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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님의 서재입니다.

죽다 부활해서 방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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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
작품등록일 :
2018.07.02 16:14
최근연재일 :
2018.08.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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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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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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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황도의 비밀결사 (4)

DUMMY

'하프오크라니. 무슨 끔찍한 혼종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럼 설마...'


변태적 상상력 아니랄까봐 귀가 새빨게지며 어떤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려는 베카의 주둥이를, 이번에는 메이븐 대신 메리가 본능적 육감을 쫓아 틀어막았다. 메튜의 피가 묻어 비린내가 나는 손이 빨간 흔적을 남겼고 베카는 불쾌한 듯 퉤퉤 거리며 주변에 있는 물로 얼굴을 씻었다.


"무슨 짓이야! 너 메이븐하고 손버릇이 비슷하네."


"아, 미안해요. 아무튼 직감하셨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신전이 변한 원흉은 메이븐 티리얼 백작님이에요."


"읭?"


메리가 아련한 눈으로 말했다.


"네, 에스피온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며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고 낙오하는 부대가 늘었어요. 티리얼 백작님은 그 원인을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초급사제들의 수급이 불균형하다는 점에서 찾으셨지요. 전장의 거친 환경과 열악한 위생, 체력적 한계까지 몰아가는 가혹한 일정을 성직자들이 소화해낼 수 없다고 보신 거에요. 그래서 대신전에서 당시 대장군이셨던 소드마스터 티리얼 백작님이 성신님을 알현해 한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그 놈이 신도 만났었단 말이야? 세상에, 말세네. 그런데 인성이 왜 그 모양이람. 조건은 뭐였길래?"


베카는 신과 알현해 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의 뜻을 전하는 사도에 대한 믿음이 와장창 깨어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씁쓸히 물었다.


"성신님을 에스피온 제국의 유일신으로 모시는 대신, 연약한 육체를 지닌 신도가 아닌 강한 육체를 지닌 신도에게 더 강한 신성력을 부여해준다는 거였지요. 그리고 하프오크이신 스텔라 자매님께서 전장 한복판에서 눈부신 후광을 내뿜으며 일시에 백명의 부상자를 일으켜내며 성녀로 각성하셨어요."


"와우."


급격한 전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베카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메이븐 티리얼이 난 놈인지 미친놈인지 잘 모르겠지만, 에스피온 제국을 일으킨 명장이자 주변국의 재앙이라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에스피온 제국군은 파죽지세로 주변 왕국들을 물리치기 시작했죠. 쓰러뜨려도 다음날 멀쩡하게 전장에 나오는 불사의 군단, 특히 그중에도 에스피온 제국 유일신인 성신님의 가호가 깃든 사제들은 맨손으로 적의 정예병을 쓰러뜨리고 둘이 모이면 갑옷을 갖춰 입은 정규기사도 쓰러뜨리는 인간병기... 아니 무위를 보였어요."


베카가 큰 깨달음이 찾아온 듯 멍한 눈길로 응급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성녀가 연약하고 여리여리한 아리따운 미녀라는 고정관념은 시대착오적이야. 용사와 파티를 맺어 마족들과 싸우며 마왕성까지 종군한다면 오우거나 오크급 신체능력은 가져야지. 엄청난 병력이 등장하는 거야. 생각해봐, 미래의 성녀는 마왕의 앞에서 기력이 다해 쓰러진 용사의 검을 빼았고 '크큭, 실은 용사가 우리 파티에서 최약체였습니다'라며 검을 혀로 핥는 하프오우거 성녀야."


베카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메리는 아름다운 얼굴로 어딘가 이상한 상상에 빠진 베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무튼, 메이븐 님의 작품이라고 보시면 되요. 안 좋은 점은 다른 왕국으로 쫓겨난 교단들, 특히 태양신의 교단과 달의 신의 교단이 이를 갈고 있다는 거에요. 티리얼 백작님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며 추진했거든요."


"그놈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실속이 없어요. 하여간..."


베카가 오늘 처음만난 주제에 마치 메이븐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안다는 듯 불평을 토했다. 자기가 잠깐 감탄했던 것도 잊은 듯 했다. 꼰대기질이라 명명되는 위험한 성격이 감지되자 메리는 조금씩 베카에게서 떨어져서, 회진을 마치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걸어오는 성녀 스텔라를 향해 갔다.

스텔라가 송곳니가 있는 돌출된 턱으로 싱긋 미소지었다. 산채로 사슴과 늑대를 찢어먹을 듯한 강한 턱근육과 각진 얼굴이 베카에게 인상깊었다.


