"메이븐, 너 나랑 할 말 있지 않아?"


"글쎄 채무관계?"


"아니 등신아. 8년 시한부라며. 왜 말 안했어."


"물어봤어야 말하지. 그리고 8년 뒤면 멀었잖아. 8년 뒤에도 너랑 나랑 알고 지내겠냐?"


말을 몰고 유리아 상단이 만든 좁은 길을 따라 헤이스팅스 영지 방향으로 향했다. 메이븐이 아파오는 골을 부여잡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위치를 추론하고 있는데 베카가 옆에 다가와 등자에서 발을 빼고 지나가며 메이븐을 발로 툭 건드렸다.


"아, 왜!"


"말을 말아요, 그냥. 그럼 일리오네 경이 너한테 함께하자고 말했는데 8년 시한부에다가 역적이라 싫다고 하고 나왔다는 거야?"


"뭐 자세한 건 설명 안했지만 그렇지."


베카의 귀에 매달린 물방울모양 귀걸이가 순간 불길하게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채지 못한 베카와 메이븐이 계속 대화했다.


"메이븐, 나 사실 황도에서 도망칠 때 일리오네 경을 만났어. 아주 그냥 반쯤 폐인에다 제정신이 아니더만. 힘은 넘치는데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여."


"야, 너 내가 동정이란 것도 일리오네한테 들었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스토커 여성한테 설명도 없이 가타부타 니 인생 살라그랬다고 스토킹을 그만두면 스토킹이라는 범죄가 왜 있겠어."


보랏빛이던 베카의 귀걸이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남이사. 구구절절 설명했으면 안 놓아주었을 걸."


귀걸이가 한 층 더 불길한 검은 빛으로 변했다.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메이븐이 탄 말의 발굽 밑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베카의 귀걸이가 서서히 파란빛으로 돌아왔다. 메이븐이 심각하게 지도를 보다 나침반을 꺼내 방위를 대조하고 주변의 산들을 보며 위치를 찾을 때, 또 심심해진 베카가 다가와 툭, 발로 메이븐의 종아리를 찼다.


"야, 야, 메이븐 너 있잖아."


"아 또 왜!"


베카가 그녀 등의 거대한 투핸디드소드를 슬쩍 반쯤 검집에서 뽑았다.


"그냥 이 칼로 자결하는 게 어때? 전 대륙의 여성들을 위해서."


"좀 놔둬. 지도 좀 보자. 길 잃으면 어쩔거야? 이제 얼마 안 가면 디드로 강이 나와.거기서 강을 따라 하류로 달리면 하루 거리에 헤이스팅스 영지가 있어."


"아, 심심해. 조수의 태도가 이래서야... 어디 초절정 미녀 용사가 무찌를 오크무리는 안 나오나."


"오우거한테 죽을 뻔 했으면서. 오크 떼가 나오면 안 돼잖아!"



*



일단 헤이스팅스 영지에 들리면 여관에서 뜨거운 물로 좀 씼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로 했다.

성문앞에 도착하자. 용병들에게서 훔친 용병패를 보여주고 통행료 2골드를 지불했다. 말을 타고 영지 성문을 통과하며 메이븐은 베카에게 앞으로 자신을 메이븐이 아니라 레이크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황도에서 붙잡히지 않은 메이븐 티리얼의 데쓰나이트 수배령은 당연히 인근 영지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데쓰나이트도 아니고 나이대도 다르지만, 얼굴이 워낙 판박이다 보니 불필요한 수색을 당할 수 있다.


"잊지 말고 레이크웰이라고 불러. 다행히 메이븐이 흔한 이름이라 유리스 상단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나도 바바라고 불러줘. 베카라는 이름으로 다니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잖아?"


"그래, 바바 양."


성문을 통과하자 황도에 비해 덜 정비된 흙길과 생기넘치게 길을 오가는 영지민들이 보였다.

수수한 복장이지만, 삶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그들의 거동에 영지가 잘 다스려지고 있음을 메이븐은 알 수 있었다.


베카는 천천히 말을 몰며 주변을 돌려보고 물었다.


"레이크웰, 레이크웰, 근데 있잖아. 전쟁이 난 거면 전후에 패잔병이나 적국 국민을 잡아서 노예로 만들잖아? 에스피온 제국은 최근까지 제국건국전쟁을 했는데 나는 황도에서 노예를 본 적이 없어."


