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마리아 왕국(1)
펄럭- 펄럭-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에밀리아는 활짝 웃었다.
“아빠, 저기 좀 봐요. 금세 작아졌어요.”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알렉스가 고개를 내젓자 루시안이 지원사격을 나섰다.
“고소공포증이라도 있었으면 시일이 좀 걸릴 뻔 했는데. 다행이네요.”
“한 치의 거짓도 없기를 바라네.”
알렉스가 차갑게 굴자 루시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되게 의심이 많으시네요.”
“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 주의라서 말이네. 그러니 자네가 좀 이해해주게. 늙은이의 추태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출발인가.
루시안이 알렉스를 태우고, 하이든이 에밀리아를 태우고, 나는 다크 엘프 뒤를 탄 상태로 우리는 상공을 횡단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새로운 행선지로 이동 중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저씨가 꼭 가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서 양해를 구하자 나도 할 수 없이 따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안이랑 헤어진 마당에 어디 갈 곳도 없었고, 에밀리아와 아저씨랑 우역곡절 끝에 만난 마당에 다시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미련이 남는 모양인지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날씨가 왜 이렇게 흐린 건지. 아침 댓바람부터 안개가 자욱해서 위도르 상단의 단원들과 이안, 레베카, 홀트, 테르네의 손인사가 금세 사라졌다.
안개 때문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미련 따윈 그만 떨치고, 너도 에밀리아처럼 그냥, 이 상황을 즐겨.
“말처럼 그게 쉽지 않네.”
이안이 기력을 되찾아서 좋긴 좋았지만, 걱정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괘..괘, 괜찮겠지?”
테르네에게 얼핏 들었는데 훈련의 강도가 생각보다 강하다고 들었다.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그런 이유로 근심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마라! 이안.’
다시 재회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근데, 자네는 안 가나?”
테르네가 물어보자 홀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이들은 하나둘씩 떠난 지 오래였다.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고 가려고.”
“하긴, 고장 났다가는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
테르네가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자 이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기 죽일 셈이야?”
“거짓말보다는 백 번 낫다고 보는데.”
그렇게 말하고, 테르네는 이안에게로 몸을 틀었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힘 조절을 잘 못하는 편이거든.”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이안이 호기롭게 나오자 테르네는 코웃음을 쳤다.
“재밌네.”
‘모처럼, 가르칠 맛이 있는 녀석이 나타났어.’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자 홀트는 숨죽이면서 지켜봤다.
여기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리 잡은 공간이었다.
햇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았고, 심지어 눈을 밝힐만한 횃불도 설치되어있지 않았다.
“부탁한대로 설치하기는 했는데 잘 될까?”
워낙, 어두워서 설치하는데 다소 시일이 걸렸다.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디, 잘 돼야 할 텐데.”
그 걱정을 가지기 무섭게 두 사람은 이제 시작할 모양인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었다.
한쪽은 요기(妖氣)였고, 한쪽은 신기(神氣)였다.
두 기운들이 서로 강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하더니.
챙! 챙! 챙! 챙!
어둠 속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번쩍이면서 불똥이 튀었다.
그러다
콰아아앙-!
누군가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홀트는 재빨리 눈을 번뜩였다.
그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야행성동물처럼 동굴 안쪽이 보였다.
피아식별이 가능해지자 홀트는 그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찬찬히 돌렸다.
그런데.
“이성을 완전히 잃었네. 또...”
인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늑대인간의 모습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잘 작동해서 다행이네.”
보호막을 설치한 효과가 있었다.
외벽이 부서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됐다.
“그럼, 이만 가볼까.”
할 일을 마친 홀트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륵-
마법사답게 공간마법으로 순간 이동했다.
홀트가 사라지자 테르네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더욱 날뛰었다.
“네 각오를 어디 한 번 보여 봐라.”
괴물이든, 뭐든...본능을 억제하지 못 한다는 말은 그냥, 정신력의 문제였다.
사실상, 가공할만한 정신력만 있으면 이 정도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르르르르르륵-!
늑대인간이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면서 달려들자 테르네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우선, 좀 맞자!”
누구나 그렇듯.
원래, 맞으면서 배우는 법이었다.
어린아이도 일어나기 전까지는 수십 번 넘어지고 일어나듯.
어느 누구라도 이 과정을 손쉽게 지나갈 수는 없었다.
퍽-! 퍽-! 퍽-! 퍽-!
테르네는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늑대인간을 두들겨 팼다.
복부를 때리기도 하고, 손깍지를 끼고 정수리를 내려치기도 하고, 틈이 날 때마다 그냥, 쉴 틈 없이 때렸다.
녀석이 진이 빠질 정도로 우선,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남들이 본다면 일방적인 구타라고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건 정당하게 때릴 수 있는 권리였고, 사랑의 매나 다름이 없었다.