"아! 그리고 성녀님의 경우는 이야기가 더 있는데. 그건..."


"취익! 메리, 괜찮다면 제가 직접 설명하지요. 전 신성왕국군에게 토벌된 오크들의 마을에서 죽임을 당할 뻔 했어요. 췩! 어머니는 오크들에게 납치된 인간여자였고, 취에엑,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지요. 그 뒤로 저는 오크부락에서 나고자랐습니다. 제 나이 12살 때 습격으로 불타는 오크부락을 뒤로한 채, 평야로 나와 임마뉴엘의 신성기병대 쫓겼습니다. 취익, 하프오크라고 말했지만 믿어주지 않더군요. 그 때 백마를 타고 달려오신 티리얼님이 저 절구해주셨어요. 췩!"


"아, 그 놈팽... 아니 메이븐 티리얼 백작님이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습관처럼 메이븐을 욕하려던 베카가 몽롱해진 스텔라의 황록빛 두 눈과, 그녀의 허벅지 굵기만한 손목을 보고 호칭을 고쳤다.

베카에게 대가없는 선행을 배푸는 메이븐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스텔라가 하프오크의 안면근육으로 지을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미소를 띠우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 셈이지요. 취엑! 하지만 저흰 그것보다 깊은 사이랍니다."


"깊은 사이...?"


스텔라는 더이상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고, 주변의 치료사와 사제들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애써 그곳을 외면했다. 의아한 듯 베카가 메리에게 귓속말했다.


"야, 설마 혹시 성녀님이 여주고 메이븐이 남주라는 로맨스물은. '성녀와 기사의 사랑'이란 진부한 로맨스물이 아니야...?"


메리는 응급실 창가를 보며 손에 턱을 괴고 몽상에 잠겨있다가, 그만 턱을 받치던 손이 미끄러져 선반에 머리를 찍을 뻔 했다.


"그런 거 제게 묻지마세요!"


"섭섭하게 왜 소리지르고 그래. 아앙, 넌 읽어봤으니까 알 거 아냐."


베카가 되도 않는 아양을 떨자 순식간에 메리와 침상에 누워있던 메튜 경의 얼굴이 똥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뭐야, 뭔데에? 인상깊게 읽었구나... 그렇지?"


베카가 메리의 팔뚝을 꼬집으며 괴롭히자 메리는 침상에 누운 메튜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베카 씨, 절 내버려둬요, 좀! 메튜 경! 어머 이것 좀 봐. 이제 정신이 드시나요?"


"야, 걔는 아까부터 깨어서 엳듣고 있었어. 말 돌리지 마. 응? 이건가?"


베카가 책장에서 '미남과 야수'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꺼내들었다. 표지삽화를 보니 한 눈에 물결치듯 아름다운 하늘빛 머리를 가진 남자를 알아보았다.


"오, 진짜 메이븐 자식이잖아. 어려지기 전 원판은 볼만 하군. 내 취향이었어. 그런데 삽화 속 스텔라 성녀님은 아름다워 보이는 반면, 메이븐은 어딘지 피곤하고 피골이 상접해 보이는데."


'미남과 야수'라는 소리를 듣자 아까전 성녀님께 저지른 무례가 미안해 죽은 듯 침상에 누워 자는 척하던 메튜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그건 '미남과 야수'라고 불립니다. 기사도문학의 명작이지요."


"너도 읽었던 거야? 엄청 유명한가봐?"


베카가 놀라하며 책을 펼쳤다. 메리가 옆에서 왠지 발을 동동구르며 책을 낚아채려 했지만 소드익스퍼트인 베카의 손에서 뭔가를 뺴앗을 순 없었다.


"헬키아 왕국군의 잔인한 토벌로 불탄 오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하프오크 소녀를 에스피온 제국의 검사 메이븐 티리얼이 구해줍니다. 헬키아 왕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그의 밑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아본 소녀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세요. 환자는 안정이나 취해요."


메튜는 그러건 말건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그 명작이 실화에 바탕을 뒀을 줄이야. 스텔라님을 뵈니 과연 명작이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군요. 그 명작은 기사도문학의 정수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서서히 자신의 감정에 눈을 뜬 하프오크 소녀에게 어느 날 발정기가 찾아와..."


퍽!


메리가 자연스럽게 손에서 놓친 물주전자가 자연스럽게 메튜 경의 머리를 맞췄다.

