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소문
“흐윽...흐윽....”
어둠 컴컴한 방안.
침대 위로 봉긋 솟아오른 이불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화가 나고, 미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 뿐인 가족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날마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살기 싫어지기만 했다.
그 날이 영원히 안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
‘이제 그만 마셔야 할 거 같은데?’
탁자에 쌓인 술병을 보자 슬슬 걱정이 들었다.
애송이가 진짜로 속상했는지 취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빌어먹을 공작이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족족, 애송이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분별하지도 못한 채 와인을 계속 들이마셨다.
그 뿐만 아니라 애송이의 술기운이 올라오자 빌어먹을 공작은 역시, 애송이를 붙잡은 이유가 있었는지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
“자네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나?”
“딸?”
“그래, 레베카 말이야.”
“아~ ㄹ, 레베카 마..말씀이시죠.”
술에 잔뜩 취했는지 애송이는 몸도 못 가눴다.
목 뿐만 아니라 허리도 연신 숙였다.
심지어 말도 어눌했다.
“브...ㅆ해요.”
“뭐라고?!”
윌리어스가 다시 물어보기 무섭게 애송이가 갑자기 테이블을 딱 치고 벌떡 일어나더니 윌리어스를 똑바로 쳐다봤다.
“주제넘지만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해서도 아닌, 정략 약혼이라니...”
그 말과 함께.
철푸덕-
애송이가 바닥에 쓰러지자 윌리어스는 술에 잔뜩 취한 데미안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런데.
드르렁-! 드르렁-!
걱정과 다르게 곤히 자고 있자 마음을 놓았다.
“보기보다 술버릇이 고약한 친구군”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흡족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식탁에 팔을 올리면서 윌리어스가 손으로 턱을 매만지자, 문뜩 걱정이 들었다.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음흉하게 웃는 걸까?
웃음이 어딘가 모르게 섬뜩하고, 걱정됐다.
*
“윽! 머리야.”
이마를 부여잡으면서 내가 몸을 일으키자 천마는 득달같이 물어 뜯었다.
-어이구~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지. 누가...주는 대로 다 마시래? 마시더라도 취기를 몸 밖으로 내뿜던가.
“도수가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지.”
술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정신이 확 가버렸다.
이성이 남아있어야 취기를 내뿜던가 할 텐데.
어젯밤, 작정한 건지 몰라도 도수가 무척 높았다.
“그보다 어제 내가 뭐..실수하거나 그런 건 없지?”
-실수인지, 본심인지 모르겠지만, 뭐..크나큰 사고는 없었어.
“그게 뭔 말이야?”
-지가 술에 취해 놓고는 왜 나한테 짜증이야! 말해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똑똑-!
누가 문을 두드리자 나는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크흠...”
잠긴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부인께서 식사하러 오시랍니다. 데미안 님!”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인께서 시킨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시녀는 발길을 돌렸다.
아침부터 할 일이 산더미여서 노닥거릴 틈이 없었다.
*
“윽! 머리가 띵해 죽겠네.”
“어제 술 한 잔 하셨습니까?”
마중 나온 시온이 나란히 걸으면서 물어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어제, 어떤 용무가 있으셨는지 몰라도 절 버리고 가시더라고요?”
“아...그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백년 묵은 능구렁이네.
시온이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화를 충분히 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에 제가 일일 가이드 해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그래도 양심이라도 있는지 시온이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자 나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럴까요?”
여기 온 지 3일이나 지났지만 관광 명소 한 번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하긴, 여행의 묘미는 구경이긴 하지.
천마의 말대로 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관광 명소도 둘러보고, 그 지역의 특산물도 뜯어보고, 맛보고, 구경하는 게 여행의 참 맛이었다.
그런데.
“.....!?”
역시, 수도 답게 소문도 금세 퍼졌는지. 사람들의 중얼거림이 어딜 가든 들려왔다.
“자네 들었어?”
“뭔 소문?”
“알고 봤더니 왕실이 강제적으로 약혼을 청했데!”
“그 말이 정녕 사실이었단 말이야?”
사람들이 그 소문의 요충지로 금세 몰려들고 있자 나뿐만 아니라 시온도 궁금한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가까이 대봤다.
“그것도 레베카 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그랬다나, 뭐라나~”
“어휴~ 역시,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하여간, 왕족이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고개를 돌리다가 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물어봤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저도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비록, 사실 여부는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이 진정 사실이라면 그녀가 왜 그렇게 약혼을 하기 싫어했는지 앞뒤 맥락이 다 들어맞았다.
