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1)
철컥-
얘기를 마친 헤러드 장로가 문을 닫고 나와서는 한 번 째려보고 걸어가자 하이든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로 단단히 찍힌 거 같은데.’
“루시안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하이든이 문을 두드리자 업무를 보고 있던 루시안은 흔쾌히 수락했다.
“들어와.”
허락하자 하이든은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우선, 앉아서 얘기하자.”
루시안이 일어나서 소파에 앉자 하이든도 눈치껏 자리에 착석했다.
하이든이 앉자 루시안은 웃었다.
“뭐, 용건은 뻔한 거 아니겠어?”
“아들 때문이겠죠.”
“맞아! 부모가 자식 농사를 망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식 복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들을 풀어달래.”
“허락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
“허면,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헤러드 장로의 성미로 봤을 때는 이대로 가만히 넘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적당한 기회를 보다가 풀어주려고.”
“헌데, 이렇게 질질 끄시는 이유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 거 아닙니까.”
“역시, 자네 눈은 속일 수 없다니까.”
루시안은 손깍지를 끼고 웃었다.
‘감히, 사사로이 사병을 사용하다니.’
이번 기회로 그만한 대가를 가르쳐줄 심산이었다.
*
“다행이다. 정말로...”
알렉스가 쾌차하자 에밀리아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복도를 사뿐히 뛰어다녔다.
기둥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을 보니.
“오늘따라 달도 무척 밝네.”
달도 축하해주는 건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지...?”
반대편 통로에서 시녀가 귀중한 손님을 모시고 있는 거 마냥 길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
꿈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어봤는데...아팠다.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믿기 힘든 현실에 달려가서 모퉁이를 돌고 소리쳤다.
“비앙카!!”
“...!?”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비앙카도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진짜네...”
에밀리아는 황급히 달려가 비앙카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봤다.
“진짜, 맞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그보다 어떻게 됐어?”
비앙카가 반가운 기색보다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양손을 잡고 물어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무, 무슨 일인데. 아니, 그보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참고인으로 잠시 온 거 뿐이야.”
“참고인?”
“그 친구는 무사한 거 맞지?”
“그 친구라니?”
“네 옆에 있던 친구 말이야.”
“혹시, 데미안을 말하는 거야?”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이름이 맞는 거 같았다.
“어! 그 친구 말이야.”
“데미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데...?”
‘뭐야..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얼른, 알려줘. 데미안한테 무슨 일 생긴 거냐고!!”
에밀리아가 어깨를 흔들면서 재촉하자 비앙카는 할 수 없이 알려줬다.
*
“녀석은 잘 있지?”
“네, 하명하신대로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아주 잘하고 있어.”
이사벨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병은 숨죽이면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급히 호송된 죄인(罪人)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눈 밖에 났다.
녀석의 앞길이 왠지 모르게 불쌍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뒤끝이 깊기로 자자했다.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있었다.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
-누가 온다.
‘누구지..?’
밥 시간이라도 된 건지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자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
점차 드러나는 실루엣을 보는 순간, 배고팠던 입맛도 급격히 사라졌다.
“여기서 또 볼 줄은 몰랐는데.”
“아주 잘 어울리는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런 곳을 사사로이 드나들 정도면 범상치 않은 신분인 거 같은데...?”
“하는 짓은 얄밉기 짝이 없지만, 머리는 제법이네.”
“쓸데없는 말 할 생각이라면 이만 가보지.”
“지금 네 처지를 보고도 자존심 부릴 때야?”
-아주 의기양양하구나.
천마의 말대로 그녀가 갑질을 하자 나는 찬 바닥에 몸을 눕히고, 반대쪽으로 뒤척였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이사벨은 화가 나는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 부리지 말고. 내가 큰맘 먹고 살 기회를 줄게.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빌어.”
기회를 줬지만, 녀석은 등만 떡하니 보여주고 있었다.
‘목숨 앞에서는 그 자존심도 부질없다는 걸 알려주지.’
“오기 그만 부리고. 내 말 순순히 듣는 게 좋을 거야.”
“너나 오기 그만 부리고 얼른 가기나 해.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사과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야!”
“.....”
“내 말이 우스워 보여?!”
“아니!”
“그런데?”
“그냥.”
“야!!”
이사벨이 쇠창살을 꽉 잡고 소리를 내질렀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후 불었다.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네. 거기, 경비병! 개 좀 당장 끌고 가.”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 나보고 개라고 했어?!!”
“딱 봐도 나보다 어린 거 같은데. 벌써부터 귀가 먹었나?”
-이야~ 너한테 이런 말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사람의 신경을 잘도 긁는구나. 이 정도면 아주 천직이야. 천직.
천마가 칭찬할 정도면 제대로 먹혀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맞는지.
“너 내가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만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바본가~ 여기서 꼼짝 하는 거 말고는 할 게 뭐 있다고 그러는 건지..”
“야! 지금 말 다했어?”
“......”
이사벨은 분이 안 풀리는지 이를 꽉 물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녀석은 아직도 뒷모습만 보인 채 금붕어마냥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두고 봐라. 내가 기필코, 콧물눈물 범벅으로 만들어주고 만다.’
*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넵! 그러면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얘기를 나누고 있던 루시안과 하이든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또 오셨네.’
“그 녀석, 어찌나 얄밉던지.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나보고 개래. 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위로를 해줘도 모자를 판에 폭소를 터뜨렸다.
루시안이 배를 부여잡고 연신 웃자 이사벨은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동생이 개 취급 당했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그 자식, 당장 어떻게 좀 해봐! 진짜, 개처럼 개 목줄을 달든, 때려서 훈련시키든. 콩밥 좀 먹여달라고...”
“야! 데미안을 잡고, 가뒀다는 게 사실이야?!!”
의문의 여자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이사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여자는 또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죠?”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묻잖아!”
무시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또 무시받자 이사벨은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내 말 안 들려요!”
“안 그래도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시비 걸지 말고 잠자코 입이나 다물고 있어.”
동생과 에밀리아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자 황급히 말렸다.
“그만들 해. 어찌됐든 두 사람 다 용건이 데미안의 처우 때문인 거 아니야?”
“친구라는 녀석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친구의 등에 칼을 꽂다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저기요! 누군지 몰라도 우리 오빠한테 망발하지 말아요!”
이사벨이 턱짓으로 물어봤다.
“이 여자는 또 뭐야? 친구를 사귀더라도 제대로 사귀지. 완전, 무(無)개념이잖아.”
“꼬맹아. 지금 뭐라 했니?”
“꼬맹이 아니거든.”
“어린애가 잘 시간에 여기서 뭐하는 거니? 어서 자러가렴.”
“어떻게...하나같이 예의가 없을 수가 있는 거지?! 꼬맹이 아니고 어엿한 성인이거든.”
“껍데기만 어른이면 뭐해? 속은 아닌데.”
“지금 말 다했어?”
“정신연령이 어린애나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데...”
루시안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그녀들의 화살은 갑자기 루시안에게로 향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얘랑 똑같다고?”
“지금 그 말 당장, 취소해! 비교를 해도 이딴 여자랑 비교하다니.”
“뭐? 이딴 여자..? 지금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다. 어쩔래..?”
“루시안 님! 얼른 말리십시오. 이렇게 가다가는 답이 없습니다.”
하이든의 말대로 하루빨리 말려야만 할 거 같았다.
분위기가 너무나도 흉흉했다.
새로운 사태에 또 직면하자 골머리를 또 앓게 생겼다.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닌데...’
상황이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갔다.
‘어떻게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운이 더럽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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