곧 쏟아지는 물에 놀란 그녀가 수건을 들고 메튜의 얼굴을 두 손으로 짓누르자 메튜의 두 눈이 뒤집어져 흰자위가 나타났다. 이제 막 연약한 새살이 돋은 환부를 눌러버린 것이다. 메튜 경의 눈을 보고 메리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 양 소리질렀다.


"꺄아악! 메튜 경! 메튜 경이 또 의식을 잃었어요."


스텔라가 메리의 비명을 듣고 다가오며 자연스럽게 베카의 손에서 '미남과 야수'를 뺴았았다. 아직 서문밖에 못 읽은 베카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스텔라는 메튜 경을 살피고 그저 의식을 잃었을 뿐 다른 이상은 없다고 메리를 안심시켰다.


"취엑! 그런데 두 분은 메이븐 티리얼 백작님과 무슨 사이이신가요? 췩."


"무슨 사이기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


베카가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 받은 사이랍니다."


졸지에 실업자에 노숙자로 전락할 위기에 내몰린 메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 스텔라는 어쩐지 안심한 눈빛으로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그렇군요.'하고 자리를 떴다.


베카는 신전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기사단 출장지부를 떠올리며 잠시 침상에 누운 메튜와 곁에 앉은 메리의 눈치를 보았다.


"심심해. 그럼, 여기서 의료인도 보호자도 아닌 나는 할 일도 없으니까 잠깐 바람쐬러 나갔다 올께."


"예, 다녀오세요."


어쩐지 사악한 미소를 짓는 녹색머리 미녀, 베카가 메리에게 인사하고 치료사령부 밖으로 나왔다. 메튜를 업고 지났던 길을 도로 되짚어 성신의 신전 밖으로 나가자, 베카는 등에 짊어진 환자가 없어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하고 기운이 났다.

그녀는 뛰어오르는 기쁘게 뜀박질하여 삭막한 성신의 신전 문을 나가, 성신의 신전 바로 앞에 있는 기사단 출장지부의 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옮기던 건지 옆구리에 서류상자를 낀, 갑옷 대신 업무복을 입은 기사가 문을 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레이디, 저희가 지금 바빠요. 하이멜 공작가의 저택이 무너지고 카이얌 학파 수장이 실종되어서... 인원이 모두 그리로 차출되었죠. 사소한 민원은 처리해드리기 곤란해요."


베카는 레이디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 씨익 단정치 못하도록 크게 미소지었다.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역적 메이븐 티리얼이 살아나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니깐요!"


"네에?"


기사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떨어뜨리고 되물었다. 바닥에 종이더미가 쏟아졌다. 베카는 그 얼빠진 반응이 마음에 들어 기사의 어깨를 턱하니 쥐고 추가설명했다.


"네, 네 그렇다니깐요! 그 오필리아가 흑마법사였는데 계가 실험을 해서 메이븐 티리얼 백작의 시체를 구입해서 바늘로 꼬매고 마법을 걸고 힐하고 포션을 들이 부어서 살려냈데요. 그 흉악한 역적놈이 아직도 황도의 거리를 활보한다는 거 아닙니까."


"데... 데스나이트? 아니, 듀라한인가요?"


기사가 오들오들 떨었다. 황제폐하가 계신 도시 내에서 소드마스터로 만든 데스나이트라니 당장 황도가 뒤집어질 만큼 큰 사건이었다.


"데스나이트! 무시무시한 자식이에요. 일검에 오필리아 하이멜 저택의 경비들을 도륙하고 오필리아 하이멜도 처치한 뒤 도주했지 뭐에요. 어서 빨리 수배해야 해요."


"맙소사."


안에서 서류업무를 하던 여성사무원도 깜짝놀라 입을 벌린 채 베카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신고하지 않기에는 신고포상금과 너의 재산을 이중으로 수령하는 유혹은 너무컸어.'


베카가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과 다르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긴급보고문을 작성하기 시작한 기사와 젊은 사무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신고포상금은 얼마나...? 아, 그럼 사실이 확인되면 돈은 일주일 뒤에 황도의 협곡에 베니라는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사랑해요, 언니! 네, 네, 맞아요. 오늘 빈민촌 난리도 그 녀석 짓이래요. 나쁘죠. 메이븐 티리얼. 아무튼 흉악한 놈이니까 꼭 좀 잡아들여 주세요."


베카가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잊지 말라고 돌아서서 덧붙였다.


