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수산(龜首山)(1)
“당장, 멈춰라.”
“누군지 몰라도 신성한 재판장을 망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녀석이구나.”
병사들이 창과 검을 들면서 에워싸자 그녀도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인지 발걸음을 멈췄다.
“신성한 법정을 감히 모욕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법정 모독으로 죄질이 엄중하니. 죽음으로 사죄해라.”
심판관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도 사형장을 멈추게 만든 이를 유심있게 쳐다봤다.
심판관의 말대로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누구지?’
“어떤 미친놈인지는 몰라도.”
“이런 해괴한 짓을 잘도 벌이다니.”
‘얼핏 보기에는 여자 같은데.’
남자라고 하기에는 팔이 매우 가늘었다.
그런데.
"......"
그녀가 모자를 넘기자 고요함이 맴돌았다.
한눈에 봐도 빼어난 용모였다.
“맙소사!!”
“이거 꿈 아니지?”
“신궁(神弓), 에리카 님을 영접할 줄이야.”
“말도 안 돼!!!”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이었다.
“은거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어쩐 일이시지?!!”
“아까, 뭐라고 했더라..? 죽음으로 사죄 어쩌고저쩌고 했던 거 같은데.”
에리카의 말에 백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닭살이 돋았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다르게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설마, 들은 거는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숨죽이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괴팍한 성격 답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심판관은 재빨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에리카 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안다니, 됐어.”
“그럼...”
하지만 희망찬 그의 눈빛도 곧이어 사라졌다.
콰직-
화살이 그의 입을 뚫고 지나가자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철푸덕-!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였다.
‘허황된 소문이 아니었어.’
‘눈 깜짝할 새에 죽일 줄이야.’
병사들이 막을 새도 없이 죽이자 시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심판관을 죽인 뒤, 에리카는 시선을 옮겼다.
“너희들도 죽고 싶은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병사들이 창과 검을 내리자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카리스마 여전하네.’
‘그래, 죽기 싫으면 내릴 수밖에 없겠지.’
병사들이 무기를 치우자 에리카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병사들은 길을 비켜줬다.
‘그럼, 어디 들어볼까.’
“거기, 너!”
에리카가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병사는 창을 들고 차렷했다.
“넵!! 부르셨습니까!”
“재갈 물린 녀석, 재갈 좀 풀어줘 봐.”
“알겠습니다.”
병사가 신속하게 움직이자 에리카는 웃으면서 걸어갔다.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처형대 앞으로 걸어가던 에리카는 도착하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까,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거 같던데.”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얼른 말하기나 해봐. 뭘 봤고, 뭘 알고 있는 거지?”
에리카가 매서운 눈초리로 물어보자 부단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독거 노인처럼 은거한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지만, 이렇게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사람 얼굴 처음 봐?”
“아, 아닙니다.”
“그럼, 얼른 말해! 너도 저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다면.”
에리카가 눈짓으로 쓰러진 심판관을 가리키자 부단장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제가 그레이트 님을 본 거 같습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야?”
“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사형수가 폭탄 같은 발언을 날리자 사람들의 사이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이라면...?”
“거짓말입니다. 에리카 님.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그 분이 땅에 묻히는 장면을.”
“나도 봤어!”
“나도!”
“가증스러운 것! 시답지 않은 말로 혼란을 일으키려고 하다니.”
“다른 나라의 스파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제국을 흔들려는 수작이야.”
사람들이 믿지 않자 부단장은 묶여있는 손을 꽉 쥐었다.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믿어주는 걸까.’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들은 따가운 눈초리로 볼 뿐이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있었다.
“확인해보면 되겠지. 네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감사합니다!! 제 말을 믿어주셔서.”
하지만 에리카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고 네 목숨이 달라지는 거 아니니까. 이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줬는데도 졌으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그 말과 함께 에리카가 발길을 돌리자 사람들은 박수 갈채를 날렸다.
“역시, 성격이 시원시원하다니까.”
“난 또, 봐주는 줄 알았네.”
“역시, 일 처리가 칼 같아.”