레이크웰은 비꼬듯이 베카의 말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제 몸에 사리를 키워주시는 바바 양, 그거라면 제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사형당한 메이븐 티리얼 백작이 평등사회의 꿈이라는 헛생각에 사로잡혀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때문이지요. 인질들은 제국군 인질들과 맞교환 되거나 몸값을 주면 풀어주는 방법을 썼습니다."


헤어밴드로 귀를 가린 베카가 깜짝 놀라 메이븐을 돌아보았다.


"와, 너 좋은 사람이었구나?"


"바바, 앞을 봐 앞을. 아니면 말에서 내려서 말을 끌고 갈까?"


"야 씨. 칭찬을 해줘도."


"뜬근 없이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들으니 오한이 치미는군. 이 이야기도 기구하니까 끝까지 들어봐, 그러면 노예들을 해방시켜준 나를 그 노예들은 감사하게 여겼을까?"


"노예해방자를 노예가 미워한다고?"


"애시당초 내가 에스피온 국왕에게 제국을 만들자는 바람을 불어넣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평화롭게 잘 살았을 이웃왕국 사람들이야. 병주고 약주는 격이라 열불이 났던 거지. 듣기로 그 노예들 중 젊은 청년들이 군에 다시 자원입대하고 메이븐 티리얼을 족치기 위한 결사대를 만들었어. 그 중 일부는 역전의 베테랑 병사가 되어 제국의 국경을 괴롭히고 있지."


"와, 너 등신이었구나?"


"바바, 1분 전에 칭찬해 놓고 욕하는 법이 어딨냐?"


"여기."


"아무튼 그래서 노예제도폐지라는 거창한 꿈은 병신짓, 허상으로 남았고, 그나마 이를 인정해줄 사람은 자유사상가나 학자들만 남아있어. 그런데, 학자들이 내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이상하게 논문에 넣지 않더라."


베카가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그 기분 뭔지 알아. 막 이유없이 싫고, 괴롭히고 싶고. 그렇다고 죽는 걸 바라는 것까진 아닌데, 눈앞에 있으면 때려주고 싶은 거 맞지? 네 이름 글자를 보면 화가 나고 속이 뒤집히고."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갑자기 골목에서 베카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베카가 식겁해서 말을 세우고 말에서 내렸다. 메이븐도 놀라서 말에서 내려서 고삐를 쥐고 천천히 걸었다.


베카의 말에 다칠뻔 한 아이가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베카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메이븐이 얼른 달려가 네다섯살 먹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아들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아이는 별 상처 없이 놀라기만 했는지 메이븐이 건네준 숲의 야생배를 받아들고 친구들과 웃으며 떠났다. 베카와 메이븐이 크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앞을 잘 보고다녀야지. 아, 이 쭈그렁탱이 할머니 엘프가 진짜!"


"내가 왜 할머니 엘프야!"


"너 그럼 진짜 나이가 몇이야? 그 사기꾼이 쓴 히치하이킹 책에는 엘프는 늙지 않는다던데? 스물한살 아니지? 황도의 협곡 무대에 베니랑 바꿔서 오르는 것처럼 사기친 거지?"


"와, 너 지금 여자의 나이를 물어본 거야? "


메이븐이 그 말에 금시초문이라는 듯 지나온 길의 앞뒤 끝까지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 거렸다.


"여자? 여자가 어딨어? 아, 아까 전에 네 말에 밟힐 뻔한 아이?"


베카가 망설임 없이 거리 한복판에서 투핸디드소드를 뽑아 메이븐에게 휘둘렀다. 휘웅하고 공기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흘렀고 메이븐은 허리를 뒤로 젖혀서 간신히 눈 앞을 스쳐가는 녹색 아지랑이를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야 너 아까 진짜 죽이려고 했어. 그거 내가 안 피했으면 목젖이었다고."


"개새끼."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던 메이븐은 베카와 여섯걸음 쯤 떨어져서 자기 말을 몰며 놀려대었다.


"프로필에 나온 스물하나는 속임수였던 거네. 나이를 속였던 거야? 나이를 속였던 거네. 나이를 속였던 거잖아?"


"깐죽대지마 죽일 거야."


"우웅, 레이키는 바바 할아버지가 무쪄워용!"


"아오 썅 닭살. 지금 제정신으로 그랬냐?"


메이븐은 베카를 놀려먹으며 간간히 죽일 듯 날아드는 투핸디드소드를 피했다. 결국 1000골드의 채무를 돌려주는 것으로 베카가 결정하자 사채업자 메이븐이 정색하며 사과하고 마무리되었다.


인적이 드문 진입로를 지나자 구불구불한 주거지역이 나왔다. 이윽고 여관과 잡화점, 대장간 등이 자리잡은 헤이스팅스 영지의 번화가가 눈앞에 드러났다.



