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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님의 서재입니다.

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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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작품등록일 :
2018.07.02 16:14
최근연재일 :
2018.08.10 22:2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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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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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 (1)

DUMMY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베카의 모습을 보며 메이븐은 심각하게 배상문제를 조언해 주려다가 말았다. 그가 범인이 베카라는 사실을 수도기사단에 꼰질른 건 영원히 마음 속에 묻어둔 채 비밀로 할 것이다.


세상에 저렇게 얄미울 수가. 물결치는 녹색머리를 가진 저 기고만장한 미녀는 한 번 크게 혼이 나봐야 성질머리를 고칠 것이다.


'더군다나 추운 겨울이 오면 빈민들이 얼어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제대로 배상을 하긴 해야 할 거 아냐? 인기배우라니까 모아둔 돈 많겠지.'


메이븐은 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입안하던 범죄피해자구조법을 떠올렸다. 획기적인 법안이었다. 통과되었다면 일단 국가예산으로 피해자들을 구조하고, 나중에 붙잡힌 범죄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빈민들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었겠지만, 황태자가 역모혐의를 뒤집어씌워 메이븐을 죽인 뒤 그의 이름으로 발의된 모든 법안은 날아갔다.


'즉, 누군가 책임있는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서 빈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메이븐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베카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그 낯선 따스함에 베카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게 너야, 베카. 너도 한 번 알거지가 되어보렴. 난 내일 모래면 황도를 떠날 거니까. 그 때가서 신고한 게 나라는 걸 알아도 어쩌겠어.'


헤진 옷을 입었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미소년의 상쾌한 미소에 응급실을 분주히 오가던 여사제들이 꺅 소리지르며 휘청였다.

메이븐은 기고만장하여 콧대를 하늘 높이 올린 베카를 앞에 두고 쌤통이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짐짓 감탄한 듯 이야기했다.


"훌륭한 계략이잖아, 베카. 너는 군인이었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심리전 장교가 되겠어."


동시에 베카도 시커먼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메이븐을 엿먹이기 위해 바로 기사단에 달려가 신고하고, 신고자의 익명도 보장받고 돌아 있는 것이다. 기사단의 신고포상금과 메이븐의 비밀엄수 사례금을 모두 꿀꺽하는 것이다.


"메이븐, 그동안 내가 그동안 멋대로 음적이라고 오해했던 것 미안해. 알고보니 37살에다가 고자마스터라며? 불쌍한 사람한테 내가 과했네."


"그딴 사과 안 받느니만 못하지."


"에휴, 사과해줘도 지랄같이 구는 구나."


"백작님, 힘내세요."


메이븐의 구원자인 메리가 책장에서 꺼낸 책을 읽어보다 안 쓰럽게 이야기했다.


"고마워 메리, 너 밖에 없어."


"그 젊은 나이에 고... 라니. 힘드실텐데, 저렇게 놀려먹을 게 아니지요."


"메리, 너도 저리 가. 너 싫어."


메이븐이 씁쓸하게 구석에 가서 벽에 이마를 찍었다. 베카가 다시 이야기했다.


"메이븐, 너 어디 야반 도주할 생각하지 말고 너 때문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 메리한테 일자리 소개시켜 줘야 한다. 니 목숨의 은인인데. 글도 읽고 쓸 줄 안데."


"베카 네가 안그래도 그럴 거였거든! 메리, 내가 수도기사단에 사무원 자리를 소개시켜 줄께. 걱정하지 마. 오늘도 기사단장 한 명 만나고 왔는데... 작별인사를 했는데... 느낌이 왠지 그녀와 마지막이어야 하는데 마지막이 아닐 것 같네."


"감사드려요, 백작님."


메이븐이 뜬금없이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얼굴로 이야기 하자, 안쓰러운 느낌에 베카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반면 기운을 차린 메리가 화제전환을 위해 병실 책장에서 꺼내 빌려온 책을 펼쳐보였다.


"백작님, 백작님, 이것 좀 보세요. 되게 신기해요. 신전 병실 서가에 꼳혀있어서 꺼내 본 책인데요. 공범인 도적 두 명을 잡아서 격리해서 심문한데요.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풀어주고 잡아 뗀 사람은 10년형으로 가중처벌을 받아요. 둘 다 잡아떼면 감형되어서 6개월만 살면 나올 수 있데요. 그러면 두 도적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서로 배신 때리고 사이좋게 5년 씩 나눠 살겠지."


"맞아요! 이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고 한데요."


베카가 허공에 손가락을 쓱쓱 그으며 도표를 만들어 메이븐과 메리의 대화를 쫓아가다가 멍청한 도적들이 결국 5년 씩 나눠서 10년 형기를 살았다는 말을 듣고 웃었다.