"그 새끼는 꼭 잡아서 콩밥 먹이고 옥에 쳐넣어야 해요. 아주 위험한 새끼라구요."


*


메이븐과 일리오네는 결투가 끝나고 지쳐서 물이 흐르는 분수대 옆 나무 밑에 앉았다. 정확히는 소드마스터인 일리오네는 멀쩡히 나무의 그늘을 즐기며 바람에 머릿결을 흩날리며 즐기고, 메이븐은 혼자 탈진해 분수대 인근 나무에 등을 기대고 쓰러져 있었다.

일리오네가 화창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단장님 저와 함께 떠나요."


메이븐이 일리오네의 말에 푹 한숨을 쉬었다.


"안 돼. 네가 내 측근인 걸 다 알잖아. 오필리아의 마법으로 역적인 내가 부활한 게 알려지면 너까지 추격당하고 핼버디아 가문도, 제2기사단도 풍비박산 날거야."


"에이, 제가 메이븐 티리얼 백작의 처형에 충격받고 자아를 찾는 여행을 떠난 걸로 하고 단장님은 제 새로운 종자인 18살 평민 레이크웰 하면 되죠."


"그래도 위험해."


'게다가 너에게선 오필리아와 같은 부류의 냄새가 나.'


메이븐이 뒷말을 삼키고 힐끔힐끔 일리오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완력으로 끌고가면 저항할 수 없겠지만, 다행히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어쩌면 일리오네와 도망쳐서 어디 깊은 산골마을에 숨어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은 삶이 8년만 아니었으면...'


기분나쁜 숫염소 악마 메피스토의 얼굴을 떠올리며 메이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리오네는 앞날이 창창한 소드마스터이다. 어쩌면 제국제일의 검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 모르는데 그의 욕심으로 앞날을 막고, 8년 뒤 과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이성으로 보기는 했나보네.'


"킁, 킁,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나네. 무슨 냄새요?"


일리오네가 자연스럽게 메이븐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오자 메이븐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37살의 동정은 딱한 것이다.


"멈춰, 더는 다가오지 마."


그러든가 말든가 일리오네는 메이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미 단장님 부활한 사실이 자매들에게 퍼졌어요. 사실상 단장님이 안전한 곳은 없어요."


"야, 절망감을 줄 생각이면. 그만 가 봐. 난 보란듯 도망칠거야."


글라디우스도, 망고슈도 잃은 메이븐이 어꺠부분에 구멍이 나고 피가 튀긴데다, 땅을 뒹굴며 엉망이 된 옷을 가지런히 하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일리오네는 메이븐의 코앞에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와 메이븐의 푸른 눈을 맞춘 채 메이븐이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돌릴 때까지 뚫어져라 응시했다.

일리오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쉬는 메이븐에게 검례했다.


"그럼 단장님.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도."


메이븐이 시원섭섭하면서도 달콤쌉싸름한 기분에 잠겨, 기운 없이 몸을 돌려 떠나는 짧은 갈색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품은 그의 제자이며 후임 기사단장인 일리오네 핼버디아를 보았다.


"야!"


"네, 눼에?"


일리오네가 황금빛 눈동자를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리는 석양 속에 아름다운 미소년이 그녀를 애증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게 예뻐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일리오네가 곧 들려올 고백을 기다리는 수줍은 소녀처럼 콩닥이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처형 당한 나 같은 놈 잊고 인생 잘 살아라. 안 늦었다. 2기사단에도 좋은 놈들 많다."



*



기사단 출장지부에 신고서를 작성하고 다시 메튜 경이 입실한 응급실로 돌아온 베카는 메리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사이좋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프오크 성녀 스텔라는 응급실 회진을 마치고 응급실을 떠난지 오래였다.

피냄새가 나는 시커먼 형체가 불쑥 그녀들의 등뒤에서 솟아나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야, 베카, 너 오늘 못 출연한 공연은 어떻게 하냐?"


"히야약!"


"얌마! 너 그렇게 갑자기 등 뒤에서 등장하지 마."


메리가 비명으 을지르고, 앉아있던 의자를 반사적으로 들어올려 내려찍으려던 베카는 가까스로 그 먼지와 피에 덮인 형체가 메이븐인 것을 깨닫고 도로 철제 의자를 바닥에 내렸다.


"두 번 놀래키면 죽겠다. 어쩌라고, 메리 양이야 매번 놀란다고 해도, 넌 왜 놀라냐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베카가 움찔하더니 곧 평소의 뻔뻔한 얼굴을 하고 여배우다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노, 놀라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다음부터 인기척 좀 내고 다녀. 그게 예의야. 노크도 하고, 헛기침도 하고, 어?"