*



둘은 먼저 말의 등에 지고 온 오우거의 가죽과 힘줄을 처분하기로 했다.


가죽갑옷이라 관리하는 게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겠지만, 백년 묵은 오우거 가죽이라면 금속갑옷만큼 훌륭한 방어력을 보여줄 것이다. 신발이나 방수천막을 만드는 듯 활용방안은 무궁무진했다. 힘줄은 활시위나 갑옷의 각 부위를 결합하고 고정하는 끈으로 사용되면 이상적이었다.


가장 큰 대장간에 들리자 헤이스팅스의 대표 대장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발레리라는 자가 나와 인사올렸다.


"백년 묵은 오우거의 가죽과 힘줄이로군요. 이 귀한 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결정적인 상처는 옆구리 가죽에 난 대형검의 상흔이군요. 여성분께서 잡으셨습니까?"


베카의 두 어깨까 으쓱 펴졌다. 메이븐이 휘휘 고개를 젓는 사이 베카는 당당하게 스스로를 용사라고 소개하며 옆의 메이븐은 그녀의 조수라고 설명했다.


"반갑습니다. 용사 바바님, 조수 레이크웰님. 한동안 헤이스팅스 영지에 머무르신다면 제가 두 분의 장비들도 서비스로 관리해 드리겠습니다. 바바님 갑옷이 체형과 맞지 않는군요."


베카가 끈을 조절했지만 여전히 한나의 금속흉갑은 그녀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오우거의 잔해물을 받아들고, 베카의 갑옷과 카이트 쉴드도 받아 대장간의 작업장이 있는 옆 건물로 간 발레리는 십여분 뒤 다시 대장간에 딸린 매대 앞으로 돌아왔다.


"여기있습니다. 그리고 오우거 잔해의 대금 2000골드입니다."


생각이상의 금액에 베카와 메이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사채로부터의 해방이로다!"


"2000골드가 내 손에 들어오는구만!"


메이븐은 생각보다 후하게 값을 치뤄준 발레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베카에게 새로운 쇠가죽으로 끈을 교체한 카이트쉴드와 조정을 마친 흉갑을 넘겨준 발레리는 탐욕스럽게 메이븐의 허리에 있는 에스토크를 바라보았다.


오우거를 둘이서 잡은 용병들의 물건을 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장장이의 본능이 저 검을 살펴보고 싶다는 충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저, 레이크웰 씨. 그런데 혹시, 그 에스토크 심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이름이 있습니까?"


"이름이 있을텐데 듣지는 못했어. 친구한테 빌린 거라. 비싼 검이라던데?"


"그 검을 한 번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거친 숨결을 몰아쉬는 발레리가 불안해 보였지만 어차피 베카의 투핸디드소드와 메이븐의 에스토크도 점검 받아 나쁠 건 없었다. 미스릴 에스토크는 중급 소드익스퍼트이상의 오러를 마주하지 않은 이상 이가 나갈 가능성은 낮았지만 말이다.


베카의 투핸디드소드는 평범했다. 베카의 완력과 오우거의 주먹이 서로 충돌하며 휘어져 균형이 바뀌었는지 발레리는 투핸디드소드를 대장간의 작업실로 보냈다.


그리고 마치 고귀한 물건을 떠받치듯 벨벳 천을 들고 와 메이븐이 꺼내놓은 에스토크를, 차마 맨손은 대지도 못하고 벨벳 천으로 집어들었다.


"아니 그러면 내가 너무 무식한 놈 같잖아."


자기가 막다루던 검을 고귀하게 다루는 발레리에게 메이븐이 투덜거렸지만 발레리는 반쯤 풀린 눈으로 에스토크의 절대 휘어지지 않는 직선형 검신과, 베기를 포기하고 찌르기에 특화되어 단면이 정사각형 모양인 두꺼운 검면, 그리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파란 예기를 감상했다.


자기가 쓰는 검의 연원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메이븐이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발레리를 보았다.


"순수 미스릴은 아니고 미스릴의 함량은 3할 정도군요. 제가 아는 검은 아닙니다. 새로 만들어진 검 같군요."


일리오네가 쓰는 피에라브라스처럼 순수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들이 아닌 이상, 검은 몇 번의 전투를 거치며 부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년도 사용하지 못하는 게 보통인 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지간한 검-성애자가 아닌 이상 하지 않는다.


미스릴 함량이 3할이라면 메이븐의 검도 아마 십년 이상 버티긴 어려울 것이다.