"푸하하, 하하. 뭐 그런 병신들이 다 있어. 둘이 같이 짜고 무죄라고 우기면 합쳐서 달랑 1년만 살고 나온 다음 숨겨둔 재물을 나누면 될 거 아냐."


베카의 웃음에 전염되었는지 메이븐이 피식 실소하며 말했다.


"후후, 그러게 말이야. 동료를 팔아서 굳이 매를 맞다니, 그렇게 멍청해서 도적질은 어떻게들 하나 몰라. 흐, 사실 2인조 도적들의 의리가 그런 거겠지."


베카와 메이븐이 어리석은 도적들을 비웃는 사이 메리가 경이로운 내용이 담긴 책을 덮고 '기사단에서 일하고 싶어요'라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메이븐을 보았다.


"하지만 백작님은 이런 건 이미 알고 계셨죠? 기사단장이니 수사할 때 직접 써보셨죠?"


"그럼, 기초인데. 공범들은 따로 분리해서 조사해야 해 서로 말 맞추지 못하게. 그러면 술술 불거든. 그런데 그래도 도적들 너무 멍청하지 않냐. 머리가 안돌아가니 도적이나 하겠지 큭. 하..."


베카가 메이븐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크큭, 하여튼 범죄자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답이 없는 놈들이잖아!"


메리가 갑자기 친해진 것처럼 보이는 메이븐과 베카를 보며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며 사이좋은 남녀로 보이는 둘을 이리 저리 뜯어보았다.


"어, 둘이 갑자기 왜 그렇게 친해졌어요? 보기 좋네요. 앞으로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요."


분위기가 좋기는 한데 왠지모르는 어색함이 느껴져서, 조심조심 뜯어보니 번뜩이는 눈빛들이 사악했다. 메리가 당황해서 이야기했다.


"아니 근데 둘 다 좀 낯서니까 저리 떨어져요."


베카와 메이븐이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떨어졌고, 베카가 메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메튜 경을 부탁해, 나는 이만 황도의 협곡으로 가볼께! 메이븐, 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는 잊지 않았겠지? 비밀엄수 사례금은 내일 아침 황도의 협곡으로 가져와."


"그래, 마침 나도 이제 메튜 경이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가볼 참이야. 돈도 구하고 메리 양이 일할 기사단 사무원 자리를 요청해야 하니까. 메리, 메튜 경을 부탁해. 내일 아침에 이 병실에 다시 들릴께. 너와 메튜 경 몫의 사례금도 주고, 기사단 사무원자리 알아 본 결과 전해줄테니까."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메튜 경은 여기서 꼼짝도 못하게, 완전히 나을 때까지 제가 옆에서 감시할께요. 내일 뵈어요. 백작님! 살펴가세요 베카 양! 메튜 경을 업어줘서 고마워요."


메이븐은 시원하게 웃고 베카와 함께 성신의 신전 제1치료사령부를 나와 정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메이븐은 그 와중에 싸한 느낌이 드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일리오네와 거창한 이별을 한 터라, 돈 받으러 그녀를 찾아가기 뻘쭘했던 메이븐은 제2기사단에 숨겨 둔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 부단장 이반 군터 경의 집 문을 두드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군터 가문의 삼층 높이 별장은 오필리아 하이멜 저택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그리하여... 오늘 밤은 너희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반 군터."


늦저녁 어둠이 깔리고 귀신처럼 후드를 내리쓰고 나타난 메이븐 앞에 어리둥절한 얼굴의 이반이 나타났다. 산적으로 오해할만큼 덮수룩한 검은 구렛나루와 턱수염을 기르고, 거기 어울리지 않는 맑고 초롱초롱해서 마주보기 부담스러운 파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티리얼 전 단장님? 귀신입니까? 단장님의 숨겨둔 젊은 날 불장난의 결과입니까? 어머니는... 검은 머리를 보니 혹시 엘리나 양? 드디어 그녀가 왜 십수년 째 메이븐 티리얼 단장님께 매달렸는지 황도 사람들의 미스터리가 풀렸군요."


"아니야! 내 아들이 아니라 그냥 나라고. 설명하자면 길지만 마법사들의 장난으로 몸이 허약해졌어. 어려져 보이지만 실은 오래 못 산데."


엘리나라는 여자가 과연 그를 잘 알고, 그게 황도 내에서 유명한 일이라는 것을 메이븐은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메이븐의 기억 속에 엘리나라는 여자는 없었다.


