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1)
“아저씨!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데미안이로구나. 내가 얼핏 듣기로는 에밀리아랑 같이 나갔다고 들었는데 왜 혼자니?”
아저씨가 물어봤지만 나는 질문보다는 아저씨가 술을 홀로 마시고 있자 신경이 쓰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벌써부터, 낮술이라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평소에 음주를 하지 않던 아저씨가 갑자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도 합석했다.
계단을 밟고 야외테라스 위로 올라가 빈 의자에 착석했다.
“아저씨, 평소에는 입에 가까이 대지도 않던 술을 갑자기 왜 드시고 계세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런다.”
-한잔 거하게 마셨네. 혀가 꼬여있는 거보니.
그게 맞는지.
탁자에는 술병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것도 안주도 없이 술만 진탕 마셨는지 술병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면 몸에 해로운데.’
자고로, 술은 안주가 있어야 했다.
그것도 견과류, 고기 같은 안주보다는 과일 같은 안주가.
그래야 술을 마시더라도 다음날이 되면 숙취도 적고, 속이 안 쓰렸다.
“아저씨,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적당히 마시세요. 에밀리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에잇! 이...이 ㅈ..정도는 괘...아나, 괘하나.”
병째로 아저씨가 술을 들이키자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이건 아무래도 아니었다.
보기가 너무 힘겨웠다.
“아저씨,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내가 병을 낚아채자 알렉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내가 술을 마시는 것도 어쩌면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
‘진짜 왜 이러시는 거지?’
오늘 따라 어깨도 축 처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계속 내뱉을 뿐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슬픔을 술로 달래는 걸로 밖에는 안 보이는구나.
‘너도 그렇게 느껴지지?’
이건 아무리 봐도 아저씨답지가 않았다.
*
“우와~!!”
“거기서!”
“자꾸 어디로 도망치는 거야.”
“이 하등한 종족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바즈라가 연신 짜증을 냈지만, 어린아이들의 관심은 온통 쫓는 거에만 관심이 있는지 바즈라를 쫓기 바빴다.
“이 쪼그만 게 무지 빠르네.”
“제발~”
“한 번만 만져보자!!”
아이들이 잠자리채 또는 맨손으로 잡으려고 하자 나무 밑에서 앉은 채, 뜨거운 뙤약볕을 피하고 있던 비앙카는 손을 모으고, 주의를 줬다.
“얘들아! 괴롭히면 안 돼. 그러다가...”
“괜찮아요.”
무릎을 오므리고 옆에 앉아있던 에밀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저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도, 은근히 즐기거든요.”
“그래도 정령(精靈)에게 저런 식의 대우는 걸맞지 않아요. 오히려, 존중받고 경외심을 듬뿍 받아야 할 존재죠.”
“에이~ 너무 치켜세워 주지 마세요. 그러다가 버릇 나빠져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태초부터 자연을 숭배하는 우리들에게 정령(精靈)이란, 거의 신(神)에 필적했다.
자연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떠 받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눈앞의 그녀는 정령을 몸종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같은 피를 가진 엘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껍데기만 비슷할 뿐, 생각과 관념의 차이가 완전히 갈렸다.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이런 자가 어떻게 계약을 한 걸까?’
그것도 어떠한 탁한 기운이라도 소멸시킬 수 있는 뇌(雷)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진짜, 이해할 수 없네요.”
“그럼, 이해하지 마세요.”
“네?”
“머리 아프게 이해하지 말고. 그냥, 한 귀로 한 귀로 흘리세요. 고민도 너무 많으면 그것도 병이에요.”
천진난만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또래로 보이는데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는지 생각이 트여있었고, 긍정적이었다.
“저..저기, 저랑 친구할래요?”
“.....!?”
에밀리아가 눈을 끔뻑이자 비앙카는 웃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무래도 잠깐, 미친 거 같았다.
“죄, 죄송해요. 그, 그런 뜻이...”
“진짜죠?”