'뭔 상관이야. 앞으로 8년 뒤면 죽는데.'


메이븐이 그래도 그 정도면 딱이라고 생각하며 에스토크를 아껴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메이븐은 검-성애자에 속하는 소드마스터였다.


"좋아. 지금부터 그 검의 이름은 사군자야. 내가 정했어."


'어울리지 않는가? 강인한 대쪽! 절대 휘어지지 않는다. 국화는 차라리 겨울에 필 지언정 다른 꽃들과 싸움을 싫어한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난초는 어떤가. 동대륙의 선비정신을 따른다.'


아직 발기부전 저주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메이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병신같은 작명이잖아?"


베카가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 사군자를 들고 있던 대장장이 발레리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레이크웰 씨는 알고계셨나 모르겠지만 이 한 손 에스토크... 훌륭한 대장장이의 솜씨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검입니다."


"마법검?"


마법이 걸려있다는 말은 또 처음듣는 메이븐과 베카가 흥미진진하게 발레리의 추가설명에 귀기울였다.


"그렇습니다. 몬스터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잠시 동안 몸이 굳게 만드는 피어마법이 걸려있습니다."


메이븐이 '피어마법'이라고 중얼거리며 방금 전보다 더 귀중하게 사군자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도로 받아왔다. 경건한 손짓이었다.


"그런 마법이 걸려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어요. 아, 어쩐지 헤이스팅스 영지로 숲을 가로질러 올 때 오우거 이후 아무 몬스터도 만나지 못했어요. 귀중한 정보를 알았군요. 마법적인 측면도 대장장이 분들이 알 수 있나 보네요?"


"제 후각이 틀림없다면 이건 오우거의 분변냄새를 재현한 것입니다. 오우거보다 급이 낮은 몬스터들은 이 냄새를 맡으면 등을보이고 도망치거나 잠시 몸이 굳고 말지요. 솜씨 좋은 검사에겐 충분한 한 순간의 빈틈입니다."


"으음."


메이븐이 재빨리 방금전까지 귀중하게 대했던 사군자를 허리에 차고 나가려고 등을 돌렸다.

베카는 아직 자기 검이 나오지 않았기에 오른손으로 메이븐의 목 뒤, 옷깃을 붙잡고 왼손으로는 배를 부여잡았다.


"푸하하 아저씨 그게 아니라... 읍읍!"


"발레리 장인,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몬스터들을 물리는 피어마법이 제 에스토크에 걸려있단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메이븐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허허 그러겠습니다. 참 훌륭한 마법입니다. 이리 명확한 오우거의 체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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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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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세 검의 종류와 검술 참고자료 목록 +1 18.07.19 121 0 -
37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2) 18.08.10 58 0 18쪽
36 [외전] M. T.의 기사 임용 면접 후기 18.08.09 58 0 15쪽
35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1) 18.08.06 77 0 17쪽
34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3) 18.08.05 75 0 18쪽
33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2) 18.08.04 69 0 18쪽
32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1) 18.08.03 102 0 19쪽
31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3) 18.08.02 101 0 18쪽
30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2) 18.08.01 122 1 18쪽
29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1) 18.07.31 118 1 17쪽
28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8) 18.07.30 108 0 18쪽
27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18.07.29 102 0 19쪽
26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18.07.28 102 1 18쪽
25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5) 18.07.27 108 0 19쪽
24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4) 18.07.26 91 0 17쪽
23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3) 18.07.25 129 0 17쪽
22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2) 18.07.24 110 0 17쪽
21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1) 18.07.23 127 1 19쪽
20 헤이스팅스 영지로 (4) 18.07.22 126 1 18쪽
» 헤이스팅스 영지로 (3) 18.07.21 152 1 19쪽
18 헤이스팅스 영지로 (2) 18.07.20 162 1 17쪽
17 헤이스팅스 영지로 (1) 18.07.19 154 0 19쪽
16 죄수의 딜레마 (4) 18.07.17 162 0 19쪽
15 죄수의 딜레마 (3) 18.07.16 146 0 18쪽
14 죄수의 딜레마 (2) 18.07.15 175 0 18쪽
13 죄수의 딜레마 (1) 18.07.14 194 0 20쪽
12 황도의 비밀결사 (4) 18.07.13 176 1 19쪽
11 황도의 비밀결사 (3) 18.07.12 200 1 19쪽
10 황도의 비밀결사 (2) 18.07.11 254 1 19쪽
9 황도의 비밀결사 (1) 18.07.10 308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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