"맞긴한데 너한테 예의 설교를 들으니 싫다."


메이븐이 툴툴거리며 의자를 하나 더 끌고와 둘의 곁에 앉았다. 그제서야 메리가 일리오네의 소드오러에 걸레가 된 메이븐의 상의 오른쪽 어깨부분을 알아보았다. 적갈색으로 물든 게 분명 핏자국이다.

메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백작님, 싸우셨어요?"


"응, 졌어."


"티리얼 백작님이요? 소드익스퍼트 중급인 메튜 경도 손쉽게 이기셨는데, 상대가 누구셨길래요?"


"소드마스터."


베카가 그 소리에 배를 부여잡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 소드마스터? 야, 무슨 소드마스터가 뒷동네 건달도 아니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어디서 양아치들한테 얻어맞고 와선. 그래, 소드마스터가 나오라니 오냐하고 나오던? 결과에 승복하고 가보겠다니 살펴가시라던?"


"응. 야 나도 소드마스터거든?"


"'였'잖아."


분노한 메이븐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차이나드레스를 입은 채 건들거리는 얄미운 베카를 보자, 일리오네와 작별해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기분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정리된 정도가 아니라 화로 들끓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약을 올리는 베카를 흘겨보며 메이븐은 옷을 다시 정리했다. 구멍나고 피칠갑이 된 어깨부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사서 갈아입고 올 걸 그랬다.


"...그래 공연 펑크낸 주연배우 주제에."


베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크흠, 흠. 오늘은 어차피 난 비번이야. 내 동생 베니가 나오거든. 쌍둥이처럼 닮아서 거의 구분 못 해. 난 그래서 바깥나들이 나왔다가 네가 길가던 죄없는 우체부를 핍박하기에 엮인 거고."


메이븐이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이인일역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베카가 한 명의 인물인 줄 알고있는 황도의 협곡 관객들을 대상으로 엄연한 사기 아닌가 싶었다.


"...그럼 빈민촌 집기들과 공공기물을 부순 건 어떡할 건데?


"글쎄 그 시간에 선량한 베카 양은 황도의 협곡 무대 위에서 동방의 가녀린 투란도트 공주였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방년 18세 평민이신 레이크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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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세 검의 종류와 검술 참고자료 목록 +1 18.07.19 121 0 -
37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2) 18.08.10 58 0 18쪽
36 [외전] M. T.의 기사 임용 면접 후기 18.08.09 59 0 15쪽
35 폭풍같은 내전 - 평야의 결전 (1) 18.08.06 77 0 17쪽
34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3) 18.08.05 75 0 18쪽
33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2) 18.08.04 69 0 18쪽
32 폭풍같은 내전 - 베네딕트 남작령 침공 (1) 18.08.03 102 0 19쪽
31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3) 18.08.02 102 0 18쪽
30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2) 18.08.01 122 1 18쪽
29 폭풍같은 내전 - 파르찬 루이스 유격대 (1) 18.07.31 118 1 17쪽
28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8) 18.07.30 109 0 18쪽
27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7) 18.07.29 102 0 19쪽
26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6) 18.07.28 102 1 18쪽
25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5) 18.07.27 108 0 19쪽
24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4) 18.07.26 91 0 17쪽
23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3) 18.07.25 130 0 17쪽
22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2) 18.07.24 110 0 17쪽
21 부러지는 피에라브라스 (1) 18.07.23 128 1 19쪽
20 헤이스팅스 영지로 (4) 18.07.22 126 1 18쪽
19 헤이스팅스 영지로 (3) 18.07.21 152 1 19쪽
18 헤이스팅스 영지로 (2) 18.07.20 163 1 17쪽
17 헤이스팅스 영지로 (1) 18.07.19 154 0 19쪽
16 죄수의 딜레마 (4) 18.07.17 162 0 19쪽
15 죄수의 딜레마 (3) 18.07.16 147 0 18쪽
14 죄수의 딜레마 (2) 18.07.15 176 0 18쪽
13 죄수의 딜레마 (1) 18.07.14 194 0 20쪽
» 황도의 비밀결사 (4) 18.07.13 177 1 19쪽
11 황도의 비밀결사 (3) 18.07.12 201 1 19쪽
10 황도의 비밀결사 (2) 18.07.11 254 1 19쪽
9 황도의 비밀결사 (1) 18.07.10 308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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