“아니, 제가 잠시 말이 헛나왔어요.”
“뱉은 말은 도로 주울 수가 없어.”
“네?!”
그 말이 진짜인지, 그녀는 다짜고짜 말부터 놨다.
“잘 부탁해. 비앙카! 내 이름은 에밀리아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아까, 얼핏 들었어.”
“아..그, 그랬구나.”
얼떨결에 친구가 생기자 비앙카는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친구가 또 생겼어.’
에밀리아는 활짝 웃었다.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다.
뭔가, 보람차고, 행복했다.
“이제,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야.”
무려, 같은 피를 가진 친구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이곳에서 정착하고, 살고 있었다.
*
“아저씨,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나는 살 가치도 없는 놈이야. 죄인이지. 죄인...”
테이블에 머리를 푹 박은 채 알렉스가 중얼거리기만 하자 애송이는 차마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는지 도움을 요청해왔다.
아무리 봐도 술에 잔뜩 취한 모습이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어쩌지?’
-어쩌기는 술을 못 마시게 해야지. 그것도 아니면 찬물을 확 끼얹던가?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냉수 마찰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게 분명했다.
그런데.
-야! 이 바보야! 그냥,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야! 그럼, 말을 말던가.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장난은 왜 치고 난리야? 장난칠 기분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야! 그러면..
천마의 방법을 들은 나는 눈이 번뜩 떠졌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저씨, 제가 오늘 시장 거리에서 누굴 본 줄 아세요?”
“추..취하고 ㅅ...싶은데 치..취하...지가 아...않는구..나.”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있자 나는 나대로 아저씨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입을 멈추지 않고, 연신 떠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저씨랑 똑 닮은 엘프를 봤어요!! 진짜, 신기한 거 있죠? 그래서 에밀리아랑...”
“지금 뭐라고 했니?”
알렉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멱살을 잡고 눈을 부릅뜨면서 물어보자 나는 순간, 멍했다.
‘이게 대체...’
-역시, 통할 줄 알았다니까. 술이 바로 깼네.
천마의 말대로 희망이 한 점 없던 아저씨의 눈에 생기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웃었다.
“아..아, 아저씨..우선, 옷부터 좀 놓아주시고..”
“미,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만...”
멱살을 잡고 있던 알렉스가 황급히 놓고 뒷걸음질 치자 나는 손사래를 쳤다.
“괘, 괜찮아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아니다. 내가 죽일 놈이다. 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진짜, 왜 그러세요?”
애송이의 걱정대로 오늘 따라 알렉스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혼자서 연신 자책하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수밖에!!
‘특단의 조치라니?’
-너는 그냥, 내 말만 믿고 그대로 수행하기나 해. 되묻지 말고.
천마가 강경하게 나오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특단의 조치라니..?’
평소에도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속을 알 수 없는 천마인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챙! 챙! 챙! 챙!
대련 상대를 해주고 있던 하이든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자 루시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치이이이이익-
검을 흘리면서 몸을 돌리고, 팔을 쭉 뻗었다.
그 순간.
“졌습니다!”
루시안의 검 끝이 목을 겨누고 있자 하이든은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쨍그랑!
연무장 밑으로 검이 떨어졌지만 루시안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무슨 고민이길래? 대련하는데 정신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
검을 거두면서 루시안이 물어보자 하이든은 속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추진하실 생각이십니까?”
“뭐야? 겨우, 그거 때문이었어?”
“너무 태평하게 말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대로 가면 나는 꼭두각시가 되고 말 거야.”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너무 심할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내가 가진 힘은 미약해.”
선왕(先王)에게 권력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건 내 힘이 아니었다.
그 힘은 쉽게 말해, 아버지의 위명(威名)이 있었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내야만 해.’
이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힘으로 힘껏 도약해서 힘차게 날아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장로들이 그 틈을 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절대, 뺏길 수 없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자리만큼은 사수해야했다.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갈고 닦은 자리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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