"엘리나라는 그 여자 누군지 난 모른다. 있다가 설명 좀 해봐라. 오다가다 만나면 메이븐 티리얼이 처형당하기 전에 앞으로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녀의 인생을 살라고 말해줬다고 해."


"거, 남자로써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단장님."


"이반 너마저..."


이반의 일침에 메이븐은 낮의 행상인과 오필리아 하이멜의 경비병들을 떠올리며 움찔했다.

그는 곧 지난 하룻 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마법 같은 일들을 설명했다. 사형당하고 죽은 줄 알았다가 오필리아 하이멜의 저택에서 눈을 뜬 것, 마나를 잃어버리고 16살 소년이 되버린 것, 일리오네 핼버디아를 만났던일, 그리고 악마에게 들은 8년의 시한부 인생 등 여러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반이 감탄한 듯 큼지막한 손으로 박수쳤다.


"와, 단장님 신도 만나보고 악마도 만나보셨네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어봐서 아는데 그래도 여한이 있더라."


"그렇군요,,, 한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복수하시는 겁니까?"


이반이 조심스럽게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메이븐에게 물어보았다. 메이븐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한테 돈 뜯어내서 그걸로 노름판과 사창가에 가야지'라고 소리지르려다 참고 설명했다.


"일단 영지에 한 번 들리고 이웃인 헬키아 왕국으로 망명아닌 망명할 생각이야. 거기서 당분간 도박장과 사창가를 전전하며 방탕아로 위장할거야. 한때 고...자마스터로 불리던 메이븐 티리얼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흑! 당분간 작별이군요. 단장님, 이 이반 군터, 팽당한 단장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야, 너 황태자 조심해라. 걔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이더라. 너도 앞으로 출세길이 훤한데 그 놈 조심하고, 제1황녀도 좋은 줄이지만 아무래도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 날개가 꺾이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2기사단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일리오네 현 단장도 소드마스터이고요."


"나도 소드마스터였는데 단두대에 보내더라."


이반이 고급스런 종이에 만 말린 담뱃잎을 가져오자 두 남자는 궁상맞게 샛별이 총총이 떠오르는 밤하늘을 처마 밑에서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제법 저녁공기가 쌀쌀했다.


"엘리나인가 그 여자는 진짜 기억에 없는데, 누구지...? 아무튼 위임장 써줄 테니까 기사단 단원들 한테 맡겨 놓은 내 재산들 다 처분 부탁해. 너라면 슬기롭게 처분하겠지. 못 해도 다하면 2만 골드는 나올텐데, 1만 2천은 너하고 기사단원들이 나눠 먹고, 8천 골드 정도만 나 좀 줘."


"부족하지 않습니까?"


메이븐이 느끼기에도 달랑 그걸로 도주해 숨어살기에 빠듯하긴 하다. 하지만 18살 평민 소년에게 돈이 너무 많아도 의심을 살 것이다.


"그렇긴 한데, 여행다닐 겸 용병일이라도 해서 벌면서 살지 뭐. 설마 마나가 사라졌다고 해도 내가 어디 도적한테 칼맞고 횡사하겠냐."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나머지 1만 2천 골드는 보관해 둘테니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괜히 부잣집 아들 아니랄까봐 1만 2천 골드를 쉽게 이야기한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이반이 메이븐을 안내해 저택 내 응접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방 안 침대 밑에 숨겨진 비밀금고에서 선뜻 1천 골드 어치의 골드, 실버, 브론즈의 조합과 3천 골드어치의 보석류, 그리고 4천 골드어치 어음을 건네주었다.


"이걸 이렇게 쉽게 꺼내주는 사람은 잘 없는데... 군터 가문이 드워프들의 보물을 훔쳐 세워졌다는 전설이 사실이었나?"


"단장님 실없는 소리하지 마시고, 더 필요하면 언제든 오십시오. 2만 골드는 사실 저한테 큰 돈이 아닙니다."


"...잘났다. 옛날 부하 앞에서 선심쓰는 척 폼잡았는데, 알고보니 개폼이었네."


메이븐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구겨졌다. 이반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으며 바닥에 난 철제 금고문을 도로 닫았다. 언뜻 메이븐이 스쳐가며 보기에도 금고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보석과 금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손바닥이 허전한 듯, 몇 차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메이븐은 추가로 이반에게 부탁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거라. 짐을 싸는데... 쓸만한 칼이 없어. 지금 소드오러를 못쓰니 칼이 자주 망가질거라 비싼 검은 못 들고 다니겠고. 그냥 임시로 막 쓸 보급형 검 있나?"


"군터 가문의 무기고로 안내해드리지요."