“그래, 이래야지. 죽은 아들의 넋을 풀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에리카 님!!”
시민들이 길을 비켜주면서 환호하자 에리카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길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안개가 짙구나.
천마의 말대로 안개가 유난히 짙은 바다였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이안이 여기서 쉬고 갈 모양인지 말 고삐를 잡아당기자 상단 단원들도 그곳에서 멈췄다.
히이이이이잉-!
말을 세우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말에 건초 더미를 먹이던가,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가. 각자 자유를 즐겼다.
그중에서 나는 경치를 감상했다.
“눈이 정화되는 것만 같네.”
나는 뻥 뚫린 바다를 보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데.
“....!?”
물을 보충하는 사람이 있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닷물로 뭐 하려는 거지?”
“풋!”
누가 기분 나쁘게 웃자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알고 봤더니 이안이었다.
“왜 웃어?”
“뭔가, 단단히 착각한 거 같은데. 바다가 아니라 강이야.”
“.....!?”
-바보 같은 놈.
‘너도 몰랐으면서.’
-아..아, 아니다.
‘부정은 곧 긍정이라고 누가 그랬더라?!’
확인해보기 위해 땅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몸을 일으키고 강가로 걸어가, 진짜로 맞는지 양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셔봤다.
그런데.
“...진짜네.”
바닷물이었으면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었을 텐데.
민물인지 상쾌하고 시원했다.
“어때? 강 맞지?!!”
이안이 웃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다.
“강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뭐, 처음 봤으면 그럴 수도 있어. 안개가 잔뜩 끼어있기도 했고.”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들었다.
워낙, 강 폭이 넓고, 깊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
천마뿐만 아니라 나도 느꼈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점차 등장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나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경악했다.
“와아아아아아~!!!”
“여기서 저걸 볼 줄이야.”
“운 좋은데?”
자욱한 안개 속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무언가가 등장했다.
무언가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물살을 가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거대하구나.
천마의 말대로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거대하게 보일 정도라면 가까이에서 본다면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저걸 볼 줄이야.”
“저게 뭔데?”
내가 물어보자 이안은 알려줬다.
“귀수산(龜首山)이라고 쉽게 말해, 움직이는 땅이야.”
“움직이는 땅?”
-귀수산?
이름을 알아도 의문만 쌓이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그야말로, 등장부터 압권이었다.
“몬스터는 아니지?”
“걱정 마! 생각보다 순한 녀석이니까. 먼저 선제공격을 가하지는 않는 한은 괜찮을 거야.”
이안의 말대로 정말 그랬으면 싶었다.
나는 처음 보는 존재라서 순한 녀석인지, 난폭한 녀석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람도 날마다 바뀌는 게 기분이었으므로.
‘녀석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
아직, 거리가 멀어서 녀석의 용모가 제대로 안 보였지만, 걸어오는 포스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저기압이시지?’
레베카의 대련 상대를 자청했던 기사는 레베카가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자 막기 급급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대련 따윈 자청하지 않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 들었다.
챙! 챙! 챙! 챙!
연무장에서 몸을 단련하고 있던 기사들도 두 남녀의 대련 양상을 보고는 궁금증에 휩싸였다.
“레베카 단장님. 왜 그러시지?”
“공격은 꿈도 못 꾸겠네.”
“오늘도 반 죽어나가겠네.”
“잠시만 생각해보자. 오늘, 그 날인가?”
물을 마시고 있던 동료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이자 물어봤다.
“오늘이 그 날이라니? 무슨 소리야?”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구나. 오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다른 기사단과 대련하는 날이거든.”
“그래서 예민하신 거구나. 하긴, 불같은 성격이신데. 지기 싫으시겠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지?’
레베카는 눈앞의 상대를 분풀이 삼아서 검을 휘둘렀다.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감정이 실릴수록 검의 중압감이 한층 강해지자 상대 기사는 죽을 맛이었다.
얼른 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모래 시계가 얼른 다 떨어지기를 원했다.
“레베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레베카는 그 즉시 대련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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