악 감정이 절대 있는 게 아니었다.
*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 일하시느라.”
거울 앞에서 아내가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와주자 윌리어스는 아내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웃으면서.
“뭐, 평소에도 해왔던 일인데.”
“그래도 요즘 잠을...통 못 주무시잖아요.”
“그보다 딸은?”
“역시, 오자마자 딸부터 찾으시는 거는 여전하네요.”
몬스터 토벌을 무사히 마치거나, 국경선을 시찰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나가 있던 딸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남편은 질투심이 날 정도로 딸부터 찾았다.
완전, 딸 바보였다.
딸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부탁인데. 그 관심..반의 반 만이라도 저한테 베푸시면 안 될까요? 제 생일은 기억하고 계세요?”
“크흠...크흠...”
윌리어스가 주먹을 쥐고 목을 가다듬자 부인은 정이 뚝 떨어졌는지 옷에서 손을 뗐다.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으니까. 혼자 하세요.”
“도와주다 말고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이러면 애초에 도와 주지를 말던가.”
“네에..뭐만 하면 내 잘못이네요. 그쵸?”
“......”
부인이 살벌한 안광을 비추면서 째려보자 윌리어스는 그 즉시 거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럴 때는 그냥, 아내의 말을 순순히 듣는 게 그나마 살 수 있는 활로였다.
*
“와아~저기 안개 낀 거 좀 보세요!”
에밀리아가 눈앞의 장면을 보고 감탄하자 에밀리아를 뒷좌석에 태우고 있던 하이든뿐만 아니라 루시안, 알렉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기발랄하시네.’
‘하긴, 모든 게 다 신기하겠지.’
‘저게 말로만 듣던 천연요새인 건가?’
깎아지른 절벽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그것도 산맥처럼
초입부터 광활한 대자연과 마주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일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적어보였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확률이 아무리 희박해도 가능성이 0%가까운 거는 아니었으니까.
-경관이 어마어마하구나.
천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물론,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짜, 높네.”
“그래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많이들 불리죠.”
여기까지 나를 태우고 왔던 그가 자부심을 한껏 가지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해 보이네요.”
“그래서 나라의 보물이자, 튼튼한 방어선이에요.”
이때까지 저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적국은 아무도 없었다.
수세기 전부터 저 절벽을 넘으려고 수많은 국가들이 도전했지만 어떤 나라도 패전만 연신 거듭했다.
심지어는 저 깎아지른 절벽을 공략한다고 망국(亡國)의 길로 접어든 나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축복받은 땅이었지만, 적국에게는 저주받은 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기만 넘어가면 거의 다 온 거나 다름없어요.”
“역시, 빠르네요. 와이번을 안 타고 왔으면 한, 5일에서 일주일정도 걸렸을 거 같은데.”
“그래서 우리에게는 와이번은 친구이자, 가족이나 다름이 없어요.”
“다들, 잘 따라 오도록!”
선두를 유지하고 있던 루시안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우선, 다리에 힘 빡 주시고, 손잡이 꽉 잡으세요.”
그 말과 함께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루시안을 따라서 와이번을 사선으로 비행시키자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안장에 있던 손잡이도 꽉 잡았다.
그야말로, 식겁할 만한 상황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하자 바람이 휘몰아쳤다.
펄럭- 펄럭-
맞바람이 여지없이 강타했다.
-아무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듯싶다.
천마가 주의를 주지 않아도 이미 그렇고 있던 참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선두를 유지하고 있던 루시안은 고개를 살짝 돌려보고 대열이 흐트러짐 없이 잘 유지되고 있자 마음 놓고 알렌을 조종했다.
안개를 뚫고, 절벽 틈 속으로 순식간에 진입했다.
그런 뒤.
슝-! 슝-! 슝-!
구불구불하게 엉켜있는 아찔한 절벽 틈 속을 매우 빠른 속도로 주파했다.
그 모습에 알렉스도 내심 감탄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비행술이군.’
와이번과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된 거 마냥, 절벽 사이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날라 다녔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주파했다.
슝-!
루시안을 시작으로 하이든도 신기에 가까운 비행술을 보여주자 에밀리아는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와아~ 되게 재밌다.”
“풉!”
에밀리아가 이 상황을 그저 즐기고 있자 하이든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어.’
너무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만, 벽에 부딪칠 뻔했다.
원래라면, 이 속도와 부딪칠지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에 겁을 먹어야 정상인데.
그녀는 오히려, 이 상황 자체를 그저 즐기고 있었다.
오히려, 성화했다.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어요?”
“그, 그..그건 좀 힘들 듯 싶습니다.”
“..그래요.”
그녀가 진심으로 아쉬워하자 하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곳은 워낙 폭이 좁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기 때문에 장난 칠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마(魔)의 구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이 곳에서 사상자뿐만 아니라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사고다발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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