비어있던 퍼즐이 다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뭔가...불길한데?
‘뭐가?’
-그냥, 시기적으로 뭔가 딱 맞아 떨어져서.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넘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만 가죠.”
“아...네.”
내가 앞장서자 시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따라갔다.
‘뭔가, 느낌이 싸하단 말이지..?’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한가득 들었다.
“에이~ 아닐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시온은 앞서 가는 내 뒷모습을 바짝 추격했다.
그런데 그 여파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너도 들었어?”
“어!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일까?”
“몰라. 윗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눈 밖에 나고 싶지 않거든.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아무래도 좋겠어.”
그 소문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궁 내부까지 금세 퍼졌다.
왕궁을 관리하는 시녀든, 요리하는 요리사든, 장신구와 더불어, 무기를 제작하는 장인들도 그 소문을 이야깃거리로 일삼았다.
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한 남성은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떤 자식이!! 이 따위 헛소문을 퍼트린 거야!!”
책상을 완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한 가득 쌓여있던 서류들이 나풀나풀 거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먹물이 쏟아지면서 수많은 종이들이 검게 물들 뿐만 아니라 밑에 있던 카펫까지도 검게 물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걸로도 성이 안 차는지.
콰직- 콰직-
의자를 던지고, 책을 던지고, 눈앞에 쥐어지는 모든 물품들을 다 내던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책상을 짚으면서 뜨거운 콧김을 연신 뿜어냈다.
“어떤 녀석이 이 같은 짓을 벌인지 몰라도 잡히기만 해봐라. 죽어 달라고 빌게 만들어주고 말테니!”
날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심산이었다.
“감히, 날 건드리다니.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는 이글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손바닥 밑에 있던 종이를 구겼다.
*
“소문을 잠재울 수 있는 대책이 있으시면 괘념치 마시고 말씀해보시죠.”
윌리어스가 안건을 거론하자 원탁에 둘러앉은 백작과 후작, 다양한 계층의 귀족들은 고민에 빠졌다.
‘해결책이라...’
“제 생각은 아무래도 이 소문의 주동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백작이 손깍지를 끼면서 말하자 다들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하긴, 주동자를 찾아야. 이 사단을 바로 잡을 수 있겠지요.”
“가지를 아무리 쳐봤자 소용없으니. 근본적인 뿌리부터 뽑아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백성들이 더 이상 헛소문을 퍼트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어떤 식인지.”
윌리어스가 심도 있게 물어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말로 하다가, 안 되면 군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소리군.”
“왕실 체면이 걸린 마당에 물불을 가릴 수야 있겠습니까. 말로 안 되면 강압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쪽에서 지원사격을 해주자 윌리어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했다가는 왕실만 우스운 꼴이 되고 말 겁니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나서 시민들의 원성과 비난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 같습니다.”
“심해지면 폭동까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무력으로 진압할 작정입니까?!”
“그, 그건...”
“그 의견은 기각하겠습니다. 다들, 못 들은 걸로 하시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보도록 하죠”
윌리어스가 야심 차게 내민 의견을 묵사발 만들자 백작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왕실과 사돈이 된다고 기세등등한 거 좀 봐라!’
‘생각해서 말한다는 게 고작, 그거라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윌리어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회의를 주도했다.
이 주도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으면 안 됐다.
잃는 순간, 우리 가문의 숨통을 조일 게 분명했다.
이곳은 진짜, 늑대들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미묘한 기류가 귀족들 사이에서 다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단연코, 제일 조심해야 할 존재는 후작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척 가만히 있는 게 역겹단 말이지.’
뒤에서 오만 술수를 다 걸으면서 앞에서는 깨끗한 척, 아무것도 모른 척 하는 게 역겨울 정도로 심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최근에 들어서 더 심해졌다.
‘아마도 자기 딸이 간택을 받지 못한 거 때문이겠지?’
그게 맞는지.
우리 집안이 왕실과 사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무섭게 힘의 균형도 순식간에 변화했다.
쉽게 말해. 정치든, 외교든 영원한 아군도 없었고, 영원한 적군도 없었다.
권력이 더 커지는 걸 두려워해, 힘이 약한 계층들은 눈치를 슬슬 보면서 딴 곳으로 붙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두뇌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데.’
외부적으로든, 내부적으로든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어서 이 자리를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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