이반이 어쩐지 자부심 가득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선량하게 웃으며 위스키를 잔에 따라 메이븐에게 건냈다. 담배를 다 태워서 버리고 메이븐은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달콤한 향이 번지면서 황금빛의 액체를 꿀꺽 삼킨 메이븐이 '크아'하고 머리를 때리는 향긋한 주향에 감탄했다.


"막 마시기 아까운 좋은 위스키네."


메이븐의 얼굴을 흘깃 보고 혹시나 도울 게 있는지 집요하게 달려드는 시녀들을 물리고, 이반 군터가 직접 앞장서 메이븐을 무기고로 안내했다. 그의 사용인들은 입이 무겁지만 혹시라도 메이븐이 메이븐 티리얼 백작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무기고에 들어와 이반이 마법조명을 켜자 투핸디드소드부터 바스타드소드, 롱소드, 시미터, 메이스, 레이피어, 펄션, 단창, 석궁 등 다양한 무기가 색색의 차가운 금속의 빛을 내뿜었다. 태생이 무인인 메이븐이 짧게 감탄했다. 하나하나가 탐이나도록 훌륭한 명작이었다.


메이븐이 무기들을 신주단지처럼 조심스럽게 하나 씩 들어올리며 관찰하다 이윽고 구불구불 휘어진 플람베르쥬와 같은 기형병기들이 모인 곳에 멈췄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검은색의 소드브레이커 단검이었다.


재질이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드브레이커는 만드는 게 까다로워 쉽게 구할 수 없었고 검은색으로 칠해져, 낮에도 어두운 골목길이나, 밤 중에 사용하면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게 마음에 드는군."


소드브레이커는 두툼한 검신을 가진 단검으로 한쪽면은 예리한 날이 세워졌지만 반대쪽은 마치 악어의 이빨처럼 톱날모양의 돌기들로 이루어져있다. 그 돌기에 적의 무기를 끼워 멈추고, 무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적이 당황하는 그 짧은 찰나에 다른 손에 든 장검으로 적의 급소를 찌르면 된다.


그리고 도로 그의 손에 익은 롱소드가 진열된 공간 앞으로 돌아왔던 메이븐은 아직 근육이 붙지 않은 자신의 팔뚝을 불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집어 든 롱소드를 도로 거치대 위에 돌려놓았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단장님, 롱소드를 고르시지 않다니 의외네요."


"롱소드 검술을 쓰면 내가 메이븐 티리얼 백작인 게 티날 것 같아. 또 몸이 개판이라 근접전을 해보니까 기사가 내리친 검을 막으면 이리저리 밀려나가더라고. 정면 힘대결은 피해야겠어."


갑옷을 입지 않은 상대를 대상으로 던질 쓰로잉 나이프 대여섯섯개를 집어든 메이븐이 날을 세우지 않은, 끝이 뾰족하고 크로스가드와 링가드가 화려하게 손을 감싸는 가느다란 검 앞에 멈춰섰다.

마법시약으로 강화했던 망고슈처럼 신비로운 파란 예기가 감도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 마침 이번에 제1황녀님께 하사 받은 에스토크입니다. 미스릴합금이고 마법도 걸려서 상급 소드익스퍼트인 제가 작정하고 내리친 소드오러도 견디더군요.


"미스릴 합금?"


"미스릴이 워낙 귀하다보니 조금 들어갔을 겁니다. 그 마저도 양이 적어서 양손검은 못만들고, 한손 검 중에서도 가벼운 에스토크 형태로 만든 겁니다. 단장님, 그거 가져가십시요."


"뭐? 정말? 이거 한 4만 골드는 되어 보이는데...."


메이븐이 부담스럽다는 눈길로 탐나는 에스토크를 살피면서 이반에게 물었다. 크로스가드와 링가드가 화려하지만 그마저도 실용적인 형태를 잃지 않았고 검신도 폼멜도 쇠가죽이 감긴 그립도 단아했다.


"어차피 현재 제2기사단에 한 손용 에스토크를 사용하는 기사는 없습니다. 4만 골드는 메이븐 단장님 목숨보다는 저렴합니다. 거절하시면 호레시오 경을 강제로 호위로 딸려보내겠습니다."


'단장님 목숨 보다는 저렴합니다'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닫힌 문 너머에서 약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메이븐은 '잘못들은 거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뒤 시선을 빼앗긴 에스토크를 집어 그 밑에 함께 놓여있던 쇠가죽 검집에 납검해 보았다.

시퍼런 예기가 빨려들 듯 수수한 검은 검집 속으로 감추어졌다. 볼수록 탐이 나는 보물이었다.


"그래, 4만 골드는 빚지는 걸로 하고 달아둬. 돈 벌어서 이자까지 갚을께."


'바른생활 사나이 호레시오가 붙으면 그건 더욱 곤란하고...'


이반 군터 못지않은 바른생활 사나이인 호레시오가 붙으면 메이븐의 탕아짓 계획이 흐지부지된다.


"마나를 되찾게 되시면, 4만 골드 정도야 금방이시지요."


"그래 이런 몸이 되어버렸어..."


'이런 몸이 되어버렸어' 대목에서 문 밖에서 '히익'하는 여자신음성이 들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었다.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간 메이븐이 뻥하고 문을 차버리자 복도에서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채 문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던 이반의 집의 하녀가 깜짝 놀라 메이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후다닥 붉게 물든 얼굴로 달려가는 것이다.

쫓아가서 첩자인지 캐물으려던 메이븐은 하녀가 달려가며 혼잣말하는 소리에 우뚝 굳고 말았다.


"야심한 밤. 여자관계가 이상하게 깨끗한 바른생활 사나이 이반 군터님의 침소에 들어온, 여자가 질투나게 예쁜 미소년... 히익."


하녀가 신음을 흘리는 까닭을 짐작한 메이븐의 얼굴이 흙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는 하녀를 보며 혀를 차더니 검지로 가리켰다.


"저거... 야, 이반 나중에 저거 반드시 잡아내서 조져라. 불순한 사상을 머리에 담고 있어."


"네? 단장님, 불순한 사상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녀의 말을 잘 이해못하는 순수한 사나이 이반이 산적같은 얼굴에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되물었다.

이래서 순수한 남자들은 안돼는 것이다.


"아니, 시발.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깊이 알려들지 말고 일단 잡아서 오해를 풀... 그냥 무조건 조져. 너의 순수함을 유지하라고."


미스릴 합금 에스토크를 혁대에 묶고, 쓰로잉 나이프와 소드브레커도 챙겼다. 메이븐은 비로소 내일 아침이면 자신이 황도를 떠나 방랑을 시작하는 게 실감났다.

풀벌레가 울며 휘영청 달이 밝은 깊은 밤이었다.

모포부터 육포, 건과일, 수통, 식기 옷가지 등 챙겨야 할 물품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야영을 밥먹듯 하는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반 군터의 집에 모두 여분의 물건이 있을 터이다. 바쁜 밤이 될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저 하녀 보니까 생각났네. 쟤랑 비슷한 성격인데 더 눈치 빠르고 일처리는 더 나을거야. 글도 곧잘 아는 여자사무원을 한 명 추천하는데 제2기사단에 사무원 자리 빈 곳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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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세 검의 종류와 검술 참고자료 목록 +1 18.07.19 120 0 -
37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2) 18.08.10 57 0 18쪽
36 [외전] M. T.의 기사 임용 면접 후기 18.08.09 58 0 15쪽
35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1) 18.08.06 76 0 17쪽
34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3) 18.08.05 75 0 18쪽
33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2) 18.08.04 69 0 18쪽
32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1) 18.08.03 101 0 19쪽
31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3) 18.08.02 101 0 18쪽
30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2) 18.08.01 121 1 18쪽
29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1) 18.07.31 118 1 17쪽
28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8) 18.07.30 108 0 18쪽
27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18.07.29 102 0 19쪽
26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18.07.28 102 1 18쪽
25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5) 18.07.27 107 0 19쪽
24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4) 18.07.26 91 0 17쪽
23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3) 18.07.25 129 0 17쪽
22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2) 18.07.24 109 0 17쪽
21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1) 18.07.23 127 1 19쪽
20 헤이스팅스 영지로 (4) 18.07.22 126 1 18쪽
19 헤이스팅스 영지로 (3) 18.07.21 151 1 19쪽
18 헤이스팅스 영지로 (2) 18.07.20 162 1 17쪽
17 헤이스팅스 영지로 (1) 18.07.19 154 0 19쪽
16 죄수의 딜레마 (4) 18.07.17 161 0 19쪽
15 죄수의 딜레마 (3) 18.07.16 146 0 18쪽
14 죄수의 딜레마 (2) 18.07.15 175 0 18쪽
» 죄수의 딜레마 (1) 18.07.14 194 0 20쪽
12 황도의 비밀결사 (4) 18.07.13 176 1 19쪽
11 황도의 비밀결사 (3) 18.07.12 200 1 19쪽
10 황도의 비밀결사 (2) 18.07.11 254 1 19쪽
9 황도의 비밀결사 (1) 18.07.10 307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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